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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역사적 팩트(fact)를 복기하는 일은 자기 상실을 극복하는 첫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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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조선왕조 최고의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연산군이 남긴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을 고르고 또 골랐다. 설혹 방송 전체는 보지 못하더라도 이 문장만은 읽고 가기를 바랐다. 그것이 어쩌면 <역사채널ⓔ>를 통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화면 가득히 검은 물이 차 있다. 문득, ‘첨벙’ 하고 낡은 텔레비전 한 대가 물에 빠진다. 요샌 구하기도 힘든 브라운관 텔레비전, 몸체는 빨간색이다. 하얀 물거품이 화면 가득 차오르는가 싶더니 바닥의 반동을 겨우 다스린 텔레비전이 갑자기 ‘치직~!!’ 하고 켜진다. 그리고 선명한 타이틀 자막 <역사채널ⓔ>. 고작 10초 남짓이지만 그것은 내가, 우리 제작진이 담고자 했던 ‘역사의 시간’이었다.

물어본 이가 없기에 굳이 설명을 보태고 싶어진다. 화면 속 물은 기나긴 시간의 강, 역사를 상징하려고 했다. 낡은 텔레비전은 미디어, 물거품은 미디어가 역사를 불러낼 때 생기는 시간의 마찰을 표현하고자 했다. 피라미드에서 미라를 발굴할 때 피어오르는 먼지 알갱이들 같은. 그리고 텔레비전이 켜진다. 이제 <역사채널ⓔ>의 시작이다. 역사를 불러내는 미디어로서, 죽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한 조각을 현재로 호출해내기 위해서 <역사채널ⓔ>의 첫 방송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총 73편, 매주 한 편씩을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방송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조선왕조 최고의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연산군이 남긴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을 고르고 또 골랐다. 설혹 방송 전체는 보지 못하더라도 이 문장만은 읽고 가기를 바랐다. 그것이 어쩌면 <역사채널ⓔ>를 통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은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기획으로 만들었다.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시대 사고(史庫)를 본떠 만든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는데, 건물의 지하에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서고(書庫)가 있다. 촬영을 하러 그곳에 들어갔을 때, 첫 느낌은 묘하게도 ‘불안감’이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책들과 자료들. 그 묵직함과 감탄에 앞서 본능처럼 다가온 불안감은 어린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을 본 첫인상과도 일치했다. 어렸을 적 단체견학을 가서 본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을 마주한 나의 첫인상은 ‘불안’이었다. ‘하나밖에 없다는데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하나밖에 없는 것, 복제해낼 수 없는 것, 복제해도 ‘본래의 것’은 될 수 없는 것, 처음부터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하나.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내가 역사적 유물을 마주하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불길한 불안은 기어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2008년 남대문 전소(全燒) 사건. 그때 사람들이 느꼈던 집단 ‘멘붕’ 현상은 그런 불안감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는 그런 ‘유일무이의 상실’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전쟁과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수탈은 그 정점이다. 수탈되었던 북관대첩비의 이야기를 다룬 <100년 만의 귀환>은 그런 안타까움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상실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팩트(fact)’도 유일무이함을 상실할 수 있다. 팩트를 왜곡하고 금기(禁忌)로 만드는 일, 애써 무관심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치환하는 것으로 팩트는 훼손되고 정신은 상실된다. 이것이 훨씬 치명적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과 <보이지 않는 시선>이 이를 증거한다. 팩트가 팩트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 혹은 그런 나라에서 결국 역사는 그 자체로 불행하다.

“우리는 왜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야 하는가?” “왜 역사적 사실을 지금에 와서 복기해야 하는가?”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 사무처장 혜문스님이 답했듯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일은 우리의 슬픈 역사와 짓눌린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며, 지난한 과정을 통해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찾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문화재 반환과 역사적 팩트를 복기하는 일은 자기 상실을 극복하는 첫 단계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이 죽고 나서야 편찬작업을 시작했다. 권력과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자 함이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권력자들이 두려워했던 시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기억을 기록하는 일은 이제 남은 우리의 일일지도 모른다. 서문을 쓰며 다시 한 번 <역사채널ⓔ>의 첫 장면을 돌려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문동현 《역사채널ⓔ》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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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공저 | 북하우스
2011년 10월부터 기획ㆍ편성된 프로그램인 「역사채널ⓔ」의 내용들을 간추려 모은 책이다. 「역사채널ⓔ」는 「지식채널ⓔ」의 포맷을 벤치마킹해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한 프로그램으로, 2011년 10월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하여 학부모, 교사, 청소년 등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다. 본문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며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인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테마들을 압축적이고도, 밀도 있게 풀어낸 내용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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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공저14,2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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