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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 사르트르의 불꽃

내가 샤르트르에 경도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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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히 사르트르의 주장은 니체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대학이라는 곳에서 절대적 현실과 마주쳤던 내가 니체를 버리고 사르트르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니체를 떠나서 샤르트르에게로

나의 20대는 사르트르와 함께 지나갔다. '배운 사람'이 되고자 대학을 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다른 평범한 한국의 십대들 마냥 나는 입시를 치르고 대학이라는 곳에 첫발을 내딛었다. 철학자 김영민과 나는 같은 대학을 나왔는데, 집 근처에 그 대학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입학했다는 그의 술회는 나보다 한 단수 높은 것이었다. 집을 떠나고 싶었던 나에게 대학진학은 절호의 기회였지만, 집안 의 경제형편은 나에게 서울 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과 독립을 동격에 놓았던 나에게 후자를 성취할 수 없는 대학생활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상황은 훨씬 비참해졌고,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더욱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벤야민은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부르주아 집안의 속물주의를 잊기 위해 독서에 몰입했다고 썼는데, 계급적 처지는 달랐지만 나 역시 동일한 이유로 책을 파고들었다. 수업 내용은 시들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출석하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매일 무엇인가 남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 종일 일부러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만 골라서 읽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술집을 전전했다. 낮에 읽은 책에 대한 '장광설'을 들어줄 희생양을 찾아서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말하자면 당시 내가 즐기던 악취미였다.

그렇게 5월이 왔다. 대학축제가 벌어졌고, 평소에 마시던 술이었지만 축제를 핑계로 또 마셔야했다. 거나하게 취해서 고담준론을 펼치는 중인데, 갑자기 교문 쪽에서 펑펑 폭음이 들려왔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축제기간이라서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 뒤에 갑자기 눈이 아프고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최루탄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최루탄 맛을 봤다. 콧물 눈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먹던 술이 확 깼다.

술 한 잔 걸치고 멋지게 개똥철학이나 읊으려던 나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현실이라는 까마득한 절벽이 내 발치에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로 뛰어내릴지 말지, 선택은 나의 것이었다. 그 유명한 '광주 비디오'를 보고, 시위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를테면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대학생활의 진정성을 찾지 못했던 나에게 학생운동은 경험할 수 없었던 과잉의 주체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니체를 떠나서 사르트르로 옮겨갔다. '참여'라는 화두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대학생이라면 소련 교과서를 얼기설기 엮은 『세계철학사』나 일본에서 발간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부분번역해서 묶은 『경제사입문』 같은 책들을 보고 '의식화'되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나는 철학책을 읽는 것이 더 급했다. 게다가 당시에 나는 시인의 꿈을 품고 있던 문학도이기도 했다. 문학과 철학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두 유혹이 나를 사르트르로 이끌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철학은 시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입장과 사뭇 다른 철학적 경향이 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브한 하이데거주의와 실존주의가 시를 쓰는 행위를 철학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렇게 급류에 휩쓸리는 삶이 시작되었다. 존재의 기반을 바꾸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의실까지 이른바 '짭새'라고 불리는 사복경찰들이 들어와서 교수의 강의 내용까지 감시하는 시절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무슨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표정을 짓곤 하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던 '실제 사건'이었다. 이런 곤혹감은 후일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도 느꼈다. 세미나 시간에 나의 학부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고문과 폭력이 횡행했던 군사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니까 모두 나를 남미국가에서 온 혁명가 비슷한 취급을 했다. 그때서야 나는 대학생으로서 겪은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았던 80년대는 '후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몇몇 소수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나라 전체를 후진시켜버린 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일부 집단들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우파 노릇을 해왔던 것이 지난 사정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상식이 있다면 이제 이 따위 망발은 그만 좀 들어줘야할 것이다. 한국도 섬 사회를 벗어나서 국제화의 대양으로 나와야하는 것이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모순을 인지하는 존재

80년대에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청춘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은 시였다. 저항과 참여를 주제로 한 시인들이 영산홍 같은 시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읽기에 그친 것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시 창작 모임이 동인형식으로 결성되었다. 현역 시인과 함께 습작시를 논하는 자리도 많았다. 이런 모임에서 현역 시인은 대개 '쁘띠 부르주아'라는 오명을 쓰고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기성 문학을 뒤흔드는 혁신의 열기도 대단했다.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란히 읽혔다. 70년대를 대표하는 감옥시인이 김지하였다면, 80년대는 김남주였다. 남민전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시인 김남주를 석방하라고 수전 손택을 비롯한 국제팬클럽 회원들이 군사정권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김지하 시집이 그랬듯이, 김남주 시집도 금서였기에 복사기로 찍어내서 엉성하게 등을 묶은 시집을 몰래 돌려가면서 읽었다.

거의 모든 책들이 금서였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금서가 아니었다. '실존적 마르크스주의' 선언에 가까운 이 책이 금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금서인 것과 대조적이었다. 사르트르가 금서목록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나는 술을 마셨다. 무덤에서 사르트르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 침을 튀기면서 떠들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본』이라는 책을 붙잡기 전까지 나는 사르트르와 헤겔을 통과해야만 했다. 여전히 나에게 '노동계급'이라는 역사적 존재는 실존의 문제와 겹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돌이켜본다면, 내 사유의 경로가 『자본』으로 나아간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시대가 그렇지 않았어도 내가 그랬을까 자문해본다면,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뼛속까지 부르주아'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의 상황이 하나로 봉합되어 있던 때가 80년대라는 불의 시대였다. 그리고 거기에 사르트르라는 불꽃이 있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지식인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런 까닭에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에 속하기 어렵다. 언제나 이 모순을 고민하고 이야기할 테니, 자신의 계급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식인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처한다. 물론 누가 지식인이 되고 말고 하는 문제는 특정한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구조적인 차원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인이 되기 위한 교육과정을 프롤레타리아는 성공적으로 누리기 어렵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산업적 발전과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강요당한다. 이와 같은 추구는 본성상 자유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를 통한 보이지 않는 규제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호출하는 지점은 여기인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가 열심히 연구를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과학자라는 개인은 이미 그 지식을 전수해준 교육체계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 지식을 배우고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 자체가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과학자는 교육체계를 통해 전수받은 지식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가진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이렇게 구조의 통제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존재라면 지식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서로 이어주는 매개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인이라는 존재로 인해서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만난다는 참신한 주장이다. 보편적인 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실존주의라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식을 규정하는 계급투쟁의 일부분으로 개인이 구현된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런 까닭에 지식인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 수가 없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관통해서 진실을 보기 위해서 행동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이렇게 행동의 주역으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두고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임무라고 불렀다.

확실히 사르트르의 주장은 니체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대학이라는 곳에서 절대적 현실과 마주쳤던 내가 니체를 버리고 사르트르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가끔 나는 왜 하필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것인지 되묻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따위는 없다. 그냥 거기에 내가 있었고, 진실한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항은 별로 없었다. 아무런 조언자도, 인도자도 없었던 그 시대에 사르트르는 삶의 지표를 설정해주는 훌륭한 나침반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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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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