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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와 하녀의 도를 넘어선 우정과 비극

서로의 신분을 초월한 그녀들의 우정은 결국… 궁녀의 하녀의 끈질긴 우정, 기옥과 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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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방의 나인 기옥과 세답방의 수모 서향은 궁궐 안의 서열로 따지면 차이가 컸다. 나인 기옥은 대비를 모시는 정식 궁녀였지만, 수모 서향은 정식 궁녀들을 시중드는 하녀였다. 처지로만 따지면 한 거처에 같이 사는 서향은 기옥을 모시는 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처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한 방의 상전이나 마찬가지인 기옥은 한 살 아래의 서향을 괴롭히지 않고 동생처럼 돌봐 주었다.

기옥己玉과 서향西香이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곳은 대궐이었다. 기옥이 열다섯 살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했을 때 서향도 궁녀로 입궁했다. 그 당시 서향은 기옥보다 한 살 아래인 열네 살이었다. 기옥과 서향이 입궁한 곳은 위세도 당당한 인목대비전이었다.

생과방의 나인 기옥과 세답방의 수모 서향은 궁궐 안의 서열로 따지면 차이가 컸다. 나인 기옥은 대비를 모시는 정식 궁녀였지만, 수모 서향은 정식 궁녀들을 시중드는 하녀였다. 처지로만 따지면 한 거처에 같이 사는 서향은 기옥을 모시는 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처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한 방의 상전이나 마찬가지인 기옥은 한 살 아래의 서향을 괴롭히지 않고 동생처럼 돌봐 주었다. 열다섯, 열넷의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는 동병상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소문이 날 정도로 아주 가깝게 지냈다.

기옥이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서향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인목대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기옥과 서향이 대비전에 궁녀로 들어온 지 10년의 세월이 지난 때였다. 모시던 상전이 세상을 떠나자 기옥과 서향은 장례가 끝난 후 궁에서 나와야 했는데, 기옥은 아버지가 있는 터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기옥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다시 궁궐로 불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인조의 왕비인 인렬왕후 한씨가 불러들였다. 기옥은 내전의 세답방 나인으로 들어갔다.

인렬왕후 한씨는 기옥이 대비전에서 일했던 궁녀라고 하여 상당한 예우를 해 주었다. 이 같은 예우에 힘입어 기옥은 궁녀로 재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전의 색장으로 승진했다. 편지 등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색장은 사실상 각 처소의 정보를 장악하는 요직이었다. 높은 자리는 아니라고 해도 각 처소의 정보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기옥은 색장이 되면서 왕비전에서의 영향력이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나 기옥과 함께 출궁했던 서향은 더 이상 궁궐에서 부르지 않았다. 서향은 곧 혼인했는데, 남편은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는 남자였다. 어쨌든 서향은 후처로 들어가서 자식까지 낳았다.

기옥이 왕비전의 궁녀로 재입궁한 지 3년째 되던 해 인렬왕후 한씨가 대군을 출산하는 경사가 있었다. 당연히 왕비전에서는 출산에 대비하여 미리 유모를 선정했다. 이때 기옥은 서향을 유모로 적극 추천했다. 서향하고는 전에 인연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 서향도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유모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영화 <궁녀> 中 (2007, 김미정 감독)

기옥의 추천을 받아 대군의 유모가 된 서향은 한씨 왕비가 출산하기 전에 다시 궁궐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수모가 아니라 대군의 유모라는 당당한 위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왕비 한씨가 출산한 대군은 태어난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 한씨도 크나큰 충격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출산 4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군의 유모로 입궁했던 서향은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을 받았다. 이른바 병자호란이었다. 압록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한 청나라 기마병들은 무인지경으로 조선 천지를 휩쓸었다.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던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청나라 군대는 수만 명의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서향의 큰아들 천인天仁도 전쟁의 와중에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혀 심양으로 끌려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조선인 포로들을 그냥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았다. 조선의 포로 가족들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포로들을 사 오려고 했다. 서향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전 재산을 처분하여 심양으로 떠났다. 사정이 딱해진 것은 서향이었다. 혼인하여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젖먹이에다가 남편의 전처가 낳은 열 살 조금 넘은 아들까지 있는데, 남편은 자신과 어린 두 아이의 생계는 아랑곳없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심양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돈도 없고 남편도 없이 두 아이와 함께 한양에 남은 서향은 먹고살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이때 서향을 도와 준 사람이 기옥이었다. 기옥은 인렬왕후 한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장렬왕후 조씨의 왕비전에서도 그대로 색장이었다. 기옥은 서향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궁궐에서 일거리를 찾아 서향에게 주곤 했다. 내전의 바느질거리며 빨랫거리를 서향에게 주어 돈벌이를 하도록 해 주는 한편 땔나무 등을 그냥 보내 주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옥은 당시 시중에서 비싼 값으로 거래되던 후추 등의 물건을 서향에게 싸게 넘겨 줌으로써 서향이 돈을 벌게 뒤를 봐 주기도 했다. 궁궐 안으로 공급되던 후추 등이 시중가보다 쌌기 때문에 필요량 이상을 내전에서 구입하여 남는 양을 서향에게 밀어 주었던 것이다. 서향이 번 돈의 일부는 당연히 기옥에게 갔을 것이다. 이렇듯 기옥과 서향은 은밀하게 재산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기옥과 서향은 만남이 잦아지고 편지 주고받는 일도 많아졌다. 이들이 수상한 관계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게다가 기옥은 돈이 넉넉해지자 눈에 띄게 좋은 옷을 해 입고 세간도 좋은 것으로 바꿈으로써 주변의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

