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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대중독본 그리고 새로운 주체

외부에서 교과서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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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라는 단어는 사회에서 유통될 때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저 투수의 투구동작은 교과서다”라고 할 때의 교과서는 물론 긍정적 의미다. 어긋난 부분 없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교과서’라는 단어는 사회에서 유통될 때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저 투수의 투구동작은 교과서다”라고 할 때의 교과서는 물론 긍정적 의미다. 어긋난 부분 없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얘기”라는 말에서 교과서는 부정적 의미다. 따분하고 쓸모없는, ‘죽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교과서가 이중의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오늘날 ‘주체의 자리’, 즉 우리가 계몽적 주체인 반면 냉소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과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교과서를 사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작업이 된다. 그것은 교과서 내용의 한계를 드러내면서도(지식과 현실의 괴리), 동시에 교과서라는 매체 자체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과서를 교육행정의 차원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의 표준적 지식전달 수단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이다.

경전(scriptures)의 시대에서 교과서(textbooks)의 시대로

교과서라고 하면 보통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를 가리킨다. 국민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지식들을 정리한 텍스트다. 쉽게 말해 공교육의 교재인데 물론 교과서는 단순히 교재에 그치지 않는다. 교과서가 중요하고 또 늘 논란이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특정사회의 ‘표준지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권위는 교과서에 수록된 지식의 권위와 동일시되기 쉽다. 교과서에 실린 지식은 ‘옳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렸다’는 식으로 이해된다. 물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수준의 지식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옳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린 것이지만, 실상 대다수의 사회적?과학적 지식들은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며 언제든 새로운 지식으로 교체될 수 있다. 그래서 교과서도 몇 년에 한 번씩 혹은 몇십 년에 한 번씩 전면적으로 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가 최신의 학문적 성과들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으며 교과서에 실린 지식이라 해서 늘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옳은 것’이라는 명제가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게 아닐까. 오늘날 한국인들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약 12년의 공교육을 받는다. 교과서는 그 과정에서 필수교재로 활용되며 이를 통해 평가받고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사회적 평판이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의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교과서의 지식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의문시하면서 교육시스템의 승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실은 이것이 바로 제도의 힘이다. 제도는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일탈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신체에 스며들고 각인되는 체제의 논리다. 요컨대 교과서의 권위는 교과서에 실린 지식의 진리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지식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후발근대국에 있어 교과서의 최우선 과제는 학문적 성과물을 교육체계 속에서 정확하고 균형적으로 녹여내는 데 있지 않았다. 교과서는 선진국이 이미 성취한 근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따라잡기 위한 목적에 철저히 복무해야 했다. 특정지식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과 풍부한 맥락은 애초에 배제되었다.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효율성이라는 것이 장기적으로 오히려 큰 비용을 초래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필요한 지식을 가능한 많이 머릿속에 우겨넣기 위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한국의 교과서는 시민의 권리나 교양을 기르는 데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담지 못했다. 아니, 사실상 의도적으로 그런 종류의 지식들이 배제되었다고 하는 게 더 옳다. 그보다는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국가경제에 문제없이 투입되기 위해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윤리와 도덕─물론 그것은 인간이 당연히 가져야 할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되었다─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과서가 국가를 위해 일방적으로 충성하고 희생하는 ‘노예의 매뉴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시장경제를 수용한 근대국가의 필수전제는 오히려 노예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봉건제와 신분의 족쇄를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시킨 게 바로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의 수레바퀴가 원활히 굴러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신분질서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소비자였다.

신분질서가 지배하던 시대는 교과서의 시대가 아니라 경전(scriptures)의 시대였다. 동양과 서양의 중세는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 한정한다면 소위 중세부터 근세까지의 왕조시대에 행정권력과 지식권력은 사실상 동일한 권력이었다. 놽게 말해서 한 마을의 사또가 그 마을의 제일가는 지식인이었다는 소리다. 경전을 해석하기는커녕 읽을 수조차 없는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지식이라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농사일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거나 양반들의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고사성어 따위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교과서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다. 교과서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근대의 발명품이기 때문에 중세인에게 아무리 교과서에 대해 설명해주어도 아마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지식권력의 사회적 비중이다. 경전의 시대에 귀족(양반)계층에 지식권력이 독점되었다는 사실이 곧 지식권력이 강력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지식권력은 지식의 ‘양적 집중도’가 아니라 지식의 ‘이전 가능성’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건 무슨 말일까.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걸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권력이 될 수 없다는 소리다. 달리 말해 한 사회에서 지식권력의 크기는 문해율(文解率)에 비례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생산력도 낮았고 지식권력의 사회적 비중 역시 오늘날에 비해 극히 미미했다. 사회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소위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생산양식이 이행하면서 드디어 사회는 경전의 시대를 벗어나 교과서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양상은 사회마다 제각각이었지만 대부분 유혈낭자한 갈등과 희생을 치렀다. 한국 역시 개화기를 거쳐 오랜 식민통치를 겪고서야 중세에서 근대로 온전히 옮겨갈 수 있었다.


