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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호모 콰이렌스]그날 밤, 난 왜 철학자가 되고 싶어졌을까?

김상봉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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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체성이란 말을 독립적이다. 수동적이지 않다. 스스로 판단한다.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율적이다 등의 말로 이해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김 상봉 선생님께

선생님의 책 그리스 비극의 편지를 읽은 제 선배는 이 책은 모든 소설가가 읽어야 하는 책이야! 라고 감탄을 하더군요. 저는 『호모 에티쿠스』를 읽고 처음 선생님을 알게 되었어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크게 유행할 때 저는 이 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윤리란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말해주는 책이야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윤리에 대해서 『서로 주체성의 이념』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존재는 주어져 있음이 아니요 언제나 될 수 있음이다. 그리고 될 수 있음에 관여하는 것이 윤리다.’제가 타인이 무엇인가 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니요?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윤리에 대한 설명이 참 좋았습니다.

『서로 주체성의 이념』은 아주 피곤한 밤에 처음 읽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한데도 저는 책 반 권 분량을 멈추지 못하고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이건 철학책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책이 아니야란 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처음에 철학에 ‘대해서’ 읽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만 결국 철학에 ‘대해서’ 읽고 마는데 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슴 밑바닥부터 흔들리며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이 솟구쳐 올랐고 저는 그 밤에 불현듯 철학적이 되고 싶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욕망은 무척 순수했습니다. 저는 왜 철학적이 되고 싶어졌을까요?

선생님은 선생님의 또 다른 책 『나르시스의 꿈』에서 ‘사람은 언제 철학적이 되는가?’ 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슬픔은 처음에는 언제나 아픔으로 발생한다. 아무것에 대해서도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일상을 떠나서 일상의 삶을 되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픔이 우리를 자기 자신과의 거리 속에 있게 할 때 자기에 대한 거리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왜 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아픔은 많은 경우 분노를 유발한다. 분노는 대개 증오를 동반한다. 그러나 아픔이 한갓 분노와 증오만을 낳을 때 이때 우리는 어둠속에 있으되 어둠으로 되돌아보지는 못하게 된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여전히 비철학적이다. 우리는 이때 일상에 사로잡혀있다. 아픔이 남에 대한 격분이 아니라 스스로의 슬픔으로 반성될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생각이 분노와 격분 속에 있을 때 생각은 자기 아닌 타자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 생각은 어떠한 타자에게도 얽매이지 않는다. 슬픔은 격분과 달리 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슬픔 속에서 생각은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슬픔은 아픔에서 아픔은 없음에서 비롯된다. 땅이 없고 추수가 없고 저녁 거리가 없고 인격이 없고 생명이 없다, 민적도 없고 인권도 없다. 슬픔 속에서 생각은 이 모든 없음 속으로 복귀한다. 없음의 깊음 속에 있음이란 얼마나 숨막히도록 낯선 것인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왜 차라리 절대 허무이면 안되는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저는 이 구절을 잘 기억합니다. 저 말없는 우주는 왜 텅 비어 있지 않고 저토록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는가? 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졌던 날을 기억하듯 기억합니다. 무엇인가 있음.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나 혼자라면 정말 나 혼자뿐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을 겁니다. 정말이지 나 혼자 뿐이라면... 하지만 아무리 해도 나 혼자 뿐이 아니므로, 저는 철학적이 되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이 인용문의 끝부분 땅이 없고 추수가 없고 저녁 거리가 없고는.. 한용운의 시입니다. 그 시는 서로 주체성의 이념에도 나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를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도덕,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님의 침묵 중에서 )

선생님은 이 시를 왜 그리 자주 인용하는 걸까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무언가를 봄! 이것이 선생님에겐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한용운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본 것은 당신은 누구지요? 당신은 고통으로 인한 정신 착란이 불러낸 환상이 아닐 것입니다. 신심이 두터운 사람은 신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이 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싶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도,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너는 없다. 너는 아니다. 너는 틀렸다. 너는 사라져라, 너는 없는 편이 낫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끝없이 부정당하고 당하다가 어떻게 아니다 나는 있다. 나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당신 속에도 내가 있다,라고 말하게 될 수 있을까요? 내게 절박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란 하나의 은유가 아닙니다. 국가로부터 약간의 보호라도 받으려는 사람은 부재 증명을 해야 합니다. 자동차 없음, 주택 없음, 자식 없음. 끝없는 부정입니다. 우리도 수많은 자기 부정 속에 있습니다. 양심없음, 용기없음, 자존심없음, 열정없음, 이견없음, 위험하지 않음, 중요하지 않음... 결국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자긍심을 잃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어느 꽃비 내리는 밤 우리의 자의식은 차라리 윤동주에 가까울 것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삽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게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픔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 동주 -참회록)