기옥과 서향이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 지 1년쯤 지난 기묘년 1639년 대궐에서 저주 사건이 일어났다. 인조가 거처하는 건물 주변에 누군가가 사람과 짐승의 뼈 따위를 묻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8월 20일에 고발이 들어와 당일로 인조가 거처하는 대전을 비롯한 여러 궁궐들을 조사했는데, 궁궐의 굴뚝과 연통 및 계단 사이에서 무수한 저주물들이 나왔다. 당시 저주물이 발굴된 장소는 인조가 머무는 곳에서 14곳, 동궁에서 12곳, 그리고 인경궁仁慶宮에서 26곳, 경덕궁慶德宮에서 4곳이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수많은 저주물이 나오자 당연히 궁궐 안팎에서 누군가가 장기간 모의했다는 혐의가 돌았다. 불행하게도 궁궐에서는 기옥이 의심을 받았다. 작년부터 기옥이 서향과 은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수상한 행적이 많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기옥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기옥은 9월 1일에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 저주 사건의 내막과 배후를 이실직고하라는 것이었다. 기옥이 체포되던 날 당연히 서향도 체포되었다. 기옥과 서향 주변의 인물들도 여러 명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기옥과 서향은 혐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심문에 이어 곤장, 압슬, 낙형이 가해졌지만 계속 부인했다. 특히 기옥과 서향은 자신들의 혐의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혐의도 목숨을 걸고 부인했다.

모진 고문 끝에 기옥과 서향은 결국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궁궐에서 10대 때 맺은 인연이 죽음으로써 끝난 셈이었다. 궁녀와 하녀로 만났지만 이들의 인연과 의리는 이렇게도 질기고 처절했던 것이다.

기옥과 서향의 이야기는 정사인 『실록』에 단 한 번 나오고 그만이다. 이에 비해 조선 시대 역모 사건의 기록 문서인 『추안급국안』에는 ‘기묘년 나인 등 저주 옥사 추안己卯年內人等咀呪獄事推案’이라는 독립 사건으로 처리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9월 1일. 비 서향西香, 나이 30

“아룁니다. ‘너는 기옥과 한 몸과 같다. 서찰과 음식을 자주 들여보냈으며, 무릇 물건을 왕래할 때는 죄인 기옥과 반드시 직접 주고받았다. 기옥의 아비 차귀현의 진술에서도 너는 전부터 기옥과 절친했다고 했다. 궐내에서 들은 말들도 그 말과 동일하다. 어느 때에 함께 모의했으며, 저주물은 몇 번이나 들여보냈느냐? 사실대로 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중략)
제가 기옥과 함께 모의한 것과 저주물을 들여보낸 일은 제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추안급국안』, ‘기묘나인등저주옥사추안’, 9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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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신명호 저 | 시공사

드라마 「여인천하」 「다모」에서 「대장금」 「동이」, 최근에는 영화 「후궁, 제왕의 첩」까지.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무수한 궁중 여인들을 만나왔다.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만나볼 수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많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열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궁녀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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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금지된 성과 사랑, 끝없는 음모와 암투까지 조선 멸망 이후 최초로 밝혀지는 그녀들의 은밀한 사생활 드라마 「여인천하」 「다모」에서 「대장금」 「동이」, 최근에는 영화 「후궁, 제왕의 첩」까지.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무수한 궁중 여인들을 만나왔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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