교과서의 원형, 대중독본

경전의 시대와 교과서의 시대 사이에는 그 ‘이행 또는 도약’의 매개가 하나 있었다. 대중독본이 그것이다. 국어사전에는 독본의 의미가 “주로 일반인에게 전문분야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지은 입문서나 해설서”라고 나와 있다. 교과서라 할 수도 없고 교과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다소 기묘한 형태의 텍스트가 바로 독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독본의 전성시대는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말까지였다. 독본에는 관에서 발행한 것이 있고 민간에서 발행한 독본이 있는데 여기서 주로 다루는 의미의 독본은 후자다.

대표적인 독본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먼저 1897년 8월 편찬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이 있다. 조선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근대교과서이다. 근대독본의 드문 연구자 중 한 사람인 구자황은 「독본을 통해 본 근대적 텍스트의 형성과 변화」(2003)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자생적 교육기관에서 쓰인 서책류를 근대적 의미의 교과서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때, 근대적 학제의 제정과 공포 그리고 이로부터 적극적 필요에 의해 개발된 『국민소학독본』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인 셈이다.”

여기서 근대적 학제의 제정은 1895년 고종이 조칙으로 발표한 “교육조서”를 말한다. 교육조서는 1890년 일본의 교육칙어를 본떠 박영효 등 친일관료와 일본인 고문이 직접 관여한 문서로, 서구식 실용주의와 일본식 충절사상을 혼합하여 근대국민의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민소학독본』은 국가가 편찬한 교과서였지만 학제가 구분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종합교양서와 같은 형태였다. 이후 민간에서 편찬된 독본들은 장르나 독자를 좀 더 세분화해 다양한 형태와 편집을 시도하게 된다.

일제시기 대표적인 대중독본으로는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1908), 장지연의 『녀자독본』(1908), 최남선의 『시문독본』(1916), 윤봉길의 『농민독본』(1927) 이윤재의 『문예독본』(1931) 등이 있다. 이후에도 수많은 독본과 강화(講話)류 (예를 들어 이태준의 『문장강화』[1940]) 서적들이 출간되고 널리 읽혔다. 독본의 공통적인 목표는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계몽이었다. 그 계몽이 소수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계몽’이라는 건 말할 나위도 없겠다. 독본(讀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읽기에 초점이 맞춰진 교재였지만 차츰 격렬한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더해가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친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전면에 드러내는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이었다. 『노동야학독본』은 조선국민이 새로운 지식과 문물에 눈을 뜨고 계몽될 것을 강조하면서도 일본에 맞서기보다는 일본의 지도하에 차근차근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당시의 대표적 친일논리인 ‘실력양성론’을 주장하고 있다(구자황, 2003).

개화기에서 일제시기까지 대중독본의 공통적인 특징 중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수신서(修身書)로서의 성격이다. 수신이란 글자 그대로 ‘몸을 갈고 닦는다는 것’인데, 동양의 전통에서 수신은 지덕체(智德體)의 수양을 의미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피지배집단의 예측하기 어려운 저항과 봉기를 통제하기 위한 ‘자기규제적 행위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이러한 수신서들이 대거 출현했는데, 이는 일본과 조선의 독특한 근대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초다. 근대서양의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당대의 지식을 자유와 해방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천황을 구심으로 한 국가체제에 국민들이 저마다의 직분을 다하고 충성하는 것이 곧 메이지 시대 수신서에서 말하는 근대화였다. 야마모토 노부요시는 이를 “근대주체가 내셔널리즘으로 포섭되는 과정”이라 표현했다(「현대교육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메이지 시대 학교행사의 고찰」, 신천사[新泉社], 1973).

