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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멸치 인상기 -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포구

엔진 소리에 맞춰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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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여명이 바다의 색을 투명하게 비쳐냈다. 갈매기의 배고픈 울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배 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외국인 선원들은 여전히 그물 아래에서 온몸으로 멸치들과 사투를 벌였다. 조타핸들을 잡고 있는 선장과 그물을 끌어당기는 선원, 파이프로 멸치를 옮기는 선원, 멸치와 다른 생선을 구별하는 선원과 멸치가 삶기는 물의 온도를 확인하는 선원, 삽으로 멸치를 퍼서 틀 위에 담는 선원과 삶긴 멸치가 담긴 틀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선원. 어선단에 있던 선원 중 누구도 그날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겹의 타이즈와 파스형 핫 팩

휴대폰의 알람이 울렸다. 미리 섭외해둔 멸치 배를 타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할 시간이었다. 나는 준비해온 타이즈를 두 개나 겹쳐 입었다. 새벽부터 겨울 바다를 항해하게 될 생각을 하자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군 시절의 혹한기 훈련 때,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의무병을 찾았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자칫 잘못하면 군화를 신은 채로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던 선임들의 농담이 좀처럼 가볍게 들리지 않던 이등병 시절이었다. 그날 밤, 텐트 안에서 취침 점호를 할 때야 비로소 선임들은 모두 양말을 두 개씩 겹쳐 신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침낭 속으로 핫 팩을 던져줬고, 나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일 년이 지난 혹한기 훈련 때에는 예비 양말을 몇 개나 더 챙겼고, 후임들에게 던져줄 핫 팩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나서는 더 이상 양말을 겹쳐 신을 일도, 핫 팩을 준비할 일도 없었다. 군인의 날씨와 일반인의 날씨가 다르다는 것을 모든 예비군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반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온내의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카디건 위에 야상점퍼를 입고, 지퍼를 목까지 잠갔다. 그러다 셔츠까지 다시 벗고, 내의 위에 파스 형으로 된 핫 팩을 붙였다. 이내 몸에 열기가 돌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였다.




남해 인상기

나에게 남해의 모든 포구는 두 가지의 인상으로 묶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차와 간석지의 발달로 만(灣)의 형태가 쌍둥이처럼 똑같이 굽어져 있다는 것이다. 파도는 억겁의 세월동안 스스로 조각칼이 되어 신비를 부려놓았다. 남해의 어떤 포구를 가도 그 절경에 순위를 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남해라는 지역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 다가온다. 내가 남해의 특정 지역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남해라는 섬 자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급한 성미에 잡은 지 5분 내로 죽어버려서 멸어(滅魚)라고 불리는 생선인 멸치다. 어머니의 밥상에서 조연역할을 내놓은 적이 없는 이 멸치는 남해의 은빛바다를 고스란히 닮아 있다. 만조 때 육지 가까이 들어온 멸치 떼는 간조 때 먼 바다로 나가려다 대나무 그물에 걸리고 만다. 이런 선조의 지혜를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남해의 죽방렴은 멸치의 비늘에 상처를 내지 않아서 최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젓갈로 쓰이는 큰 멸치들은 잡은 즉시 배 위에서 삶아진다. 대변, 남해, 통영, 진주 등의 포구에 가면 굴뚝으로 뜨거운 김을 내뿜는 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멸치잡이 배다. 내가 타기로 약속 되어 있는 배 역시 이 멸치 배다. 나는 남해를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이다.


물건리 인상기

물건리 포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 절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해의 독일마을에 올라서니 활등처럼 휘어진 만의 형태를 따라서 곱게 심어져 있는 숲을 볼 수 있었다. 길이 약 1,500m, 폭 30m의 숲으로 약 3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심어놓은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이었다. 팽나무, 푸조나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무환자나무 등의 낙엽활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주를 이루는 이 숲은 바람과 파도의 방패로 조성되었는데, 깨끗하고 우거진 숲에 물고기가 이끌려 포구가 번성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중한 곳이었다. 그 중 당산나무로 쓰이는 사랑포구나무는 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처럼 포구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수호신이었다.

물건리는 마른 수건이라는 뜻을 가졌다. 마른 수건을 머리에 이고 장독을 든 여인네의 모습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중심에는 포구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백여 개의 장독이 한곳에 줄지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장독에는 남해 멸치로 만든 젓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물건리 포구에서 낚싯배를 운행하는 한 선장의 말로는 선비들이 바둑을 둘 때 여자들은 수건을 쓰고 남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풍습이 마을의 이름을 결정지을 정도였으니, 그 시절의 풍경이 지금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물(勿)과 건(巾)의 한자어는 포근하게 바다를 감싸는 포구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격이나 외모가 이름과 적합하게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름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엔진 소리에 맞춰 사는 사람들

새벽의 물건리 포구는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속장소에는 기관장이 나와 있었다. 멸치는 떼로 이동하기 때문에 레이더를 탑재한 어탐선이 선두를 섰다. 그물을 펼칠 두 대의 쌍둥이 배가 뒤를 따랐다. 그물을 들어 올리면 즉시 접안해서 멸치를 삶아야 하는데, 물을 끓여낼 수 있는 배가 바로 내가 타야할 배였다. 총 네 대로 이뤄진 어선단이 동시에 작업을 해내야 하는 대형 어업이었다.

