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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제대로 미안해 하기] 식물을 키우듯, 자기 자신을 날마다 가꿀 것

문광훈 교수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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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와 문학과 예술과 그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나의 경험, 나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주관적이고 내밀하며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디지털 가속도 사회’라고 한다면, 이 가속도 사회에 누락된 가장 소중한 목록의 하나가 성찰력이라고 한다면, 이런 성찰적 불능을 교정시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자기제어, 자기지배의 반성능력 아닐까요? “가장 좋은 정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정부다”라고 괴테도 썼지요. 이 반성력의 고양을 저는 ‘예술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에 대한 심미적 경험에 기대어 체계적으로 하고 싶고, 이런 경험의 내용을 책으로 증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심미적 경험이란 단순히 아름답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멋들어진 것의 경험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지요. 그것은 이런저런 감정적 파장 속에서 삶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생활의 중앙과 변두리, 나와 그들의 미지의 관계를 자발적 성찰의 빛 아래 헤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삶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낯선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아가며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단련하는 흥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정과 사고의 유쾌하고도 불편한 실험장이 되지요. 그것이 유쾌한 것은 내가 기꺼이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불편한 것은 기존의 감각적 사고적 타성을 언제나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오고 가는 길목에 서서, 이 시간이 오고감을 의식하고 사는 일이라고요. 행복한 사람은 저녁이 오면 창가에 앉아서 ‘음 저녁이군!’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시인은 썼습니다. 반성은 자기의 시간을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타율적으로 끌려 다니며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매일 매 순간을 현존의 충일성 속에서, 이 충일성의 벅찬 감격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반성은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반성은 푸코가 말한, 깊은 의미의 ‘자기배려(self-care)’이고 ‘자기돌봄’이기도 합니다.

자기애가 자기 밀폐적이고, 따라서 자기 넋두리와 자기 고백의 나열이라면, 자기배려는, 이 자기돌봄이 주체의 외부로 열려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내면성’의 계기가 됩니다. 내적이고 주체적이면서 상호주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가지고 있지요. 예술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연관적’이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언어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언어는 자기 자신(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를 벗어나 사회로 확장되고, 이렇게 확장된 사회의 외부현실로부터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자기만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 실존의 유일무이성으로부터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어떤 절실성의 궤적이고 파장이고 물결무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기지시성 혹은 자기회귀성 혹은 자기연관성으로 인해 예술의 언어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나아가 자연과학의 언어보다 뛰어난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언어가 개념규정적 논증적이고, 사회과학의 언어가 설명적 진단적이며, 자연과학의 언어가 실험적 증명적이라면, 이 모든 언어에는 이 언어를 부리는 주체(자기자신)는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체 자신의 자기반성적 자기연관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문학에 대한 제 자신의 믿음입니다.

이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어떤 개인들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오늘날 독자의 일반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확장된 개인의 사안이죠. 혹은, 위에서 말한 대로 표현하면, 그것은 구체적 보편성을 다룬 것이죠. 왜냐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전체적 개인(kollektives Ich)’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보편성’을 체현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예외 없이 그렇죠. 그러므로 참된 문학의 언어는 구체적 보편성의 언어입니다.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은, 적든 많은, 구체적 보편성의 가치를 내장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학 작품을 읽는 핵심에는 예술경험이 자기를 헤아리고 돌보는 (self care) 개인적 실존적 열정 속에서 이 자기를 넘어, 이 개체적 실존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보편적 계기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술의 경험은 결국 구체적 보편성의 연마를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연마를 통해 각 개체는 자신의 시민성을 키워가는 자기확대적 경험을 갖게 되구요. 예술의 심미적 경험이 민주적 시민교육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기성찰과 자기배려가 필요한 이유

미셸 푸코(M. Foucault)가 죽기 전에 사오년 동안 집중적으로 매달린 주제도 바로 이 같은 문제이지요. 그는 이것을 ‘실존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의 핵심이 자기 배려이고 자기돌봄입니다. 즉 자기의 자아를 돌보는 가운데 그와 이웃한 주변에 영향을 주고 사회적으로도 뭔가 감염시키는 것이지요. 자기 삶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기 양식화(self-stylization/Selbststilisierung)’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양식화란 반성을 통한 자기형성의 끝없는 과정을 일컫지요. 자기선택 하에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면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자기의 삶을 가꿔 나가는 데는, 그래서 ‘잘 살기 위한’ 데는 반드시 이런 자기성찰과 자기 배려 그리고 자기양식화가 필요합니다. 삶의 깊이와 넓이를 알기 위해서는 끝없는 시간, 무한한 성찰이 요구되지요.


이 깊고 넓은 삶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반성을 말하고 자기형성과 자기변형의 기쁨을 말하는 것은 고루한 휴머니즘적 가치를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예술과 학문, 철학과 교양은 어디에 쓸 것인가요? 자유의 가능성이란 곧 삶의 가능성이고, 인간적인 것의 가능성입니다. 이 넓고 깊은 자유의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진선미를 버린 진선미의 상태에 있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어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도 진리를 잊지 않고, 진리를 내세우지 않고도 스스로 진실한 상태에 있는 것 아닐까요? ‘진실한 삶을 추구하자’가 아니라, 진실한 삶이 불가능한 가운데서 어떻게 그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의 고안이 생생하고 더 설득력 있지 않나요? 또 이런 고안을 각자가 그 나름으로 할 수 있다면, 이른바 사회정치적 불평등도 이미 조금씩 완화되고 있겠지요.

