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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밤,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본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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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실무 경험을 담은 첫 책 《유혹하는 에디터》를 낸 게 9월. 책 한 권을 힘겹게 털고 나니 출판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수를 놓았다. 그중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가 귀퉁이에 유물처럼 놓여 있던 아버지의 스크랩이었다. 이번엔 감상적인 시어보다 빛바랜 신문 기사 조각에 마음이 당겼다. 또 4년이 흘렀다. 드디어 책은 나오고야 말았다. 아버지와 이별한 지 2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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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엔 실패했다.

1993년의 일이다. 그해 1월,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죽음은 나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라는 단순한 깨달음에 가슴에 쥐가 났다.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아버지와 죽음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렸다. 생전엔 별로 살갑지도 않은 관계였다. 가끔 무언가 말씀을 해도 귓등으로 흘려듣는 아들이었다. 자식 된 도리에 대한 최소한의 의식은 있었나 보다.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일은 없는지를 살폈다. 그래, 당신이 남긴 보물로 무엇인가 해보자!

아버지의 34년 손때가 묻은 스물다섯 권의 스크랩북은 가족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해 5월 386DX 컴퓨터를 장만했다. 스크랩북을 꺼내 거기 적힌 아버지의 시를 한글 문서에 저장해나갔다. 책 한 권을 펴내도 괜찮겠다 싶었다. 보름 동안 매일 밤마다 시를 입력했다. 기대한 성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시집을 누가 읽기나 한대? 출판사에서 내주기는 한대? 아버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역시 보잘것없는 3년 차 무명 기자였다. 그냥 흐지부지됐다. 아버지의 스크랩을 잊었다.

시간이 한참을 데굴데굴 굴렀다. 16년이 흐른, 2009년. 나는 20대가 아니라 40대였다. 총각이 아니라 두 아이의 아빠였다. 말단 기자가 아니라 데스크였다. 자전적 실무 경험을 담은 첫 책 《유혹하는 에디터》를 낸 게 9월. 책 한 권을 힘겹게 털고 나니 출판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수를 놓았다. 그중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가 귀퉁이에 유물처럼 놓여 있던 아버지의 스크랩이었다. 이번엔 감상적인 시어보다 빛바랜 신문 기사 조각에 마음이 당겼다. 또 4년이 흘렀다. 드디어 책은 나오고야 말았다. 아버지와 이별한 지 2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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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 현대사》. 처음 의도와는 달리, 현대사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스크랩 속 과거의 신문 기사들을 오늘의 시사 문제와 연결해본다는 막연한 구상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스크랩을 뜯어볼수록 일이 커졌다. 신문 기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만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가십에 불과했다. 팩트 너머의 이면에 접근해야 했다. 시대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감을 잡으려고 시도하니, 전혀 별개였던 사건들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인과관계를 형성했다. 가령 1970년 8월 이판이 일병의 애인 인질 대치와, 같은 해 3월 일본 적군파의 요도 호 공중 납치의 공통분모가 보였다. 1981년 3월 뇌성마비 중학생 장애인의 자살과, 1983년 1월 게이바를 성토하는 기사를 함께 관통하는 흐름이 읽혔다.

저승의 아버지가 이승의 아들을 ‘열공’시켰다. 스크랩 기사가 밝히지 않는 진실은 다른 책에서 찾아야 했다. 참고해야 할 도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능히 안다고 믿었지만, 피상적이거나 실제로는 깜깜한 것투성이였다. 나는 평소 박정희에 관한 기본 지식이 있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이제야 박정희를 아주 조금 알게 됐다.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왜 어제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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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거창한 질문을 싫어하지만, 가끔 글쓰기 강의를 할 때 이런 화두를 던진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 따위를 들먹이려는 수작은 아니다. 내가 준비한 답은 간단명료하다. ‘내가 역사다.’ 너와 나는 역사다. 우리는 역사다. 최소 단위인 ‘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때 역사는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풍만하게 다가온다고 믿는다.

《대한국민 현대사》를 내며 역사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를 발견했다. 스크랩에 적힌 볼펜 글씨의 기록을 통해, 20대 중반의 청춘에서 50대 후반으로 늙어갈 때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가 역사다! 나의 아버지가 역사다! 아버지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 현대사는 훨씬 입체적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편집자였다. 당대 신문 편집자들이 뉴스의 가치를 판단해 편집한 지면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다시 나누고 골라 재편집한 셈이다. 돈이 되거나 밥이 되지는 않았다. 스크랩북이라는 그 결과물은 차곡차곡 모여 매력적인 사료(史料)가 됐을 뿐이다. 신문과 잡지 편집을 직업으로 삼은 아들은, 다시 자신만의 시각으로 아버지의 스크랩북을 재편집했다. 스물다섯 권이나 됐던 스크랩북이 딱 한 권의 역사책으로 환골탈태했다.

부끄럽다. 역사 전공자나 전문 연구자도 아니면서 현대사 책을 냈다. 동시에 나는 뻔뻔하다. 시시껄렁한 책을 냈다는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현대사 책에 비해 독특하고 재미있는 점이 적지 않다고 자신한다. 그 모든 공은 취미 생활 이상으로 스크랩북에 땀을 쏟은 아버지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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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1년 8월부터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웹진 ‘채널예스’에 31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이다. 초고는 기사 인용문을 포함해 2백 자 원고지 기준 3천 매를 넘었다. 책으로 묶기 위해 쳐내고 또 쳐냈다. 뭉텅이로 날려버린 꼭지도 서넛은 된다. 수록된 아버지의 시도 많이 버렸다. 전체의 절반을 덜어냈다. 손발을 자르는 듯한 아픔을 ‘출산’의 기쁨으로 상쇄하련다.

푸른숲 김수진 부사장 등 감사해야 할 분이 많다. 한 번 더 뻔뻔해지자면, 가장 감사하고 싶은 대상은 나 자신이다. 31주에 걸쳐 격주로 연재를 하면서, 도합 62주의 주말을 이 책에 투자했다. 한 주 일요일에 주제를 잡고 거기에 맞는 자료 조사를 하면, 다음 주 일요일에 아버지의 스크랩을 놓고 자료들을 참고하며 글을 쓰는 식이었다. 아침에 첫 문장을 시작해 저녁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엉덩이가 썩는 줄 알았다. 연재 도중 예고에 없는 눈 수술을 하기도 했다. 나의 미련하면서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칭찬하고 싶다.

독자들께는 이 책이 아버지 세대와 그들의 시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서먹서먹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찰하고 복원하는 계기가 되면 더 좋겠다. 난 이제 아버지를 언급하는 데 지쳤다. 지겨울 정도다. 이 책 구석구석에서 목 놓아 부르다가 문드러질 것 같은 그 이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생전에 가장 많이 드린 인사말처럼……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가 없는 20년을 어머니는 꿋꿋이 사셨다. 가장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분, 장정옥 여사께 이 책을 바친다.

2013. 4. 20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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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 현대사 고경태 저 | 푸른숲
아버지가 남긴 34년간의 신문 스크랩을 재료로 아들인 저자가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내놓은《대한국민 현대사》는 권세 잡은 이들만의 역사를 좇는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특별함이 깃들어 있다. 위세 등등하던 그들과 함께 그 시절을 살아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일상에 관한 역사책이다. 이승만의 공과,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전두환과 민주화 시위 등등 현대사의 굵직한 단면들에서 당시 일상을 지배한 각종 재난과 사건사고까지 한 사람의 국민이 바라본 시선으로 역사를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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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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