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에는 정다운 이웃에게 특별히 수여하는 상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넘어 정다운 이웃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해도 틀림없이 상위 입상을 할 정도로 탁월하게 정다운 이웃이 있었다. 그 이웃을 만나고 그 정다움을 맛보게 된 것은 내 친구 덕분이었다.
낮부터 취해서 민폐를 끼치는 건 보통 내 몫이건만, 그걸 빼앗긴 것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친구는 난데없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친구 몇이서 순대국집 구석자리를 오전부터 점거하고 술과 음식을 들이붓고는 가로등이 켜진 다음에야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통수가 허전해서 돌아보니 아뿔싸, 어느새 이 친구가 회오리바람에 붙들려 간 도로시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여기는 오즈의 나라도 아니고, 헨젤과 그레텔을 아비가 버리고 간 숲이 부럽지 않을 만큼 사방이 어두컴컴한 산길인데 이 계집애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어 우리는 한마음으로 그녀의 안위를 빌면서, 돈 들이고 시간 들여 애써 마신 술이 이렇게 허망하게 깨고야 마는 것에 깊은 실망감도 감추지 못하면서, 어쨌거나 한 시간도 넘게 친구를 찾아 헤맸는데 절망스럽게도 우리의 수색 작업은 죄다 헛걸음이었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친구는 하필 하늘하늘하게 예쁜 여자애인 바람에, 남자 녀석이었다면 어디서 자빠져 자더라도 추우면 일어나서 제 길 가려니 하고 흥, 코웃음쳤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일단 집으로 철수해서 죽어라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아까 순대국집에서의 이 친구 상태를 복기해봤을 때 이 친구가 전화를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술은 점점 깼지만 그 덕에 서로에게서 풀풀 풍기는 막걸리나 된장 바른 풋고추나 푹 익은 깍두기 냄새 따위도 점점 선명해지는 바람에 우리는 점점 불쾌해졌다. 게다가 서남부 여성 연쇄살인범이니 나이 찬 처녀를 납치해서 어디 섬에 팔아버린다느니 장기밀매니 뭐 그런 이야기들이 줄지어 떠오르는 바람에 더욱 불쾌해졌다. 불쾌해서 불안하고 불안하니 더 불쾌해지는 좋지 않은 기분이 차곡차곡 차올라서 거의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바람처럼 사라진 그 친구의 번호였다.
얼른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선 이의 것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슨 구멍가게 이름을 대며 그리로 나오라는 소리에 우리는 헐레벌떡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생각해보니 이 아가씨를 길에서 주워서 붙잡고 있으니 몸값을 달라든가 하다못해 보관료를 달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쩌나 싶어 다 같이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까 순대국집에서 한낮의 연회를 거하게 벌이는 바람에 탈탈 털어봐도 오천삼백원이 전부였다. 우리야 오천원이든 오백만원이든 시세를 전혀 몰랐고 몸값이든 뭐든 일단 찾기나 해야 외상으로 해달라든가 할부로 갚겠다든가 말이라도 할 테니 돈 세기를 그치고 계속 달려갔다.
전화 속의 낯선 목소리가 일러준 구멍가게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친구의 번호로 전화를 걸자 지하로 계단을 내려오면 열려 있는 문이 있으니 그리 들어오시라 했다. 주춤거리며 살며시 문을 열자, 두 평이나 될까 말까 하는 자그마한 살림이 나왔다. 단칸방에 차린 신혼부부 살림이었다. 빨래판보다 작은 현관, 아이들 장난감처럼 조그만 싱크대, 살림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도 없었지만 그런 물건이 있다한들 그게 들어갈 자리도 없이 조촐한 집이었다. 그 조촐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꽤 마음을 써서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티가 역력한 더블 침대였다. 그 침대야말로, 조촐하다 못해 누추한 집을 반짝거리는 신혼살림답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다른 데 쓸 돈은 없더라도 종일 거친 하루에 지친 몸을 꼭 껴안고 잠들 때의 세간만은 신경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역력한, 그런 반질반질한 침대였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맙소사, 내 친구는 그 고운 침대 위의 고운 이불 위에 사지를 뻗고 콜콜 잠들어 있었다. 무릎을 안고 나란히 그 좁다란 틈에 앉아 있던 고운 부부는 우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얼른 일어났다. 나는 술은 완전히 깼지만 우리에게서 풍기는 막걸리 냄새가 몹시 부끄러웠다. 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싶었지만 몸이 그렇게 편리하게 굴어줄 리 없고 생각 같아서는 엎드려 빌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 주정뱅이로 보일 게 뻔해서 그저 허리만 깊이깊이 숙였다. 그 부부의 증언으로는, 자신들이 저녁을 먹은 후 운동 겸 동호공고 쪽을 산책하고 있는데 교문 앞 숲에 웬 아가씨가 누워 자고 있었고 아가씨에게서 나는 냄새나 정황을 보았을 때 술을 마시고 잠든 것이 틀림없는데 이 으슥한 곳에서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무슨 일을 당해선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신랑이 업고 신부는 거들면서 이 집에 데려와 눕혀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친구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발견하고 가장 최근에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이렇게 친구들이 데리러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웃는 새댁의 얼굴은 말갛고 곱고 눈부셨다. 그리 덩치가 크지 않은 신랑은 어떻게 평소보다 몇 배 무겁기 마련인 술 취한 사람을 업고 예까지 왔는지 장군처럼 늠름해 보였다.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하다고 우리는 계속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정결하고도 정다운 얼굴의 부부는 아휴 아니에요, 하며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라고 계속 웃기만 했는데 그 미소는 정말이지, 이것이야말로 선량한 얼굴의 표본이다. 고운 사람들 같으니.
아침에 깨어난 친구에게 네가 어제 정결한 신혼살림을 침탈한 것을 아느냐며 당장 구멍가게로 달려가 주스라도 한 통 사가지고 석고대죄한 후 감사의 뜻을 표하지 못하겠느냐, 그 귀인들이 아니었다면 너는 지금쯤 윤간 후 토막이 나 매봉산 어느 자락에 버려져 있을지 모를 일이다, 기타 등등 각종 호통을 쳤지만 친구는 머리를 감싼 채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차마 부끄러워서 못 가겠다고 했다. 하긴 나라도, 그 정결한 침대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서 감사할 용기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남자 잘 만나 어떤 호화로운 대접 받고 사는 여자보다 자그마한 살림이라도 반질반질한 침대와 말간 얼굴 가진 남자와 정답게 사는 그녀가 부러워서, 그래서 더 외로워져 목 메일 때도 있었고,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막걸리로 씻어 내렸다. 그런 정결함은 아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앞으로도 기약 없다. 그저, 부디 그들이 그 침대가 떵떵거리며 제 자리 찾아 위용을 자랑할 수 있는 몇 십 평짜리 넓은 집에서 잘 살기를. 레미안이니 브라운스톤이니 이런 데 가서 여봐란 듯이 살라고 세속적으로까지 빌어주고 싶을 만큼 참 정다운 무릎을 가진 부부였다.
- 뜨겁게 안녕 글 김현진 | 다산책방
『뜨겁게 안녕』은 이제 막 서른 이후의 삶에 접어든 저자가 써내려간 ‘서울살이’의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 삶이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리얼하게 담겨 있지만,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소외된 거리와 시대의 풍경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철거촌과 비개발지역, 서울의 소외된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온 삶은 비속하고 하찮고 시시하고 애절한 기억들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정겹고 그립고 끝도 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 기억의 순간을 새겨놓은 곳들이 재개발의 삽질에 밀려 죄다 사라져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