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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처럼 낮게 앉았을 때 보이는 강정 마을의 풍경들 -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포구

제비들이 구럼비 위를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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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에 대해 알아보니, 새끼 제비는 부화한지 20~24일이면 둥지를 떠난다고 한다. 그러니 위판장의 제비집도 새끼들의 첫 비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날개를 들썩이며 첫 비행의 단꿈을 꾸고 있을 녀석들……. 아침이 밝으면 제비들은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제비 사진을 찍다

강정 포구의 위판장 입구에는 제비둥지가 있다. 제주도 여행을 마친 지 이주일이 지났으니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어미 제비는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찾아, 보다 낮게 비행하고 있을 것이다. 포구를 여행하다 보면 처마 밑에 단단하게 지어 놓은 제비둥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한동안 시간가는 줄 모른다. 먹이를 문 어미 제비는 둥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어느새 사라진다.

카메라를 든 것이 실수였다. 어미 새가 새끼들에게 작은 벌레를 건네는 그 찰나를 담아내고 싶었다. 위판장의 입구가 낮아서인지 더 욕심이 났다. 줌을 당기고 셔터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지만 한참동안 어미 제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제법 집요했다. 급기야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집요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의문은 ‘어미 새가 왜 오지 않을까’에서 ‘새끼 새는 왜 더 이상 지저귀지 않는가‘로 바뀌었다. 어쩌면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어미 새가 둥지에 들어가 제 집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제비둥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카메라를 꺼버렸다. 서둘러 위판장을 빠져나왔다.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만 없으면 지구는 참 살만할 텐데……. 이 말을 반박한 정치학자 조지 카텝은 인류가 자연을 지키는 청지기가 될 때 비로소 인간 존엄성이 그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굳이 저명한 학자 이름을 들이밀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카메라를 들이댄 걸까. 하물며, 제비둥지를 건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을 던지고, 나무 작대기로 집을 부서 버리는 그런 잔인한 자들이.

조용하다.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저귀지 않는다. 그곳에 제비들이 있긴 했던 걸까.




왕 갈랑 갑서

방파제에 오르자 시원하게 펼쳐진 구럼비가 보였다. 한라산의 화산활동으로 수십 세기 전에 형성된 이 구럼비 해안은 강정 마을의 얼굴이었다. 한라산의 이름에는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는데, 그 옛날 한라산이 촘촘한 우주의 별들을 잡아당겨 가까이 부려놓은 것은 아닐까.

저 멀리, 구럼비 바위의 물웅덩이에 사람들 서넛이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는 이끌림에 방파제 아래로 내려갔다. 구럼비를 밟자 짙은 바다 향이 단번에 전해졌다. 구럼비 해안은 위에서 바라봤을 때와는 달리 보다 낮고 더 길었다. 나는 같은 높이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중요를 바다로부터 배웠다. 해가 뜨고 지는 바다가 그랬다. 구럼비는 바다만큼 낮지만 육지처럼 단단했다.

한 할머니가 무거운 비닐봉지를 양 손으로 안은 채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나는 비닐봉지의 정체가 궁금해 목을 쭉 뺐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던 할머니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휙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구덕이나 봉지 가져 옵서?”
나도 모르게 “예?”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흥분해선 침을 튀겼다.
“멜이여 멜, 몽케지 마랑 혼저 갑서”
할머니의 비닐봉지 속에는 멸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왕 갈랑 갑서.”
할머니는 그 말을 던지고선 방파제로 올라갔다.

웅덩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는 멸치가 한가득 헤엄치고 있었다. 즉각적으로는 남해안 일대의 전통어업방식인 죽방렴이 떠올랐다. 물살이 드나드는 좁은 물목에 대나무로 그물을 고정시켜 멸치를 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구럼비의 웅덩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치해둔 어장이 아니었다. 구럼비 어항은 누구도 깎지 않고, 누구도 그물을 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선물이었다.

물웅덩이에 몸을 담근 채로 바구니에 멸치를 담는 아저씨와, 비닐봉지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할머니, 아주머니.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미소로 나를 환영했다. 인사를 받자, 조금 전에 만났던 할머니의 사투리가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너도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는 멸치를 나눠 가지고 가렴. 나는 한참동안 구럼비와 멸치와 강정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발을 동글 것이?”

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아주머니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게 됐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만약 물었더라도 나는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있었을 것이다. 우린 제주도의 높은 하늘과 푸른 바다와 구럼비 위에 있었다. 그게 다였다.




마침표가 없는 소설을 읽고 싶다

고백하자면 강정 포구에 들린 것은 강정 도서관에 대한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작가들이 사회적으로 이러한 결속력을 보인 것은 나로선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강정 마을에는 책이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텍스트로 활자로 채우려는 그들의 마음이 구럼비처럼 단단하다. 활자는 사람의 눈을 깨게 하고 마음을 연다. 손바닥만 한 책 속의 작은 글자, 그 한 자와 한 자가 모여 이야기를 만든다. 나는 마침표가 없는 소설을 읽고 싶다. 그 속에 우주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제비에 대해 더 알아보니, 새끼 제비는 부화한지 20~24일이면 둥지를 떠난다고 한다. 그러니 위판장의 제비집도 새끼들의 첫 비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날개를 들썩이며 첫 비행의 단꿈을 꾸고 있을 녀석들……. 아침이 밝으면 제비들은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부디, 구럼비 위를 시원하게 날아 줬으면 좋겠다. 그 애들이 편히 날 수 있는 강정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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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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