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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누드크로키는 매주 넘어야 할 고비였다.”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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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누드크로키 다음 주에 다시 시작합니다. 유월 말까지 삼 개월이에요. 미리미리 등록해주세요.”계림 언니가 말했다. 누드크로키라면, 옷을 벗은 모델을 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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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그림 그린다 하면 당연히…”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①
“견지 형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싶었다.”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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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누드크로키 다음 주에 다시 시작합니다. 유월 말까지 삼 개월이에요. 미리미리 등록해주세요.”
계림 언니가 말했다. 누드크로키라면, 옷을 벗은 모델을 그린다고?
“따로 돈 내야 해요? 등록 안 해도 돼요?”
“등록하면서 돈은 내야 하는데 등록 안 하고 그냥 와서 그려도 돼.”
견지 형이 대답하자 계림 언니가 장난스러운 태도로 흘겨보았다. 견지 형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근데 웬만하면 등록해주라. 안 그럼 모델비가 모자라서 모델을 못 구해. 그럼 내가 모델 서야 돼.”
“으악.”
애들이 소리 지르며 마구 웃었다.
“아니면 정샘이 희생할 수도…….”
정샘이 빨개진 얼굴로 웃었다.
“제발.”
“안 되죠. 두 아이의 아버지세요, 안 되죠. 그러니까 등록해주세요.”
누드크로키는 일반부와도 함께 했다. 큰방이 사람들로 꽉 찼다. 대학생 같은 사람들도 있고,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에 정체 모를 할아버지도 있었다. 일반부는 분위기가 시끌벅적했다. 생전 안 웃게 생긴 윤샘이 일반부 사람들과 깔깔대며 웃는 것을 보고 놀랐다.


탁자를 가장자리로 치우고, 가운데 담요 같은 것을 깔고, 그 주위로 둥글게 이젤을 세웠다. 자리가 좁아서 몇몇은 화판을 들고 바닥에 앉기도 했다. 정샘과 윤샘과 계림 언니도 자기 종이나 스케치북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작업실다웠다.
하지만 견지 형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왜 안 그리지? 잠깐 궁금했는데, 가운을 입은 여자 모델이 걸어들어와서 거기에 온 신경이 쏠렸다.
어떻게 해!
심장이 다 떨렸다. 나처럼 긴장한 사람은 없는지 다들 편한 표정이었다. 모델은 휴대용 시디플레이어 앞에 앉아 가져온 시디를 넣었다. 음악을 틀고,
“시작하겠습니다.”
악, 시작하지 말아요. 옷 벗지 마세요, 악!
가운을 벗고 맨몸으로 포즈를 취한 모델 때문에 당황한 것은 잠깐,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몰라 죽을 것 같았다.
다들 슥슥 잘도 그린다. 나는 머리 그리고 몸통 그리고 팔 하나 겨우 그렸는데 바로 포즈가 바뀌었다. 삼 분이 너무 짧다.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삼십 분이 지나버렸다.
“십 분 쉬었다 하겠습니다.”
바로 스케치북을 덮었다. 스스로도 창피해서 못 보겠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 그림을 들추어보았다.
“어쩜 학생들은 이렇게 잘 그려?”
과일가게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며 감탄했다. 그 말을 받아 얼굴이 낯이 익은, 부동산 혹은 떡집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얘네랑 우리가 같은가요. 얘네는 프로예요, 프로.”
나는 빼고요. 난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더니 계림 언니가 왔다.
“어디, 초우 한 것 보자.”
“언니 제발.”
계림 언니가 스케치북을 잡아당겼다. 버티고 있으니 정샘까지 왔다.
“왜, 왜. 초우 그림 좀 봐야지.”
“안 돼요!”
스케치북을 빼돌리려고 했는데 정샘 힘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러면 이럴수록 점점 더 민망해질 텐데?”
“그러니까 민망하게 안 하면 되잖아요.”
내가 끝까지 스케치북을 붙들고 놓지 않자, 정샘이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 그린 거나 보고 와. 도움이 될 거야.”