기본적으로 천황제라는 봉건질서와 계몽지식은 서로 결합하기 힘든 조합이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과 인내를 강조하는 수신, 즉 덕성교육을 지식교육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결합하기 힘든 두 가지 가치를 비교적 단단히 이어붙이게 된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지식의 위상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동양에서 지식은 서양에서처럼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추구(앎에 대한 사랑 philo-sophia)’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지식을 소인배가 쓰느냐 군자가 쓰느냐에 따라 그 지식의 가치도 달라진다. 근대화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지식 자체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지식을 수용하는 주체의 관점과 태도가 중요해진다. 이러한 지식수용의 양상이 일본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조선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수신서의 탄생은 단지 천황제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이념적 이유에서뿐 아니라, 이렇게 근대지식의 수용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셈이다.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조선의 대중독본 역시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친일인사가 쓴 독본이건 항일인사가 쓴 독본이건 이러한 수신서의 성격을 공히 지니고 있었다. 표준지식의 선별과정 자체가 이미 관점과 태도의 문제를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근대기술과 지식만을 분리해 수용할 수 있다는 식의, ‘지식에 대한 극도의 도구적인 관점’은 친일파와 항일파,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표준지식에 대한 공통적 합의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국정교과서가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도 일종의 ‘은폐된 전제조건’으로 지속되어왔다.

새로운 주체와 대중독본의 귀환

1997년 겨울 출범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1999년 2월부터 흥미로운 관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소위 ‘신지식인 운동’이었다. 신지식인은 “학력에 상관없이 지식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사람”이라 정의됐다. 코미디언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심형래 씨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이라는 TV 광고로 화려하게 제1호 신지식인 신고식을 하면서 시작된 이 운동은 교사, 집배원, 찐빵 장인, 자장면 배달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신지식인’으로 선발되면서 전국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에 대해 “천박한 발상”이라 반발하는 ‘구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그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이것은 징후였다.

신지식인들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지식인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신지식인 운동이 환기하고 있는 어떤 인간형이다. 신지식인의 정의에는 “부가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사람”이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그 인간형을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시키는 일을 잘하는 건 물론이요 안 시킨 일까지 찾아서 하는 노동자’다. 요구하지 않아도 굳이 자신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뽑아내는 노동자라니, 기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인재가 아닐 수 없다.

당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창의력만 있으면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판타지가 유포되던 때였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의 막대한, 그리고 때로 눈먼 지원금이 IT 분야에 흘러들어갔고, 여기저기서 스톡옵션으로 벼락부자가 됐다는 소리가 들리던 시절이었다. 노동자는 이제 더 이상 노동자로 불리길 원하지 않았다. 글로? 인재, 벤처 사업가, 1인 기업……. ‘노동자’처럼 촌스럽고 후진 단어를 대체할 멋지고 쿨한 이름들은 이처럼 차고 넘쳤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IMF 구제금융의 고통이 대부분 평범하고 힘없는 노동자에게 전가되었고 전가되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방적 노동탄압에 맞서 싸우던 몇몇 노동자들은 소위 ‘민주화정부’에게 철저하게 짓밟혔고 소위 ‘세계일류기업’에서 잘려나갔다. 많은 노동자들은 체념했다. “국가도, 노조도 나의 억울한 실직을 막아줄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유능하면 잘리겠어? 능력을 키워야지.”

개화기에 수많은 ‘개화꾼’들이 각종 대중독본을 섭렵하며 계몽을 설파한 것처럼, IMF 이후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비공인 신지식인들이 등장해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의 왕도를 설파했다. 베스트셀러를 싹쓸이하는 책들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황금가지, 2009) 따위의 책을 필두로 한 실용서, 자기경영서, 처세서였다. 이런 책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바는 낡은 사고방식, 표준적 해석 따위를 전부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계몽서였고 21세기 대중독본이었다. 사람들은 기존의 정형화된 지식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마음과 신체를 쇄신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새로운 대중독본은 개화기의 그것과 달리 단순한 학습도구가 아니라 지식 및 감성체계를 공유하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체험형 텍스트다. 또한 개별적?개인적 체험에 최대한 밀착해 조언해주는 일종의 ‘멘토’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단 활자의 형태뿐 아니라, 이미지의 형태로, 인터넷의 동영상으로도 존재한다.

1997년 시작된 7차교육과정의 교육철학인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시대변화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7차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제출되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획일적인 교과과정과 교과서 지식의 단순암기에 그칠 뿐인 현실에 대한 국가적 대안으로 제출된 것이 7차교육과정이라는 점이다.