제가 『렘브란트의 웃음』의 마지막 글인 ‘마른 나무와 재’에서 도연명의 시를 인용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도 결국에는 이것 하나 - 자기 자신을 거스르지 않는 삶의 기쁨과 그 충일성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식물처럼 매일 매순간 성장시켜 나가는 것만큼 큰 즐거움이 삶에 달리 또 어디에 있는가요?

재미있는 이야길 하나 해드릴까요? 얼마 전인 지난 6월 중순에 학교 인문대에서 여러 선생님들과 담양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평소에 꼭 가보고 싶었던 소쇄원도 둘러보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걸어보았지요. 그리고 담양엔 300년 된 정원인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흐르는 물소리가 구르는 옥소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인데)이란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뒤뜰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굵디굵은 배롱나무 군락이 있습니다. 배롱나무의 원래 이름이 백일홍이라고 그러데요. 그런데 백일홍 백일홍 자꾸 발음하다보니까 배롱나무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배롱나무를 옛 선비들은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껍질이 없어서 겉과 속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표리부동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 속과 행동의 바깥이 같은 것의 상징으로 이 배롱나무를 옛 선비들은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옥헌 원림에도 배롱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통이 굵고 아주 말끔합니다. 그런데 어느 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보니까 저 위 나뭇가지 끝에 무슨 벗어놓은 옷가지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 무슨 뱀 껍질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배롱나무 가지들에서 벗겨진 껍질이었습니다.

그걸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철이 지나면 뱀도 껍질을 벗고 배롱나무도 껍질을 벗는데, 인간만 껍질을 못 벗는군. 하고 말이지요. 자아의 껍질을 벗는 것이 위에서 말씀드린 ‘자기 변형적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변형적 기쁨이란 나날이 새로워지는 기쁨이지요, 이것이 다름 아닌 반성력에서 오는 것이지요. 이렇게 각질을 벗고 스스로 변해가면서, 풀과 나무가 매일매일 자라나듯이, 인간 자신도 변모해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식물적 성장의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반성이 필요한 것은 반드시 부도덕을 단죄하고 부정의를 분노해서가 아닙니다. 또 외부의 시선을 고려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정당한 분노’는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성실해야’ 합니다. ‘덜 자기기만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 스스로 ‘나날이 깨어나고 자라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면서 무엇보다 ‘누리는’ 것이지요. 반성도 즐거운 향유의 대상이어야 마땅합니다. 자기돌봄은 유쾌한 향유의 대상이지요. 이렇게 누구나 기꺼이 이 자발적 반성력을 체화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좀더 투명하고 건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분노는 좀더 겸허하고 차분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정치적 민주화, 제도의 합리화, 시민의 의식화는 이런 개인의 반성적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개인적 반성을 말하는 좀더 심각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여기 한국에 건전한 의미의 개인/개인성/개인주의(Individualism)의 역사가 일천하거나 혹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전제와 유보가 선행되어야 할 매우 복잡한 주제이지만, 그러나 간단히 말해 서구 근대를 추동시킨 시민 혹은 부르주아 개념이 20세기 이전의 우리 역사에 있었던 적이 있나요? 서구 자유주의의 발생사에서 보듯이, 스스로 자유로운 가운데 자기 책임을 짊어진 시민으로서의 개인의 존재에 대한 사회정치적 철학적 이념적 합의의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나요? 한국사회엔 개인성의 이런 사회정치적 의미에 대한 체계적 논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의 경험이 집단적 자아로

제가 시와 문학과 예술과 그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나의 경험, 나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주관적이고 내밀하며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이 주관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에서 나는 ‘집단적 자아’ 혹은 ‘구체적 보편성의 언어’를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술을 경험하고, 이 경험에 대해 글을 쓰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 자기형성적이고 자기변형적인 계기를 포함합니다. 이 지속적 계기 속에서 진리란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현대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에서 ‘진리(die Wahrheit)’라는 말보다 ‘진리성’ 혹은 ‘진리다움(die Wahrhaftigkeit)’이란 말을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리란 그 자체로 하나의 절대적 실체로서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람마다, 또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진리답게 하는 어떤 상수(常數)가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변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상수조차도 어느 정도는 불변이지만, 또 어느 정도는 변화 속에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그때그때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선택과 행동, 자유와 책임 사이에 진리의 가능성이 있고, 진리의 어떤 부분은 일정하되 어떤 다른 부분은 점차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리의 변수와 상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시와 소설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사진을 찍지요. 혹은 이런 여러 작품들을 직접 만들거나 만들어진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살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형시켜 갑니다. 예술경험이란 예술을 통해 나를 에워싼 세계를 재경험하고 재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느낌의 내면에서 자아의 외면으로, 현실의 외부에서 자신의 내부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면과 외면 사이에 왕복운동은 기본적으로 ‘성찰적’이지요. 이 성찰적 왕복운동이 예술의 경험에서는 우리의 마음에 일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건강한 의미의 자기배려입니다. 이것은 요새 유행하는 네일 케어(nail care) 같은 화장술적 의미의 자기치장하고는 다르겠지요. 푸코는 “자기지식을 육화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심미적 경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자기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형하지 못한다면, 화가는 왜 그리는 것인가?” 그렇지요. 절대적으로 옳은 생각입니다.

3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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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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