출항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선원들이 자고 있는 방 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선상에서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한층 내려와야 했다. 아직 외국인 선원들이 자고 있다는 말에 고양이 걸음을 했지만 차가운 쇳덩어리는 봐주지 않고 제 목소리를 냈다. 매캐한 석유냄새가 훅 끼쳐왔다. 가운데가 통로로 뚫려 있는, 내무반 식 방이었다. 통로에는 곤로가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양 갈레의 장판 위에는 다섯 명의 선원이 꿈쩍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벽 밖이 바로 바다였다. 이렇게 매일 바다 속에서 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묘한 한기로 다가왔다. 어색한 공기와 침묵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싸더니, 순간 온몸이 굳었다. 쇳덩이로 이뤄진 80톤의 배가 수면 위로 오 센티미터 정도 떠오르는 듯 하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느낌은 거의 십 초 정도 지속되었다. 발바닥 아래서부터 진동이 찾아왔고,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러자 다섯 명의 선원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나선형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나는 그들이 누웠던 이불을 바라보았다.

엔진소리에 맞춰서 일어나고, 그 소리가 꺼져야 잠이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다 건너 산 너머의 국가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한국으로 오는 노동자들은 고향과의 시차도 기온차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엔진소리가 그들의 시계이자, 일상이었다. 나는 떨려오는 몸을 추스르며 그들이 뛰어올라갔던 나선형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선상에 불이 밝혀졌다. 아직 해를 보기에는 이른 새벽 다섯 시였다.




남해 멸치 인상기

남해 앞바다를 빠르게 항해하던 배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그물이 던져진 모양이었다. 이내 그물 크레인을 실은 쌍둥이 배가 접안해서 밧줄로 연결했다. 두 배는 똑같은 노트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자칫 한 배가 추월하거나 뒤쳐지면 대형 사고를 나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전문성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두 개의 크레인이 빨간 그물을 끌어올리는 진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물이 얼마나 길고 큰지, 몇 바퀴를 휘감아도 여전히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그물위로 은빛 가루가 떠올랐다. 그것은 네 대의 배가 밝히는 조명 속에서 반짝거렸다. 이내 몇 마리의 멸치가 튀어 올랐고, 잠시 후에는 몇 십, 몇 백, 몇 천 마리의 멸치들이 그물 속을 날아다녔다. 크레인은 남해바다를 통째로 담아내기라도 할 심산인지 그물을 힘차게 끌어올렸다. 드디어 그물의 끝이 보였다. 한 무리의 멸치 떼를 모두 담아낸 그물은 바닷물과 은빛 비늘을 아래로 쏟아냈다. 선원들은 그물이 엉키지 않게 하려고 그물 아래로 들어갔다. 바닷물이 그들의 정수리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바다 위로 날리는 비늘은 눈꽃송이 같았다. 냄새를 맡은 갈매기의 무리가 어선단 위를 선회하며 날아들었다. 멸치 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남해 바다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탄 배가 쌍둥이 배와 접안했다. 거대한 흡착 파이프를 이용해서 그물에 있던 멸치를 이동시켰다. 멸치 삶는 장치는 갑판 선상에 설치되어 어획한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냈다. 멸치가 삶기는 고소한 냄새가 새벽공기를 잠식했다. 그물에 같이 올라온 다른 생선은 분류를 했지만 전갱이와 호래기(꼴뚜기)가 같이 삶기기도 했다. 진기한 광경에 이리저리 고개를 드밀던 나는 연신 침을 삼켜댔다. 그러자 기관장이 입 속으로 잘 삶긴 호래기 한 마리를 넣어줬다. 쫀득쫀득한 호래기의 깊고 진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짭짤한 그 맛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을 것이었다. 온몸이 따뜻해졌다. 나는 손을 뻗어서 막 삶긴 멸치 한 마리를 입에 넣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남해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도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때 먹었던 호래기와 멸치의 맛이 여전히 혀뿌리에 고스란히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바다의 색을 투명하게 비쳐냈다. 갈매기의 배고픈 울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배 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외국인 선원들은 여전히 그물 아래에서 온몸으로 멸치들과 사투를 벌였다. 조타핸들을 잡고 있는 선장과 그물을 끌어당기는 선원, 파이프로 멸치를 옮기는 선원, 멸치와 다른 생선을 구별하는 선원과 멸치가 삶기는 물의 온도를 확인하는 선원, 삽으로 멸치를 퍼서 틀 위에 담는 선원과 삶긴 멸치가 담긴 틀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선원. 어선단에 있던 선원 중 누구도 그날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그 순간이야 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남해 인상기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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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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