이는 부족하나마 ‘국민’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주체를 양성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교과서의 태생적 한계로부터 탈피하려는, 사실상 첫 번째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표준지식에 대한 은폐된 합의, 즉 지식의 선별부터가 이미 관점과 태도를 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다른 성찰이 없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7차교육과정 이후’의 세계에서 교과서를 사유하고 비판한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냐는 점이다. 실은, 교과서가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지식을 단순암기하도록 만들며, 국민이라는 내셔널리즘적 주체를 호명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에 비판받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현재 시점에선 가장 안이할 뿐 아니라 가장 위험한 교과서 비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본과 지배 이데올로기야말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교과서로부터의 적극적 일탈 혹은 탈주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노동해서는 자본에게 더 큰 이윤을 안겨줄 수 없다. 우리 자신을 비상식적으로 쥐어짜고 더 혹독하게 착취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

좀 더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건 교과서의 지적 패권주의 내지 표준지식의 독점 따위가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 교과서가 너무 강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교과서가 너무 약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니 “창의력” 같은 개념에 취해서, 혹은 제도권의 텍스트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품지 않음으로써 교과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틈새를 치고 들어와서 교과서를 대체하고 보충하는 텍스트가 바로 새로운 대중독본들인 것은 아닐까. 또래 친구가 투신자살하자 “아파트값 떨어지겠다”고 걱정하는 아이들은, 새로운 대중독본들이 이미 아이들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교과서의 ‘외부’를 바라보기

딱딱하고 지루할 뿐 아니라 냉전주의 이데올로기에 찌든 과거의 교과서로 교육받은 세대가 만약 요즘의 교과서를 처음 뢺게 된다면 십중팔구 놀라게 마련이다. 과거에 비해 과목의 수도 줄었을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적지 않은 진보가 있었다. 물론 그 진보란 언제나 부족하고 미흡한 것이지만 말이다. 형식민주주의의 진전이 일정부분 반영이 되었고, 배우는 학생의 입장을 고려한 친절하고 간결한 해설도 과거에 비해 돋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측면, 아니 오히려 후퇴한 측면도 있다. 다양한 입장의 갈등과 충돌이 존재하는 게 당연함에도 무조건 대화와 타협만을 기계적으로 강조한다든지, 노동자의 관점보다는 항상 기업과 국가의 관점에서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 제3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무관심과 무시도 여전하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교과서의 지식을 불편부당한 중립적 지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표준적 지식 혹은 평균적 지식과 중립적 지식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다.

중립적 지식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현실 속 가치판단의 문제에서 공정한 중간자적 입장을 자임하는 것은 실상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거나 한쪽 편을 드는 자신의 위치를 교묘히 은폐하는 것이기 쉽다. 이는 또한 교과서의 문제의식을 실제 삶과 괴리된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교과서는 교과서이고 삶은 삶’이라는 식의 속물의식만을 강화하게 된다. 표준적 지식과 교과서 속의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들, 예를 들어 평등, 정의, 공정성 등과 같은 가치들이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환멸만을 안겨줄 때, 교과서는 그저 시험지문의 데이터베이스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의 아이들에게 교과서가 베스트셀러 자기경영서 정도의 권위조차 갖지 못한 텍스트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회변동은 제도의 변화로 표현된다. 그러나 사회변동이 의미하는 ‘바로 그것’을 제도적 변화가 완벽히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변화의 본질적 측면들은 사후적으로 번역되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다 하더라도, 제도는 언제나 ‘시대에 대한 이해와 오해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늘 제도가 반영하지 못하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매체들(new media)’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사회변동이 급격하고 거대할수록 시대에 대한 이해와 오해의 간극이 커지고, ‘새로운 매체들’의 종류와 파급효과 또한 커진다.

개화기의 대중독본은 근대라는 엄청난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 ‘발명’된 매체였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의 것을 거의 그대로 베낀 형태였지만 어쨌든 근대적 지식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본격적인 근대화 시기에 근대적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교과서의 기여는 그야말로 결정적이었다. 탈근대에 들어선 지금 기존의 교과서는 내용 이전에 이미 형식이 너무 낡아버린 상황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를 바꾸려 할 때, 그 변화의 핵심이 교과서의 내용과 이념에 매달리는 것이어선 곤란하다. 교과서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하나는 표준지식의 선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단순히 교과서에 실리는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좌파와 우파 간의 견해 차이에 대한 게 아니라, 표준지식이 구성되는 장(field)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부분은 당연하게도 교육관료를 포함한 제 사회세력 간의 격렬한 논쟁 혹은 투쟁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두 번째 과제는 교과서에 국가의 권위나 시장의 권위가 아닌, 시민사회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참여주체와 참여방식이 관건이다. 세 번째 과제는 전문가 몇몇이 내용의 서술을 독점하는 ‘완결적 텍스트’가 아닌 위키피디아와 같이 ‘구성적 텍스트’로 교과서를 차츰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교과서는 종이책의 형태가 아니라 비트로 구성된 지식허브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래의 교과서는, 박제화된 지식들을 밀실에서 정리한 완결적 텍스트가 아니라, 최신의 연구성과들이 쉬운 언어로 정리되어 표준지식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공간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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