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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음악의 이단자로 불리던 사나이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antaleon Piazzolla, 1921~92), 거리의 탱고를 연주회장으로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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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루빈스타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을 때, 스무 살의 청년 음악인이 용기를 내서 그가 머물던 숙소의 초인종을 두드렸다. 이 청년은 자신을 소개하고서 직접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루빈스타인에게 보여 주었다. 5분여간 곰곰이 악보를 들여다보던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피아노 앞에 앉아서 쳐보기 시작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아도 다행인데 대가가 손수 연주까지 해주니 청년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늘의 클래식
김성현 저 | 아트북스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한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함께 20세기를 풍미했던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남미에서도 크게 사랑받았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연주회가 열리면 지금의 아이돌스타 공연처럼 티켓을 구하려는 관객들이 밤새워 줄을 섰다.

1941년 루빈스타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을 때, 스무 살의 청년 음악인이 용기를 내서 그가 머물던 숙소의 초인종을 두드렸다. 이 청년은 자신을 소개하고서 직접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루빈스타인에게 보여 주었다. 5분여간 곰곰이 악보를 들여다보던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피아노 앞에 앉아서 쳐보기 시작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아도 다행인데 대가가 손수 연주까지 해주니 청년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지만 연주를 마친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물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악보는 어디 있니?” 당황한 청년이 우물쭈물하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루빈스타인은 “만약 별도의 관현악이 없으면 그 곡은 협주곡이 아니라 소나타나 모음곡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친절하게 조언해주었다. 루빈스타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청년에게 그 자리에서 아르헨티나의 작곡가인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소개해줬다. 용기를 내서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갔던 아르헨티나의 청년 음악가가 바로 훗날 ‘탱고의 혁명가’로 불린 아스토르 피아졸라였다.

돌아보면 탱고는 출발부터 역설의 음악이었다. 탱고를 상징하는 악기인 반도네온(bandoneon)은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종교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교회 오르간의 대용으로 고안됐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뒤 이 악기가 정착한 곳은 거꾸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환락가였다. 피아졸라는 “탱고는 카바레, 범죄, 경찰, 창녀, 바람둥이, 마약처럼 뒤틀린 삶과 같다. 이게 탱고의 진정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피아졸라는 4악장으로 이뤄진 〈탱고의 역사〉라는 작품에서 연대순에 따른 탱고의 변천상을 각 악장의 제목으로 붙였다. 「1900년의 선술집」 「1930년의 카페」 「1960년의 나이트클럽」 「현대의 콘서트」라는 악장의 제목에는 탱고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의 해안 도시 마르델플라타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발사와 미용사였던 부모를 따라서 네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열여섯 살까지 뉴욕에서 살았고, 심지어 유년 시절에는 스페인어보다 영어가 편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도네온을 선물받은 피아졸라는 탱고뿐 아니라 바흐와 슈만, 거슈윈과 듀크 엘링턴의 재즈까지 두루 연주했다. 이런 성장 배경은 훗날 아르헨티나의 전통 춤곡이라는 탱고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유년 시절 피아졸라는 영화 「여인의 향기」의 삽입곡 「포르 우나 카베사 」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났다. 당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를 듣고서 “너는 반도네온을 마치 이방인처럼 연주하는구나”라고 말해주었다. ‘탱고의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탱고의 혁명가’라는 이중의 운명은 소년 시절부터 피아졸라의 어깨에 드리워져 있던 셈이었다.

피아졸라가 활동을 시작했던 1940년대까지 탱고는 재즈와 마찬가지로 대형 빅밴드 편성에 맞춰 댄스홀에서 춤추기 위한 음악이었다. 본격적이고 진지한 감상보다는 어디까지나 여흥을 위한 음악이었던 것이다. 피아졸라도 열여덟 살 때 당대의 탱고 거장 아니발 트로일로 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5년간 활동했다. 매달 240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고, 특히 편곡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피아졸라는 “카바레는 매음굴과 다름없었고 매일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났다”며 넌더리를 냈다. 피아졸라가 탱고의 혁신을 상징했다면, 트로일로는 전통을 표상했다. 둘의 갈등은 1960년대까지도 미디어에 의해 증폭됐지만 1970년 둘은 텔레비전 쇼에 나란히 출연하고 음반을 함께 녹음하면서 화해하기에 이른다.

