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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예술대가에게 영감을 주고, 사랑 받았던 여인

예술계의 프리마돈나 알마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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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말러1879~1964는 세기말 최대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다. 말러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말러에게 열락의 행복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한꺼번에 안겨준 여성이다.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박종호 글,사진 | 김영사
예술의 절정을 꽃 피운 오스트리아 빈! 문화여행자 박종호가 전하는 위대한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건축가 오토 바그너,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빈에서는 그들이 모두 살을 스치고, 말을 섞으며, 살고 사랑하고 창작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치열한 정신과 열정으로 유럽 예술의 절정을 이루어낸 도시 빈! 그 아름다운 역사의 현장에서 문화여행자이며 정신과전문의인 박종호 가 위대한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알마 말러1879~1964는 세기말 최대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다. 말러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말러에게 열락의 행복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한꺼번에 안겨준 여성이다.

말러에게는 여자가 그녀뿐이었지만, 알마에게는 남자가 말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알마는 평생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많은 연애 행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비록 자신이 예술가로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로 인해 그들의 예술 세계를 일구었다. 그러니 그녀는 직접 예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남성 예술가들을 통해 엄청난 예술적 산물이 만들어지도록 영향을 끼친 빈 예술의 모태인 셈이었다.

알마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새아버지 카를 몰은 빈 화단의 최대 대가였다. 알마는 전적으로 미술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미술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부모를 귀찮아했다. 대신 그런 부모에 대한 알마의 반항은 반작용을 일으켜, 미술이 아닌 음악에 몰두하는 동기가 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작곡을 공부해 아홉 살 때 첫 작품을 작곡했다.

빈 화단의 거장인 몰, 즉 아버지의 살롱에는 빈 예술계의 많은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몰의 살롱에서 집주인의 재능 넘치는 딸 알마에게 주목했다. 알마가 인기를 얻었던 건 그녀가 가진 예술에 대한 식견뿐만 아니라 젊음과 미모, 그녀만의 묘한 매력 때문이었다. 알마는 부르크 극장의 감독인 막스 부르카르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 네 남성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즉, 말러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네 명의 연인이 있었으며 그들은 연극인, 화가, 시인, 음악가였다.


알마는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닌 말러와 결혼했다. 말러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결혼 조건을 받아들여, 그녀는 자신이 낳은 두 딸을 키우며 주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장녀가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나자 알마는 우울증에 빠졌다. 정신과 상담을 주도했던 의사는 처방 대신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를 소개했다. 그녀는 4년 연하의 그로피우스와 밀애를 시작했다.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는 곧 말러에게 알려졌다. 알마를 너무 사랑했던 그로피우스가 일부러 남편이 알도록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말러는 크게 괴로워했고, 그에게 행복이자 지옥이었을 결혼 생활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1910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알마는 둘째 딸 안나와 단둘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말러가 남긴 유산으로 빈에 새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유가 넘치는 미망인의 생활을 시작한다.

혼자된 알마, 최고 화가의 딸이자 최고 작곡가의 아내였던 그녀의 집에는 많은 예술가와 명사들이 찾아왔다. 알마의 어린 시절에 북적였던 아버지의 살롱이 부활한 것 같았다. 거기에는 어린 소녀 대신 40세의 여전히 매력적인 미망인 알마가 있었다.

그 때 알마를 흠모한 숭배자는 일곱 살 연하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였다. 코코슈카와 알마는 첫 만남에서부터 뜨거운 연인으로 발전했다. 처음 2년간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애 행각을 펼쳤다. 하지만 코코슈카는 성정이 무척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그의 변덕과 난폭함에 알마는 지쳐갔고, 점점 코코슈카를 피하게 되었다. 그러자 코코슈카는 그 유명한 「바람의 신부」를 그려서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를 표현하고, 동시에 그녀와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코코슈카가 참전하면서 둘은 헤어진다.

코코슈카와 멀어진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다시 가까워졌다. 그로피우스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 알마는 그가 있는 베를린까지 가서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그로피우스가 다시 전선에 나간 동안 딸 마농을 출산한다.

