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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어디니?” 물으면 “남창동이요” 대답이 애매했던 이유

그냥 사는 게 그런 거라고 알려주는 곳… 남창동에선 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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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울 중구 남창동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좀 셌다. 총알 날아다니는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정말 사는 게 전쟁이구나, 아마 나도 곧 이 전장에 나서게 되겠지, 뭐 이런 걸 꼬마에게도 가차없이 알게 하나 싶은 거기가 중구 남창동이었다.

 
뜨겁게 안녕
김현진 저 | 다산책방
『뜨겁게 안녕』은 이제 막 서른 이후의 삶에 접어든 저자가 써내려간 ‘서울살이’의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 삶이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리얼하게 담겨 있지만,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소외된 거리와 시대의 풍경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철거촌과 비개발지역, 서울의 소외된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온 삶은 비속하고 하찮고 시시하고 애절한 기억들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정겹고 그립고 끝도 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 기억의 순간을 새겨놓은 곳들이 재개발의 삽질에 밀려 죄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그 후미진 거리와 골목 갈피마다 어떤 사람들이 사연을 품고 살았는지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광포하게 확장되어 결국 구차한 주머니를 가진 자신과 같은 삶은 끝내 밀려나고야 말 테지만, 그래도 그전에 기억의 끄트머리 하나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는 그 뜨거웠던 날들의 기억을 글씨 하나하나에 담아낸다.
불타고 없는 숭례문 언저리를 지나가다 보면 산다는 것에는 ‘만약 어쨌고 저쨌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거기 살지 않았더라면 좀 다른 아이, 다른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허망하게 생각한다. 본디 어린아이라는 건 아직 모양새가 완전히 굳어지기 전의 점토나 촛농 같아서, 어른이 되어 완전히 고정되기 전까지는 아직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살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의 나는 아닐 것이다.

사실 서울 중구 남창동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좀 셌다. 총알 날아다니는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정말 사는 게 전쟁이구나, 아마 나도 곧 이 전장에 나서게 되겠지, 뭐 이런 걸 꼬마에게도 가차없이 알게 하나 싶은 거기가 중구 남창동이었다. 특별히 냉정하지도 특별히 자비롭지도 않게, 그냥 사는 게 그런 거라고 알려주는 곳. 사실 남창동이라니 이름부터 뭐 이따위인가 싶기도 했는데,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남창을 연기한 영화 〈아이다호〉 같은 걸 부모님 몰래 봤던 덕에 어른들이 “집이 어디니?” 하고 물으면 “남창동이요” 하기가 뭣해서 서울역 근처요, 남대문이요, 하고 애매하게 대답하곤 했다.


주변의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기린장이니 노루장이니 하는 여관들은 얼른 봐도 그렇게 서울을 오고가는 틈새에 지친 여행자들이 여독을 풀고 가는 그런 곳은 아닌 게 빤히 보였다. 골방 창문 아래 해가 저물면 어디서 소주 냄새를 진하게 풍기면서 얼굴이 새빨개진 아저씨들이 모여들었다.

낮 동안 여관 사이사이 용하다는 장군신 아기신 처녀신이 여기 있다고 울긋불긋 깃발을 매달아놓은 점집들만 모여 조용하던 골목은 해가 지면 비로소 미묘한 생기인지 색기인지가 감돌았다. 이른 시간부터 아가씨들이 여관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엄마는 대낮처럼 쨍쨍한 한여름에도 여섯시가 넘으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아가씨들도 낮에 일한 고단한 몸을 누이러 여관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여관은 잠을 자는 곳이라고 나와 있었지만 아직 초등학생도 잠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린애가 봐도 어디선가 분명히 미묘한 성적 냄새랄까 에너지랄까, 뭐 그런 수런수런하는 것이 분명히 감지되었다. 삼겹살 굽는 냄새나 빈대떡 부칠 때 풍기는 냄새처럼 대놓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공기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냄새. 때론 그런 미묘한 냄새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야 이년아, 이 시발년아! 하는 카랑카랑한 욕설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일단 그런 욕이 한번 시작되면 그냥 욕으로 끝나는 날은 거의 없었다. 퍽, 퍽 하는 소리는 분명 사람이 사람을 칠 때, 누군가의 살이 다른 누군가의 뼈와 살의 타격을 흡수할 때만 날 수 있는 둔탁한 소리였다. 그럴 때면 얇은 슬립이나 이불 홑청 같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머리채를 잡힌 채 길에 끌려나왔다. 야 이 시발년아, 이 도둑년아,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욕은 다 거기서 거기였고, 그녀들의 몸은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지만 파리 날개처럼 얇은 홑청은 그걸 입은 사람을 지켜줄 요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게 거래의, 혹은 거리의 법칙인 모양이었다.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베개 속에 억지로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게 뭔지, 왜 생기는 일인지, 앞으로도 생길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서 징징 짜곤 했다.


점집과 여관방 이외에도 그 골목에서 성업하고 있던 건 개미굴처럼 촘촘하게 파놓은 쪽방마다 꼭꼭 들어차 있던 미싱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여름에도 선풍기를 켜지 않고 조그마한 창만 열어 놓았다. 그야말로 나는, 낮에는 찰칵찰칵 하는 미싱 소리와 남대문 시장의 호통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호객 소리, 밤에는 귀를 막아도 자꾸 들려오던 꽥꽥 하는 비명과 욕설, 도시 한복판의 온갖 소음을 양분으로 자라났다.

단춧구멍을 만들거나 숙녀복 패턴에 따라 재단을 하는 창문 사이로는 푹푹 찌는 날씨 덕에 웃통을 벗고 있거나 런닝 한 장만 걸친 젊은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였는데, 그들의 살갗은 한국 사람 같지 않았다. 이따금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고 씨익 웃는 거무스름하고 낯선 생김새를 보고서야 아 한국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아몬드보다도 훨씬 짙은 갈색이던 그들의 피부색은 이국적인 빛이었다. 종종 청년이라고 말하기에도 아주 풋풋한 얼굴을 한 오빠들이 있었고, 그중 어떤 오빠는 자기 재봉틀 옆에 상큼하게 미소 짓는 최진실 사진을 소중히 붙여놓기도 했다. 계절이 지날수록 최진실의 사진 빛깔은 조금씩 바래져갔고, 햇빛 나는 시간에 밖에 나올 수 없는 오빠의 살갗은 옅어져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섭도록 오랜 시간 동안 미싱을 돌리며 서 있던 그 오빠가 털썩 쓰러졌다. 실려 나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최진실 사진만 내내 붙어 있다가 누가 바꿔 단 왕조현 브로마이드로 바뀌었다. 그 오빠도 없고 지금은, 최진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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