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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에 알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들 - 88만원 세대가 아닌, ‘그냥 20대’와의 특별한 만남을 꿈꾸며

나는 정말 그렇게 아픈가. 어디가, 왜 아픈가. 아픔에 맞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처럼 아픈 다른 이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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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때 힘겹게 건너왔던 20대여, 당신은 아픈가. 당신은 많은 순간 아플 것이고, 또 많은 순간 괜찮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픈가 아닌가’가 아니라, 내 아픔의 맨얼굴을 투시하는 용기다. 내 아픔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스스로 치유하는 용기를 얻기 위해, 이제부터 나는 여러분들과 ‘그때 알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들’에 대한 질펀한 수다를 떨어보고자 한다.

멘토, 힐링, 테라피 등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단어들이 넘쳐나는 시대. 각종 치유의 담론이 범람하는 시대다. 어느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이런 치유의 담론이 유행하기 훨씬 전에, 사람들은 오히려 아픔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걸핏하면 ‘나도 혹시 우울증?’이란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각종 미디어의 협공 속에서 우리는 아픔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배운다. 아픔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기보다 혹시라도 아플까 봐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을 배운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도 심각하게 아픈 것일까. 혹시, 아픔을 걱정하느라 아픔에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 광적인 치유의 열풍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동시에 가장 소외되는 세대가 20대인 것 같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지만, 그 조언으로부터 튕겨나가고 싶은 욕망도 가장 강한 나이. 게다가 세상이 ‘너희는 지금 특히 더 아프다’, ‘너희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아프다’고 떠들어대니까, 괜스레 더 억울해지고 부아가 치미는 나이. 사실 뚜렷한 아픔보다도 막연한 분노 때문에 늘 먹먹한 나이. 스무 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억지로 등 떠밀려 어른이 되지만, 사실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은 저마다 다 다르다. 돈을 벌 수 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내 한 몸의 의식주를 잘 챙길 수 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고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고민 끝에 내린 그 모든 결정에 아무리 힘들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도움에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도움을 청하는 능력’과 동시에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모순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혼자임을 견뎌야 한다. 사랑도, 우정도, 더욱 성숙하게 ‘혼자일 수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연합이다.

아픔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쁜 것은 행복에 대한 강박이다. 행복은 좋은 것이지만, 행복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은 좋지 않다. 늘 ‘덜 행복한 현재’ 때문에 실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픔 또한 그렇다. 지금보다 덜 아팠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혹은 나보다 덜 아파보이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은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심각한 방해가 된다. 아픔은 증상이지 본질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강조하는 사람은 넘쳐나도 ‘내가 왜 아픈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픔에 질색하기 이전에 아픔의 원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능력. 나는 이것이야말로 나의 20대에 가장 부족했던 능력이었음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왜 아픈지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토록 아픔에 짓눌리진 않았을 것이다. 왜 아픈지를 차분히 돌아보았더라면, 아픔 자체에 굴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황도 멋지게, 슬픔도 아름답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때 몰랐지만, 지금에야 깨달은 소박한 앎’이야말로 내가 20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임을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 20대를 향한 메시지를 한 권의 책으로 써주실 수 있을까요.”

