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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

『그랜드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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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이웃들에 대한 하수상한 이야기

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람들


흔하디흔한 괴담 하나.


층간소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가 있었다. 윗집에서 들리는 소음이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낮이건 밤이건 할 것 없이 쿵쿵대며 걷는 발소리는 결국 여자를 노이로제에 빠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어느 날(아마 여름이었을 텐데), 여자는 부엌칼을 손에 쥐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윗집으로 향했다. 거칠게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찼다. 한참 소란을 피우는 동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에 맞은편 집 현관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요?”


할머니는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 도대체 누구예요? 어찌나 시끄럽게 하는지…….”


“에? 그 집은 사람 안 산지 한참 됐는데. 사고가 나서…….”

 

이런 식의 괴담은 노이로제에 걸린 여자가 환청을 들었던 거라거나 빈집에 숨어든 불청객, 혹은 정말로 유령이 살고 있었다는 식으로 변주된다. 장르와 결말이 어찌되었건 이 괴담이 전하는 근본적인 메시지가 이웃과 단절된 도시인들의 삭막한 삶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의 집(인천의 빌라)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나도 아파트에 살았다. 수도권 외곽의, 허허벌판 한 가운에 들어선 대규모 단지였다. 주변에는 우리 아파트 말고 이렇다 할 건물이 없었다. 멀리서 아파트를 바라볼 때면 가끔 아득해지곤 했다. 거대하고 단단한 콘크리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아파트라는 멋들어진 공간에 살기 전에는, 그러니까 취직을 해서 갓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고시원에 살았다. 한 평 남짓한 고시원은 아파트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나는 3만 원을 더 내고 손바닥 만 한 창문이 뚫린 방을 얻었는데 겨울에는 단호하게 춥고 여름에는 끈질기게 더웠다. 침대도 좁았다. 그 낡은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일 때마다 울리는 삐걱삐걱 소리를 들으며 더 넓은 집, 적어도 커다란 침대를 놓을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다짐했다.


그 후 어찌어찌 아파트에까지 이르렀다. 고시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방이 생겼다. 큰 침대도 생겼다. 그러나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다는 사실만은 고시원 시절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얇은 베니어판인지 아니면 두꺼운 콘크리트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벽 건너편의 누군가와 일면식도 없이 살아간다는 점은 똑같았다. 우리의 이웃은 그저 소리로만 존재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대게 아주 불쾌하게 다가왔다.

 

옆집의 누군가, 혹은 아랫집이나 윗집의 누군가가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위에서 말한 괴담만큼이나 오래된 도시 전설이다. 초인종 옆의 낙서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추면 흠칫 놀라게 되고 다른 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일 모두 이런 상상, 이런 전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점을 영리하게 파고든 작품이 바로 영화 <숨바꼭질>이다. 인과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헐거운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이 영화가 흥행을 했던 건 도시인들이 갖는 이웃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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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리으리한 그랜드맨션


‘맨션’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이다. ‘대저택’을 의미하는 맨션이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이름이 되는 동안, 그리고 그 ‘맨션’들마저 이제는 낡은 건물이 되어버리는 동안 우리 주위에는 소리로만 존재하는 ‘수상한’ 이웃들이 늘어갔다. 그 수상한 이웃들 중 누군가는 외로이 죽어 간 독거노인이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생활고 때문에 목숨을 끊은 모녀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진짜 살인마나 변태성욕자나 간첩도 있었다.


오리하라 이치의 『그랜드맨션』은 ‘그랜드’라는 거창한 이름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건지 이름은 ‘그랜드맨션’이지만 작품의 무대가 되는 아파트는 전혀 ‘그랜드’하지 않다. ‘맨션’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저 임대 전용의 4층짜리 낡은 아파트일 뿐이다. 그런데 이 맨션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하다. 층간소음, 스토킹, 가정폭력, 아동학대, 살인 등 범죄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부를 만 한 사건들이 각각의 집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소설 속 그랜드맨션은 사회의 병리현상이 빼곡하게 들어 찬 공간이다.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부를 만 한데,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2014년의 한국이 배경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치 『그랜드맨션』이라는 경계를 두고 똑같이 찍힌 데칼코마니를 보는 느낌이다.


임대료가 싼 그랜드맨션에는 자연스레 노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든다. 젊은 사람들이 점점 빠져나가는 그곳에서 노인이 혼자 죽어가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불법을 일삼는 것 또한 사회의 축소판인 그랜드맨션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러니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 이웃이 살인자일지도 모르고, 아동학대를 일삼는 파렴치한일지도 모르고, 남의 집을 엿보는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야말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아니면 홀로 쓸쓸히 죽어서 썩어가는 중이거나.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의 론도』『도착의 사각』 등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얻은 작가이다. 『행방불명자』『원죄자』, 그리고 『침묵의 교실』까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인간의 저열한 욕망과 치부에 대한 씁쓸한 조소(嘲笑)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쓰디 쓴 뒷맛이 남는다. 물론 책을 한 번 펼치면 좀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하지만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아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랜드맨션』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창하게 사회의 병리 운운했지만 이 작품이 정말로 두렵게 다가오는 것은 내 주위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랜드맨션은 내가 살고 있는 빌라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옆집 사람이 사실은 아동학대범이나 살인마는 아닐지 의심하게 되는 순간, 『그랜드맨션』은 불길한 예언서처럼 다가온다.


오리하라 이치는 ‘서술 트릭’의 달인이다. 마지막에 가서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솜씨가 환상적인데 『그랜드맨션』도 어김없이 기막힌 반전들이 등장한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깜박 속을 수도 있다. 그러니 긴장을 늦추지 말 것, 내 이웃의 누군가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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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오리하라 이치 저/민경욱 역 | 비채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나만 아니면 상관없고 서로 믿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그늘이 반영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연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가 더는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술트릭의 대가’로 불리는 작가답게 밀실은 물론 다중시점과 시간차 서술 등의 기법으로 읽는 즐거움 또한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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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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