나는 스케치북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계림 언니가 깔깔 웃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얘들이 그린 모델과 내가 그린 모델이 같은 사람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나. 나는 연필 가지고 벌벌 떨었는데, 다들 목탄에 파스텔에 잉크에, 재료도 가지가지 썼다. 일반부 사람들도 모두 나보다는 나았다. 정샘이 다가와서 말했다.
“초우야, 머리랑 얼굴에 너무 시간을 쓰지 말고 몸 전체의 선을 그리려고 해봐. 어쩔까, 목탄으로 해볼래? 선이 두껍고 부드러우니까 덜 부담스러울 거야.”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했을 때는 아주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이젠 모델을 보지 못할 정도로 민망하지는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깜짝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목탄으로 하니까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이제는 자꾸 다리가 잘렸다. 서면 선 대로, 누우면 누운 대로 언제나 종아리에서 끝나버려서 내 스케치북에는 다리 없는 여자가 가득했다.

두 번째 삼십 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 서둘러 스케치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견지 형이랑 부딪칠 뻔했다.
내 그림을 봤을까, 아,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견지 형은 진지하게 말했다.
“앞에 있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봐. 그냥 그렇게 생긴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그려. 저게 팔이라고 생각하면 네가 머리로 알고 있는 팔을 그리게 돼. 사람 몸이, 자세히 보면 아는 거하고는 다르게 생겼을 거야.”
머리로는 알아듣겠는데 손과 눈이 안 따라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기초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누드크로키는 매주 넘어야 할 고비였다.
발전이 있다면 내가 그린 그림을 안 보여주겠다고 우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지금 네 실력이 이 정도면 이 정도라고 받아들여야지, 안 보여준다고 네 실력이 나아져? 라는 윤샘 말 때문이었다. 그 말에 풀 죽은 내가 손을 놓자 내 스케치북을 펼친 정샘이 와, 재밌다, 힘이 있네, 좋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진짜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술선생들은 칭찬하기 강좌 같은 것을 이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이상한 그림도 칭찬할 구석이 보이나보다.
정샘의 충고에 따라 재료를 다양하게 써봤더니 재미는 있어졌다. 정샘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그림 그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뭇가지나 털실뭉치며 비닐봉지로 잉크를 찍어 그리기도 했다.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 그림을 보러 다니다 자리에 돌아오면 내 그림을 들춰보던 누군가가 재밌네, 신선하다, 그런 말을 해주기도 했다.
정샘은 주영이와 아운이에게는 더 풀어지라는 말을 하고, 내게는 좀 더 모아보라고 했다.
“초우야, 너는 어떻게 하면 그림이 재밌는지는 잘 아는 거 같아.”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겠다.
“근데 그렇게만 하다보면 기초가 늘지가 않거든. 재미없더라도 정확하게 하려고 해봐, 응?”
“좋겠다. 내 그림은 재미없어.”
갑자기 내 왼편에 앉아 있던 아운이가 말했다. 놀라서 대꾸도 못했다. 네 그림은 재밌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잖아! 이번 달, 삼월의 달력이 아운이가 그린 것이었다. 차분하면서도 밝은 수채화. 색깔이 참 예쁘고 고왔다. 이런 애니까 저런 그림을 그리는구나 싶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배부른 고민이라고 하지, 그런 걸.”
묘은 언니가 내 마음처럼 말했다. 아운이는 조금 웃었다. 묘은 언니가 내게 말했다.
“이환도 너랑 비슷해. 쟤도 정석대로 못 가서.”
“왜 또 나를 가지고 그러냐?”
이환이 흘겨보았다.
“나처럼 말 잘 듣는 학생이 또 어딨다고.”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와, 초우. 너 이건 배신이야.”
장난을 치는데, 우리가 너무 가벼워 보였나보다. 계림 언니가 말했다.
“지금 안 해놓으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 너희. 이런 때가 또 있을 줄 알아? 밥 먹고 그림만 그려도 되는 때가.”
“학교도 가는데요.”
이환이 농담을 했지만 계림 언니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 학교까지 넣어, 그럼. 목적이 대학이니까 시시하고 속물 같니? 그런 생각으로 의미를 깎아내리지 말고 그냥 해봐. 이런 순간은 다시는 없을 수도 있으니까.”