나 또한 나를 잃었다는 회한이 어느 정도는 있으므로, 바로 그 이유로 술에 진창 취할까 한강에 가볼까 망설이는 날이 있으므로, 내가 그리워하는 나 자신이 따로 있으므로. 내가 그리워하는 나를 아직은 온전히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그럼에도 내가 그리워하는 나를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므로. 차라리 내 온 중심으로 삼고 싶으므로 이런 식으로 저는 철학적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서로 주체성의 이념』은 슬프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이 책의 진지함에 놀랐습니다. 무엇에 대한 진지함이냐? 그것은 삶에 대한 진지함이요, 만남에 대한 진지함이요, 우리 역사가 겪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진지함이었습니다. 도덕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은 애틋한 진지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냉소와 실망, 허무에 대한 철저한 반대였습니다. 또한 저는 슬픔이 인간 내면에게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만남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꿈에 대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나와 끝까지 연결되어서 나의 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그런 사람과의 만남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의 모든 슬픔을 공유할 그런 누군가와의 만남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몇 가지 면에서 이 책은 저에게 연금술책으로 아주 새로웠습니다. 왜 저는 철학책을 읽으면서 연금술 책 같다고 했을까요? 철학자에겐 이런 말이 결례가 되는 건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랭보식 연금술의 기본 법칙들을 떠올렸던 겁니다. 불쌍한 사람들, 반항하는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방랑자들, 슬픈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은 랭보의 연금술 세계에서 태양의 아들, 가장 현명한 이들이 됩니다. 그들에겐 감춰진 진실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고통이 존재의 기적으로 화하는 순간들이 진정한 연금술의 시간입니다. 그런 연금술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뭔가가 필요합니다. 선생님이라면 단박에 만남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랭보는 탈출이라고 했겠지요? )

서로 주체성이란 말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처음 들어봤을 겁니다. 제 친구는 후설의 용어 상호주관성이 아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주체성이란 말을 독립적이다. 수동적이지 않다. 스스로 판단한다.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율적이다 등의 말로 이해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강하고 올바르고 꿋꿋하게 행동 하느냐. 그것이 제겐 주체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의 피로가 저에겐 차곡차곡 축적 되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전 많은 사람을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 부딪혀야 할 벽,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도 같습니다. 제 의식 속에서 나를 진정한 삶, 진정한 만남으로 이끄는 것은 주체성의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견디게 함, 나를 강하게 함, 나를 나이게 함 그것이 주체성의 역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홀로 주체성이라고 표현하시더군요. 긍지 높은 나르시스의 예를 들어서요. 그렇다면 저도 홀로 주체성의 피로들이 가슴에 모래알처럼 박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래가 바위를 만들 수도 있나요? 바위가 모래가 되는 건 가능한데 그 반대도 가능한가요? 어쨌든 저는 모래로 만들어진 바위벽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 탓일까요? 서로 주체성은 이 시대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더 급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위로할 줄 알아야하고 스스로 돌볼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 이길 줄 알아야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미끄러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즉 먼저 홀로 강해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선생님의 서로 주체성이란 말은 제 맘을 끌었고 제가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눈감고 있었던 진실을 상기키셨습니다. 고립된 개인으로 나는 혼자구나, 세상이 어떻더라도 나는 홀로 간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그토록 고단하고 쓸쓸한 일인 모양입니다. 홀로 주체성도 결국 ‘자기 사랑’인데 자기를 잘 사랑하기는 얼마나 어렵던지요? 저는 저마다의 고유한 특별한 아픔이 어떻게 보편성으로 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보편성으로 나가는 것이 왜 필?한지 실은 소설 읽기를 통해서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고백하는지 아마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즉 한 인간은 인간 전체이다, 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며칠 전에 제 후배들이 미래가 없다고 절규할 때 누구도 그 후배들이 어느 어느 대학을 나온 어느 어느 직장에 다니는 너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니 그만 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배들은 나와 같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 후배들은 열정을 불사르고 싶은,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일하면서 기쁨과 가능성을 찾고 싶은,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의 한 조각으로 나의 한 부분처럼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겪는다는 것은 나의 한 조각과 만나 어떤 일을 겪는 것과 제겐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너는 나의 분신이다.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분신이다.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분신이다. 저는 이런 말을 얼마나 좋아했었던가요? 그것들이 가슴 아프게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서로와 주체성이 어떻게 같이 붙어 있을 수 있을까? 네가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내 판단을 바꾼다는 말일까? 저는 서로 주체성이 궁금했습니다. 제가 타인에 대해 가장 긍정하는 말은 아마 우리말 ‘사이’일 것입니다. 저는 ‘사이’란 말이 참 좋습니다. 사랑이란 말만큼 좋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할 때 그 사이란 말이 어찌나 좋던지 저는 신의 위치도 사랑의 위치도 ‘사이’에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서로 주체성에 대해서 한 가지 점에서 반신반의하면서 읽어나갔습니다. 바로 이점입니다. 선생님이 혹시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사는지 모르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서로 싸우는 세상인 것도 알고 있고 우리 마음속에 경제적 탐욕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워진 것도 알고 있고 돈 벌고 부자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그래서 고귀함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본이 인간을 사물화하고 도구화하는 세상에서 나 자신조차도 사물이 되어 뒤척이며 잠 못 드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너도 하면 된다’란 말이 결국엔 승자만을 보호하게 되는 기만적인 수사란 것도 알고 있고 교육도 사적 이익 추구의 도구가 돼버린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나는 혼자다! 라고 생각하며 고립된 개인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한국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난 혼자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었음을. 우리가 이미 그렇게 살아왔음을 ,내가 이 자리에 서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투쟁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임무에 대해 말하고 있더군요.

