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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대표적인 미묘한 표현 ‘바람피다’ - 김진경의 신화로 읽는 세상

우리말에서 바람은 참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하는 바람에’ ‘바람나다’ ‘바람 피다’ ‘바람 들다’ ‘신바람 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등등이 모두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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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봉(鳳)의 원형은 좀 뜻밖으로 여겨지겠지만 북방계의 백조이다. 바이칼 호 부근에 사는 코리 족의 시조신화는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 전설과 매우 유사하다. 호수 근처에 사는 사냥꾼이 목욕하러 호수에 내려온 백조 여인의 날개옷을 숨겨 결혼했는데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코리 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코리 족의 시조신화는 ‘나무꾼과 선녀’ 전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한 학설에 의하면 옛날 코리 족에서 갈라져 나온 씨족이 동남쪽으로 여러 차례 이동해오는데 그 씨족의 지도자를 ‘코릴다이 메르겡’이라고 했다. 코리 족의 활 잘 쏘는 사람, 즉 코리 족의 주몽이라는 뜻이다. 이 코리 족의 주몽들이 세운 나라가 부여, 고구려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고구려가 흔히 ‘고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코리의 음역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코리에서 고구려, 고려, 코리아가 왔다는 것이다.

위의 학설에 따르면 ‘백조 여인’ 신화는 코리 족을 따라 들어와 변화되는 사람들의 삶에 맞추어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로 변형된 것이다. 유목의 바람 역시 ‘백조 여인’ 신화처럼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생활에 맞추어 변형되었을 것이다. 그 변형된 바람의 모습을 가장 잘 담은 것이 김소월의 시들이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 김소월, 「왕십리」 전문


비가 올 듯 흐린 날 「왕십리」 전문을 웅얼웅얼 반복해서 암송하다 보면 정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습기 먹은 심란한 바람이 발목을 스치며 ‘휘-’ 돌아나가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그런 느낌이 만들어지는 걸까?

우선 첫 연의 어미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다는 ‘온다/오누나/오는/올지라도, 왔으면’으로 미묘한 어미변화를 하며 반복되고 있다. 이 어미변화와 반복이 행갈이와 맞물리며 무슨 주문처럼 추적추적 비가 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첫 연 마지막 행의 ‘왔으면’은 내리는 비의 수직 방향 운동을 나타내면서도 또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한 닷새 왔으면 좋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비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와서 오래 있었으면 하는 소망도 들어 있다. 그 무언가는 2연의 “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로 볼 때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시 온다고 하고 그리고 아쉽게도 금방 간다고 하는데 내리는 비가 오래오래 내려 그 님을 오래오래 붙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 연의 마지막 행 “왔으면”은 ‘비가 왔으면’이면서 ‘님이 왔으면’이기도 하다. “왔으면”은 수평 방향에서 오는 님을 수직 방향으로 내리는 비로 묶어두는 거멀못이다. 이 시의 화자는 그 거멀못의 자리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왕십리 벌판의 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님은 실제로 온 게 아니라 화자가 막연한 약속이나 소식을 근거로 잠시 왔다 갈 거라고 예상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님이 오고 가는 것은 화자의 심리적 움직임일 뿐이다. 이 수평 방향의 심리적 움직임이 빗속에 거멀못처럼 서 있는 화자의 발목을 스치며 휘- 돌아나가는 습기 먹은 바람이 된다. 이 스산한 바람은 화자의 마음속에 이는 심리적 바람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화자의 발목을 스치고 가는 습기 먹은 바람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휘- 돌아나가는 습기 먹은 바람을 만들어내는 건 미묘한 어미변화를 하며 반복되는 동사들이다. ‘온다/오누나/오는/올지라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만들어낸다면 ‘왔으면’은 수직 방향으로 내리는 비와 수평 방향의 움직임을 결합시키며 바람을 일으킨다. 이 바람은 2연의 ‘온다고/간다고’로 휘- 돌아 비 오는 왕십리 벌판으로 사라진다. 이 시를 보면 우리말이 미묘한 바람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참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표현력의 대부분이 이 시의 경우는 동사의 어미변화에서 온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김소월, 「가는 길」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사랑하는 님과 헤어져 막 길을 떠나는 중이다. 그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망설임, 마음속에 이는 미묘한 바람을 이 시는 참 잘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는 ‘그립다’가 ‘말을 할까/하니’에 의해 ‘그리워’로 바뀌는 과정에서 미묘한 심리적 바람이 일어난다. 역시 동사의 미묘한 어미변화와 반복이 그러한 표현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2연에서는 ‘갈까’의 앞뒤에 포위하듯이 배열된 ‘그냥/그래도/다시 더’ 같은 부사어들이 미묘한 심리적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시에서 1, 2연의 망설임과 미련, 마음속에 이는 미묘한 바람은 3, 4연의 자연의 흐름과 대비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은 빨리 따라가자고 연달아 흐르고 흐르고, 서산에 해 진다고 까마귀는 시간을 재촉한다. 사실은 강물이나 까마귀가 그렇게 재촉하는 게 아니라 화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화자는 떠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이는 미묘한 바람이 발길을 붙들고 망설이게 한다.

이 시를 읽노라면 ‘바람이 헤살 짓는다’란 말이 떠오른다. 헤살은 심술궂게 훼방을 놓는 것이다. 햇볕 따뜻한 봄날 바람이 한 방향으로 불어가다가 문득 여기저기에 강여울의 물맴이처럼 작은 회오리 같은 걸 일으킨다. 어린 시절 그걸 ‘바람이 헤살 짓는다’고 했었다. 1, 2연이 일으키는 마음속의 바람은 큰바람 속에 강여울의 물맴이처럼 이는 작은 회오리 같다.

언젠가 백제 기와나 전돌,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회오리 모양의 와선들을 보며 ‘바람이 헤살 짓는다’라는 말을 떠올렸었다. 그 와선들이 불어가는 봄바람 속에 심술궂게 훼방 놓는 것처럼 만들어지는 작은 회오리처럼 보였다. 그래서 회오리 모양의 와선이 바람을 그려놓은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모든 학자가 이 회오리 모양의 와선을 구름을 그린 거라고 해서 그런가 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티베트, 중국, 몽골, 시베리아 일대에 대한 어떤 학자의 여행기를 읽게 되었는데 그 학자는 이 회오리 모양의 와선을 바람을 그린 거라고 단언해놓고 있었다.

우리말에서 바람은 참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하는 바람에’ ‘바람나다’ ‘바람 피다’ ‘바람 들다’ ‘신바람 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등등이 모두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우리말은 앞의 시에서도 보았듯이 바람의 미묘한 움직임과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말의 특징을 몇 가지 든다면 동사?형용사 등의 어미변화, 조사?부사어의 발달, 의성어?의태어의 발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바람의 미묘한 움직임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 알맞은 것들이다.

위와 같은 우리말의 특징은 우리말이 속한 우랄알타이어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우랄알타이어는 유라시아 대륙 북부 초원지대를 오가며 생활한 유목민들의 언어이다. 유목민들의 언어가 바람의 움직임과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김소월의 시에 나타나 있는 바람은 이미 유목의 거친 바람은 아니다. 오밀조밀한 한반도의 자연환경 속에서 오랜 농경 정착생활을 거치면서 부드러워지고 섬세해진 바람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유목의 거친 바람이 느껴지는 유일한 시가 있다면 「초혼(招魂)」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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