밥 먹고 그림만 그려도 되는 때, 라는 계림 언니의 말이 너무 맘에 들어서 꼭꼭 머리에 담아두었다. 다른 생각 안 해도 되는 때. 왜 작업실에만 오면 시간이 쑥쑥 잘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작업실에 다니게 된 후로는 처음으로, 건우 오빠의 스케치북을 펼쳐보았다. 공책 반만 한 하드커버 스케치북. 원래 검었을 표지에는 그림과 잡지에서 뜯어낸 사진들이 붙어 있고 그림 또한 그려져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림 그린다는 것을 내게 들키고서는, 건우 오빠는 자주 스케치북을 보여주었다. 손 좀 이렇게 하고 있어봐, 시키고는 슥슥 그리기도 했다. 살아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을 오빠는 그렸다. 일기처럼 썼다. 딱 오빠다운, 눈을 뗄 수 없는 그림과 글들이 거기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스케치북 말고 건우 오빠의 그림을 본 적이 없다. 큰아빠가 건우 오빠의 다른 그림들은 모두 태웠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말을 듣고 한참 울었다. 건우 오빠가 알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건우 오빠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빠가 날 도와준 적이 있다. 오빠는 개교기념일이어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고 나는 미술수행평가 작품을 학교에 들고 가야 했다. 건우 오빠가 그림을 학교 앞까지 들어다주었다. 사실 나는 오빠가 씻지도 않고 후드점퍼만 대충 뒤집어쓰고 나와서 좀 창피했다. 그때 오빠가 말했다. 재미없었다는 내 투정을 한참 들은 뒤였다.
- 그림은 네 일부야. 네 모습이 보이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을 그려봤자 소용없어……. 하기 싫은데 한 티가 다 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싫었다. 창피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몰라, 내가 들고 갈 거야! 말하면서 그림을 빼앗아 들었는데.
건우 오빠, 그랬던 내가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말해주었던 것을 알아가고 있어. 이제는 오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데. 묻고 싶은 게 생겼는데.
나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분명 들뜬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캄캄하게 어두워져버렸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싶은 오빠는 이제 여기에 없다. 같이 그림을 그릴 수도, 서로의 그림을 보고 놀리거나 감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삼월에도 여전히 추워서, 눈이 두 번이나 왔다. 사월이 되자, 달이 바뀌길 기다렸다는 듯이 날이 따뜻해졌다. 산수유가 연노랑 꽃잎을 틔워내고 버드나무 가지에 연둣빛 구름이 걸린 듯 새잎이 돋아나는 때, 큰고모네 언니 결혼식이 있었다. 명절 때도 잘 보지 못하는 친척들이 모였다. 큰아빠는 왔지만 큰엄마가 오지 않았다.
“아직은 힘들 거예요, 그렇죠? 건우 엄마가 얼마나…….”
대화는 교묘하게 핵심을 빗겨간다. 서로를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만 슬쩍 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말이 있든 없든,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는 우리는. 엄마와 아빠는.
“초우네도 힘들지 뭐……. 그게 무슨 초우 엄마 아빠 책임이에요?”
“그래도 애를 맡기로 했으면 애가 뭐 하고 다니는지는 알았어야지.”
“건우네 생각하면……. 아유, 저 같으면 저렇게 얼굴 들고 못 다녀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디 가?”
엄마가 물었다. 엄마는 저런 말들을 듣지 못한 걸까?
“잠깐 화장실 좀…….”
말끝을 흐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가버리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탕탕, 대리석 바닥에 내 구두 소리가 울렸다. 더 크게 발을 구르고 싶었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결혼식장 아래층은 갤러리였다. 결혼 축하 화환과는 색조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른 화환들이 늘어선 계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두 사람이 계단 쪽에서 옥신각신하는 것을 무심코 보았다. 내 또래 여자애와 남자애.
아운이와 경하였다.
작업실 밖에서, 이런 순간에 마주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애들이었다. 둘 다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하가 뭔가 말하는데 아운이는 경하를 외면하고 건물 로비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다 아운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운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초우야!”
아운이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고 가자, 하며 끌어당겼다.
“어? 아, 안녕. 근데 어딜? 어?”
“김아운, 너 진짜 이럴 거야?”
