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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입구 주변 풍경. 목이 좋은 곳에 위치한 양품점 <파리양행>은 주인공인 교수 부인이 일하는 곳이다. | |
수도 극장 1곳에서만 관객 10만 8천명을 동원하여, 1956년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자유부인>은 당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 꼽히는 영화이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던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은 바람난 유부녀라는 소재 때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자, 그 파급력은 실로 대단해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키스나 포옹 같은
‘러브 씬을 허용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하는 여론이 이슈가 되었고, 문교 당국의 검열과 제작자 간에 외설이냐 예술이냐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인 문제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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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 역할을 맡았던 배우 김정림 | |
당시 한국 사회를 휘몰아 쳤던 연재소설
『자유부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 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다’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런 매도에도 불구하고, 연재 직후 출간된 책이 7만부 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했고, 문제가 되는 장면들 100피트를 잘라내는 검열의 아픔을 겪고서야 개봉한 영화도 공전의 히트를 치며 흥행에 성공했다.
격렬한 논쟁만큼 세간의 관심도 후끈 달아올랐고, 그 논쟁의 중심에는 자유부인 역을 맡은 배우 김정림이 있었다.
1922년에 태어나 평양이 고향인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월남하여 다방 레지로 일하다가 미혼모로 딸을 낳았고, 한국 전쟁 이후 요정에서 기생 생활을 하던 그녀였다. 당시 신인배우 발굴로 유명했던 한형모 감독에 의해 자유부인으로 전격 발탁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화려하게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거액의 개런티를 받고 옮긴 영화사에서 <자유부인> 속편을 만들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당시 가장 카메라를 잘 받는 얼굴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긴 했지만, 수수한 외모에 공허해 보이기까지 하는 굳은 표정은 개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결국 내리막길을 걷던 김정림은 영화계를 떠나 화류계로 들어간다. 요정의 마담으로 지내던 그녀는 영화계의 복귀를 여러 번 시도하지만, 더 이상 배우로서 주목 받지 못한다.
한국영화에서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된
‘부인 시리즈의 원조’라는 수식어만 남기고 김정림은 그렇게 잊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