선생님은 김 소월의 이런 시를 인용했습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이 간절한 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왜 그리 어려워졌는지 우리 인간이 설명해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모습은 어찌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서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우리가 만나 서로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단 말이지요?

‘내가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그와 눈을 맞추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그것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것을 또렷이 깨닫고 그 이후 스스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된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시작일 뿐이다.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과제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이란 욕망과 편견과 집착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생각의 일이 그럴진대 하물며 실천적 삶에서는 더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생각하고 행위 하는 일에서 내가 주체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할 삶의 궁극적 과제이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참된 의미의 주체가 되는가? 진리는 나를 처음 주체의 길로 불렀던 바로 그 원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부르는 너에게 응답함으로써 처음 주체로서 부름 받았다. 내가 너에게 응답할 때 나와 너는 부름과 응답 속에서 우리가 된다.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부르고 대답 하면서 우리가 될 때 나와 너는 서로 주체성 속에서 주체로 생성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고립된 내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됨으로써만 주체인 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지 못하는 나는 나도 되지 못한다. 그때 나는 주체가 될 수 없는 나, 사물이 될 수밖에 업는 나인 것이다.’ (서로 주체성의 이념 중에서)

저는 지금 다른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나르시스의 꿈에서 본 이런 문장을 떠올립니다.

‘노예의 땅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식민지 백성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에 올리는 것이 한갓 사치요 허영인 절망의 시간에 아니 더 나아가 사람의 발에 밟히는 개미의 눈으로 인간의 손에 멸종해 가는 미물의 눈으로 본... 존재의 깊은 곳에서 바라본 세계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서 깨달은 지혜’

그렇습니다. 저도 별로 그럴만한 자격도 여유도 없는 자로서 칸트도 모르고 헤겔도 모르는 자로서 그것에 개의치 않고 내 마음을 사로잡는 질문들을 선생님께 던집니다.
우리 앞날엔 어떤 약속도 없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엔 저마다의 슬픔과 우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또 우리를 만나게 하는 가능성이란 것만이 이 시간 저에게 용기를 줍니다.
지금 선생님께 대략 열네가지, 이런 질문들을 드립니다.

1.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지요?
‘자기 사랑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누구에겐 긍지로 누구에겐 자기연민으로 누구에겐 자기혐오로 나타난다’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긍지는 뭐고 자기 연민은 뭐지요?

2.왜 서로 주체성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3.자유는 무엇이지요? 서경식 선생과의 대담집 『만남』에서오직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 자유라고 했는데 이때 필요한 정신적 소질이 교양이라고 하셨습니다.

4.슬픔은 뭐지요?
고통이 슬픔으로 넘어가는 찰나
그리고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도 겪는 고통이란 것을 깨다는 찰나
그것은 부정이 긍정으로 바뀔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이기도 한데요

5.만남은 뭐지요? 왜 진정한 만남은 드물게 느껴지지요?

6.만남에서 듣는다는 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뭐지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요?

7.그래도 진정으로 고통스러울 때는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8.자기 반성이란 게 뭐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자기 반성이란 나를 단죄하는게 아닌 듯 합니다. 선생님은 자기 반성이란 자기와의 대화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모든게 내 탓이오라고 하는 것도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9. 상상력이란 무엇입니까?
상상력이란 말은 창의성 만큼이나 현대 사회에서 오해되는 말인 듯 합니다
저는 상상력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를 끌어냄이 아님을 저는 일하면서 절감하고 있습니다.
서로 주체성의 세상에선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무척 중요할 것 같?니다.

10. 배려는 무엇이지요? 동정심과는 어떻게 다르지요?

11.분노는 무엇이지요? 언제 분노해야 하지요?
언제 저항하고 싸워야 하지요?

12. 양심은 무엇이지요?
저는 양심의 철학이란 말을 선생님을 통해 처음 들어봤음을 고백합니다만.

13. 용기란 무엇이지요?

13. 서로 주체성의 현실태는?

14. 선생님의 기쁨은?

(계속)

* 앞으로 연재될 호모 콰이렌스는 한국의 인문학자들에게 보낼 편지글 더하기 답장 혹은 편지글 더하기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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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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