피아졸라는 스물세 살에 독립해서 2년 뒤 자신의 악단을 창단했지만, 결국 1954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했다. 피아졸라는 “교향곡을 쓰는 작곡가가 탱고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당시 나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지킬 박사일 때는 교향곡을, 하이드일 때는 탱고를 작곡했다”고 회상했다.

작곡가로 인정받겠다는 야심에 가득 차 있던 피아졸라는 불랑제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클래식 작품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승은 “잘 썼다만 진정한 피아졸라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망을 금치 못한 제자가 탱고 음악가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피아노로 몇 소절을 연주하자, 불랑제는 거꾸로 제자의 손을 잡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피아졸라야. 절대 버리지 말게”라고 조언했다. 서른세 살의 작곡가는 “기나긴 혼돈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피아졸라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바흐의 대위법부터 라벨과 드뷔시의 프랑스 음악, 버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의 현대음악과 제리 멀리건의 재즈 등으로 중무장한 피아졸라는 1955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창단했다. 그 뒤에도 기존의 대편성 밴드 일변도에서 벗어나 5중주부터 9중주까지 다양한 실내악 편성을 도입하면서 탱고의 무대를 기존의 무도장에서 음악당으로 옮겨왔다. 당시 피아졸라는 “탱고를 멀리하는 자와 비판자들에게 우리 음악이 지닌 명백한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예술적 목적을 위해 모이며 상업적 활동을 2순위에 둔다”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댄스홀에서는 연주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목표를 내걸었다.

하지만 탱고의 전통주의자들은 그를 이단자나 배교자로 불렀다. “탱고는 라플라타 강에 속해 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의 밀롱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하바네라”라고 노래했으며, 피아졸라와 함께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마저 “피아졸라는 탱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넌지시 비판했다. 하지만 피아졸라는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의 처지를 빗대 그가 오히려 귀를 먹은 것 같다고 응수했다. 작곡가는 “1955년에 하나의 탱고가 죽기 시작했지만, 또 하나의 탱고가 태어났다. 그 출생증명서가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이었다”며 긍지를 나타냈다.

‘탱고의 혁명가’로서 피아졸라의 작업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현대화’가 될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칙 코리아 등 재즈 음악가들이 로큰롤의 영향으로 전자음악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자, 피아졸라 역시 일렉트로닉 8중주단을 창단해서 적극적으로 발맞춰갔다. 실제 피아졸라는 제리 멀리건(색소폰)이나 게리 버튼(비브라폰) 같은 재즈 음악인과도 즐겨 호흡을 맞췄고, 재즈의 자율성을 도입하기 위해 즉흥 연주를 독려했다.

그는 앉아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던 기존 자세마저 “노파가 바느질하는 것 같다”고 꺼렸다. 대신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고 싶다”며 의자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연주하는 모습은 로큰롤 스타처럼 도전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의자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연주하는
피아졸라 특유의 자세

피아졸라는 “정지한 모든 물체는 사라지고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난 언제나 변화하려고 노력하며 변화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피아졸라는 명성을 얻은 뒤에는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고 1979년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오찬에 응해서 구설수에 오르는 등 사생활에서는 흠이나 결점이 결코 적지 않았다. 작곡가 자신도 “나도 천사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만 그건 진실은 아니다. 내 이야기는 언제나 천사와 악마가 절반쯤 섞여 있으며 얼마간은 고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평생 3,000여 곡을 남겼고, 자신의 작품이 2020년이 아니라 3000년까지도 들릴 것이라고 자신했던 천생 음악가가 피아졸라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변해도 탱고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피아졸라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 탱고마저 변화시켰다. 뇌출혈로 쓰러진 피아졸라가 1992년 타계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했던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은 그의 음악적 업적을 두 문장으로 간명하게 요약했다.

“모든 위대한 사람은 논쟁적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역시 논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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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다. 예술의 전당 월간지에 현대 음악 작곡가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서 음악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 피아졸라 마리아 수사나 아치,사이먼 콜리어 공저/한은경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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