반짝이는 눈빛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랑스런 20대 편집자에게 이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했다. 내가 글쓰기 모드로 진입할 때,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적당히 숨기고 싶어 하는 주어, 바로 ‘나’를 직접 내세우라는 요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나’라는 주어를 쓰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엄청나게 긴장한다. 글 속의 나와 글 밖의 나를 완전히 분리해야 만 간신히 나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내가 너무 많이 노출되지 않도록, 그러나 나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그러나 쓰고 난 후에는 항상 나의 어설픈 연기력을 발견한다. 나라는 주어를 쓸 때조차도, 나는 나다운 어떤 것을 연기하고 있구나. 정말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냥, 나’란 없는 걸까.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엄청난 분장술을 발휘해 나라는 풋내기 연기자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20대를 향한 편지’는 글 속의 나와 글 밖의 나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모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작품, 대단한 위인들, 이런 것에 기대지 말고 그저 투명하게, ‘너를 보여달라’는 요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20대’를 향해 이야기하려면 나의 부끄러운 20대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편집자에게 미리 ‘쉴드’를 쳐두었다. 나는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도 대단한 위로의 메시지도 쓸 수 없다고. 내 글은 자기계발서도 심리치유 에세이도 될 수 없다고. 한창 20대의 클라이맥스를 달리고 있는 풋풋한 편집자는, 담담하게 ‘괜찮다’고 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된다고 했다. 사실 조금 놀랐다.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 없이, 대단한 위로의 메시지 없이, 어떻게 20대와 대화할 수 있냐는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두려워졌다. 아,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내가 ‘오케이’를 한다면 그건 곧 숨김없는 나를 보여준다는 것이구나. 멀리서만 안타깝게 바라보던 20대의 맨얼굴과 진짜 만난다는 것이구나. 나는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최고의 두려움과 맞서게 된 것이다. 문학 뒤에도, 영화 뒤에도 숨지 않고, 철학자 뒤에도, 위인들 뒤에도 숨지 않고 ‘그냥 나’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나’라는 것이 왠지 뜻밖에 달콤한 해방의 메시지 같았다. ‘그냥 나’와 ‘그냥 20대’가 만나면 어떨까. 나라는 존재 앞에 붙어 있는 각종 어설픈 수식어를 떼고, 특히 ‘20대’ 앞에 붙어 있는 각종 복잡한 수식어를 떼고-88만원 세대, 이태백, 청년실업 이런 거추장스러운 꼬리표들을 모두 떼어내고-‘그냥 나’와 ‘그냥 20대’가 만난다면, 우린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진솔하고 소박하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비로소 첫 번째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편집자의 기다림을 알면서도 미처 원고를 시작하지 못한 것은, 이런 담담한 마음을 먹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아니고, 인생을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편안한, ‘만만한 나’니까, ‘그냥 나’와 ‘그냥 20대’는 보다 솔직담백하게 ‘너와 나의 20대, 우리의 20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들이 다 ‘너흰 아프다’고 하니까, ‘그래, 나도 아픈가보다’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아파보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솔직함 같은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용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사실 일상 속에서 더 필요한 것은 ‘미적지근한 실망의 웅덩이 속에서 간신히 빛나는 아주 작은 사금파리’를 길어 올리며 묵묵히 살아가는 배짱이다.

내가 한때 힘겹게 건너왔던 20대여, 당신은 아픈가. 당신은 많은 순간 아플 것이고, 또 많은 순간 괜찮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픈가 아닌가’가 아니라, 내 아픔의 맨얼굴을 투시하는 용기다. 내 아픔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스스로 치유하는 용기를 얻기 위해, 이제부터 나는 여러분들과 ‘그때 알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들’에 대한 질펀한 수다를 떨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몸에 난 상처의 원인은 잘 알지만, 맘에 난 상처의 원인은 잘 모를 때가 많다. 불에 덴 상처로 인해 이다음에 불을 조심하듯이, 우리의 맘도 그렇게 다룰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상의 원인이 ‘온도’임을 알 듯 트라우마의 원인도 정확하게 인식하면 그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 된다. 그런데 마음은 몸보다 훨씬 연기력이 뛰어나서, 아파도 안 아픈 척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아픔을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마음의 가면’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아픈가. 어디가, 왜 아픈가. 아픔에 맞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처럼 아픈 다른 이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덜 힘겹게, 훨씬 더 멋지게, ‘우리의 20대’를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의 20대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시절’이 아닌, ‘든든한 영혼의 빽’으로,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자산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시간에는 20대에 가장 소중한 키워드 20,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정: 나보다 더 나를 닮은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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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여울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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