경하가 뒤따라왔다. 경하는 날 못 알아본 것 같았다. 그만큼 아운이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그럼 너는 들어가면 되잖아!”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얌전하던 두 아이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것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화를 내던 중이었음을 잊고,
“그만해, 좀. 야, 아 진짜, 소리 지르지 마. 목 안 아파? 저 봐라, 핏줄 서는 거.”
나는 오른손으로는 아운이를, 왼손으로는 경하를 붙잡고 둘을 말리느라 쩔쩔맸다. 아운이가 내 손을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는 경하의 옷소매를 잡은 채로 아운이한테 끌려갔는데, 그러다보니 셋이 무슨 유치원생처럼 나란히 손을 잡고 걷게 되어버렸다.
큰 동굴 같은 건물을 빠져나가자 사월의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우리는 그대로 건물 앞 횡단보도를 잰너 공원으로 갔다. 그냥 계속 걸었다.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들이 문득 입을 다물었을 때 밀려드는 그 당혹스런 침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양쪽 다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어떻게 언제 놓아야 할지 몰라서 계속 잡고 있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손을 잡고 그 넓은 공원을 걸었다. 경하는 자주 전화를 확인했지만 전화를 받거나 아운이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나 역시 주머니에서 계속 진동하는 전화기는 무시하고 있었다. 아운이는 그런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마침내 갓 걸음마하는 아이가 비틀비틀 우리 쪽으로 걸어와서, 그 아이를 피하느라 자연스레 손을 놓았다. 손이 뜨끈뜨끈했다. 갑자기 더욱 어색해졌다. 뭔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는 선생님 전시회여서.”
경하가 불쑥 말했다.
“아, 나는, 사촌언니 결혼식이어서.”
“어떻게 해, 이렇게 나와도 돼? 괜히 나 때문에…….”
아운이가 미안해했다.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나오려던 참이었어.”
차라리 잘되었다. 적어도 거짓 없는 변명거리는 생겼다. 다시 할 말이 없어지고, 우리는 그냥 걸었다.
공원의 반대편 문으로 나오자 복잡한 대학가였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불을 밝힌 좌판들 사이로 걸었다. 사람은 너무 많고, 시끄럽고, 말해봤자 들리지도 않을 테고,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눈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초조해하던 경하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나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까 그렇게 결혼식장을 뛰쳐나온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왜 이러냐면……. 듣고 싶기도 했다. 너희는 무슨 일인데? 하지만 말하지 않는 순간에만 얻을 수 있는 평화로움과 안도감이 더 컸다. 공범자가 된 것 같은 기분, 말 한마디 안 해도 아주 가까워진 기분. 우리는 묵묵히 떡볶이를 사 먹고, 묵묵히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헤어졌다.


아운이와 경하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토요일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경하와 아운이는 작업실에 같이 들어오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작업실에서는 서로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나는 작업실에서의 모습밖에는 모른다. 그 모습을 가지고 짐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예전보다 더 자주, 두 사람의 그림에 눈이 갔다. 바르고 곧은, 나쁜 짓은 한 번도 안 했을 것 같은 경하의 그림. 화사하면서도 차분한, 가벼운 구름 같은 아운이의 그림. 아운이는 그날 이후로 나를 좀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옆에 와서 말을 걸기도 하고 누드크로키를 할 때면 옆에 같이 앉자고 말하기도 했다.
“아운이 걔가 그런 애가 아닌데.”
이환이 감탄할 정도였다.
“아운이 처음 작업실 왔을 때, 내가 걔 말하게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요즘도 아운이는 경하랑도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다가 갈 때도 있거든. 강강이하고나 좀 친한가 싶지. 우리 초우, 대단하네?”
“무슨 헛소리예요.”
쑥스러워져서 타박하자 이환은 너 아운이랑 친해졌다고 날 버릴 거야? 그런 거야? 신파조로 말하다가 견지 형에게 한 소리를 듣고서야 자기 그림으로 돌아갔다. 막상 가까워지고 나니 아운이는 그렇게 딴 세상 애 같지는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머리로 짐작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나의 버릇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가. 그럼 정말 있는 대로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히면 사람에 대해서도 바로 볼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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