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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한국대학에서 철학의 운명은 끝났다

‘철학수업’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수업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무슨 내용을 다루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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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시장의 논리를 채택하고, ‘좀 더 쉬워질 것’을 요구받는 까닭은 대학이나 학계에서 더 이상 딱딱한 철학서적을 제대로 읽어주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서양철학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지만, 한국은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철학의 보편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실패했다.

철학에서 철학하기로

‘철학수업’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수업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무슨 내용을 다루는 것일까? 철학을 ‘수업’한다는 것은 어떤 정규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각 대학별로 철학과가 있고, 간혹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칼럼이나 에세이에 ‘철학자’라는 직함을 단 글쓴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철학은 일정하게 공식적인 인준을 거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똥철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각자에게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생각이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경험을 추상화할 수 있는 ‘사유의 방식’ 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에게 깃들어 있는 철학을 진짜 철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까? 물론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서 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대학의 철학과에 진학해서 학위를 따고, 더 나아가서 대학원에 입학해 석사나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길일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한 이런 ‘공식적인 경로’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선입견과 다소 다른 내용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앞으로 말하게 될 ‘철학수업’이라는 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철학연구자’나 ‘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거칠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 할 말은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단도직입해서 말하자면, 이제 한국의 대학에서 철학의 운명은 다했다. 철학이라는 유적이 그나마 남아 있다면, 경영학이나 공학 같은 실용학문을 위한 ‘인문교양’으로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인문학이 대학에서 교양을 위한 장식물로 전락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이 사실을 이제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위선과 기만을 버리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대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철학과의 존립이 위태롭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철학과의 존재유무라기보다, 철학의 의미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과연 철학을 요구하는 것인지, 요구한다면 어떤 철학인지, 이 질문부터 던져봐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철학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철학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독특한 프랑스식 교육제도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개입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1) 이런 프랑스의 현실에 비추어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은 둘 다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공공성을 추동할 수 있는 교육제도는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한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와해되었고, 철학의 현실 개입은 명망가 운동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이제 와서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이었다. 물론 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일부 강단좌파들이 대중세미나를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사설교육기관을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사적 영역을 지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의 논리였다.

빽빽하게 본문보다 더 기나긴 각주나 미주를 훈장처럼 달고 있는 난해한 논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해도 문제가 없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런 시대적 징후를 개탄하면서 오늘날 대중이 과거보다 훨씬 우매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과연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어려운 책들’을 읽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지적이었던 것인지 장담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를 앎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이제 앎은 특정 개인이 생산해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 무한한 복제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간다고 할 수 있다.2) 이렇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면서 앎은 처음 생산될 때 담겨 있는 개인의 색채를 완전히 소거시켜버리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상황은 과거에 비해 철학적이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만큼 철학에 새로운 사유를 요청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시장의 논리를 채택하고, ‘좀 더 쉬워질 것’을 요구받는 까닭은 대학이나 학계에서 더 이상 딱딱한 철학서적을 제대로 읽어주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서양철학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지만, 한국은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철학의 보편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실패했다. 이 원인에 대한 진단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수입하기에 급급했을 뿐, 이것을 구체적으로 활용할 방도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영학이나 광고학에서 철학의 용도를 강조하는 현상은 현실에서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철학의 처지를 보여주는 기묘한 징후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무기력한 철학연구자들만이 연구재단의 기금으로 철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연구자들끼리도 잘 읽어주지 않는 논문을 ‘취업용’으로 양산할 수밖에 사정이 철학의 무능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히 말하자면, 논문에 성실하게 인용을 달고 알찬 참고문헌목록을 덧붙이는 것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동료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요구하는 ‘쉬운 철학책’은 이런 참고문헌목록보다도 ‘더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추천도서목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지적이지만, 독서의 목적이나 독자층의 변화로 인해서 글쓰기나 책의 형태도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이 변화한 조건에서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이 공간에 연재할 나의 이야기는 이런 문제의식을 ‘나의 철학수업’이라는 주제에 맞춰서 풀어놓는 것이라고 하겠다.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이 말했듯이, 철학이라는 제도적 학문과 철학하기를 구분할 수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내 나름대로 경험한 철학하기에 대한 회상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철학은 결코 철학과라는 제도나, 교양주의라는 상식에 포섭당할 수 없는 과잉의 이름인 것인데, 이 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과거에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철학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게 될 것이다. 내가 수행했던 ‘도제수업’의 일단을 보여줄 예정이다.

대학의 철학연구자가 아니라, 철학하기를 실천하는 철학자의 스타일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앎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 자체가 ‘사랑’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앎에 대한 사랑도 몰입을 전제한다. 사랑이 상징계의 질서를 바꾸는 상상적 이미지라면, 앎에 대한 사랑 역시 하나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스타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근대적 실용주의를 체현한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들은 이런 스타일을 일러 쓸모없다고 불편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차가운 겉모습이 감추고 있는 마음 속 깊은 구석에 이런 ‘특이한 스타일’에 대한 동경을 숨겨두고 있다. 자기계발서의 창궐은 이런 비밀스러운 동경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인간은 간단하게 스타일을 화폐의 교환가치로 만들어놓고 싶어 하지만, 철학자의 사랑은 언제나 교환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다. 이런 까닭에 철학을 전공하거나 공부한다고 철학자인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철학자야말로 앎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삶의 원리를 구성하는 낯선 존재, 또는 낯설어진 존재(the estranged)이기 때문이다. 이 낯선 존재야말로 모든 곳이 타향인 완전한 자이자 자유로운 자이기에, 현실의 세계에서 동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쓸모없는 자일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는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다. 이 명칭은 끝없이 주류로부터 이탈하고 도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방식을 일컫는 보통명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19세기 프랑스에서 보들레르가 압생트에 취한 넝마주이를 가리켜 “거리의 철학자”라고 불렀을 때, 정확하게 이런 철학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 이제부터 차근차근 철학에서 철학하기로 탈주해왔던 나의 철학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1) 여기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는 다음 책에 있는 1부 1장을 볼 것. Gary Gutting. Thinking the Impossible: French Philosophy Since 1960. Oxford: Oxford UP, 2011.
2) 주디스 버틀러는 이 문제를 벤야민이 제기한 기술복제능력과 연관해서 논의하고 있다. 기술복제능력은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극대화하는데, 이런 조건에서 특정한 이미지나 텍스트는 본래의 맥락? 의미를 탈주해서 전혀 다른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Judith Butler. Frames of War: When is Life Grievable? London: Verso, 2009.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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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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