하지만 그로피우스가 군대에 있는 사이 알마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1890~1945)과 사귄다. 그는 표현주의 작가로서 몽환적이며 신비적인 극에서 출발해 후에 《트로이의 여인》, 《무사다그의 40일》 등 많은 문제작을 발표한다. 두 사람의 밀회가 시작되면서 그녀는 군대에서 외박 나오는 그로피우스와 베르펠 사이에서 줄타기 애정 행각을 펼친다. 이제 그로피우스가 과거 말러의 처지가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로피우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알마는 처음으로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는 10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야 그로피우스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베르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피우스와 알마는 결국 이혼한다. 그리고 그는 현대 디자인의 산실인 바우하우스를 창설한다.

그로피우스와 헤어진 알마는 빈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아파트는 다시 빈에서 가장 유혹적인 살롱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마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이 그녀를 찾는 이유는 알마뿐 아니라 말러를 기억하고 그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죽은 말러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된 것이다. 알마는 여전히 베르펠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녀는 베르펠의 여자가 아니라 대외적으로 말러의 미망인으로 보여야 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말러를 떠받들었으며, 말러의 영향 아래 빈의 새 음악 세계가 펼쳐져갔다. 그녀의 집을 자주 찾았던 음악가들은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등이었는데, 그들은 말러뿐만 아니라 쳄린스키의 제자들이기도 했다. 알마는 말러의 미망인이자 과거 쳄린스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으니, 빈 음악계에서 알마의 위치는 여전히 대단했다. 외국에서 온 음악가들도 빈에 오면 알마의 집에 들렀다. 그중엔 말러를 존경하던 이탈리아의 자코모 푸치니나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 등도 있었다.

알마는 베르펠과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신부는 50세, 신랑은 39세였다. 물론 베르펠과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던 중 알마가 그로피우스와의 사이에 낳은 딸 마농이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마가 크게 상심해 있을 때, 그녀의 친구였던 알반 베르크는 마농을 추모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천사를 추억하며」를 작곡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대가 심해지자 유대인인 베르펠은 알마와 함께 빈을 떠났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베르펠은 희곡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중 미국으로 도망치면서 영감을 받아 쓴 「베르나데테의 노래」는 영화화되어, 1943년 오스카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개 부분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은 뉴욕에서 연극으로 올려져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펠은 할리우드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1945년 세상을 떠났다.

알마가 다시 혼자의 몸이 되고 7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코코슈카가 전보를 보내왔다.
‘사랑스런 알마, 우리는 「바람의 신부」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만년에 알마는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솔직히 나는 말러의 음악은 좋아할 수가 없었고, 그로피우스의 건축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베르펠의 소설에는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코코슈카의 그림에는 늘 감동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알마는 뉴욕에 정착했다. 그녀는 뉴욕의 집을 빈의 살롱처럼 꾸몄다. 그리고 뉴욕 사교계에서 활약했다. 그녀의 살롱을 드나든 사람들 중에는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있었다. 번스타인은 말러를 존경했지만, 말러를 비롯한 세기말 빈 예술가들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알마의 입을 통해 말러, 쇤베르크, 베르크 등 빈의 음악과 예술을 배울 수 있었다. 알마는 적극적으로 번스타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후반 최대의 말러 해석자인 지휘자 번스타인이 말러 교향곡 전집을 완성했다.

생애의 마지막을 뉴욕에서 보낸 알마는 1964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빈으로 이송되었고, 그 많았던 남자들 중의 한 명인 말러의 묘지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말러의 묘지 옆에 있는 딸 마농의 묘에 합장되었다.

당시 빈이라는 놀라운 도시에는 알마보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성을 뜨겁게 하는 그녀만의 미약媚藥’이 있었다. 특히 민감한 예술가가 그녀의 미약에 일단 취하게 되면, 그는 그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알마는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지만 네 남자,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 코코슈카에게는 영원한 연인으로 남았다. 네 남자 모두 그녀를 결코 잊지 못했고, 넷 모두 죽을 때까지 그녀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알마는 진정 세기말 빈의 뮤즈였다.

알마와 함께 살았던 네 남자는 각기 음악, 건축, 문학, 미술에서 세기말을 대표하는 대가들이었다. 그녀는 네 남자들을 통해 각 예술 분야에서 최고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그녀의 애정 행각은 ‘위대한 예술의 산실’이었다. 이런 그녀를 가리켜서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4대 예술의 미망인’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붙였다. 그녀야말로 빈의 마지막 황후였고, 세기말 빈 예술의 정화精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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