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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권장도서? 청소년 유해도서?

권장도서와 유해도서, 도대체 기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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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R』로부터 내가 받은 ‘미션’은 ‘청소년 선정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와 선정도서가 청소년 독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달라는 것이었다.

『자음과모음 R』로부터 내가 받은 ‘미션’은 ‘청소년 선정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와 선정도서가 청소년 독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달라는 것이었다. ‘선정도서’란 ‘권장도서’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청소년이 선정한 도서’가 아니라 ‘청소년에게 권장하는 도서’란 뜻으로 새겨야겠지.) ‘인터넷 서평꾼’ 노릇은 하고 싶지만 청소년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건 아니어서 내가 이 일에 적격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나의 성벽 탓이다. 성?벽. 굳어 진 성질이나 버릇. 덧붙여, 어떤 주제건 ‘조사’하고 ‘탐구’하는 일을 그다지 마다하지 않는 것도 나의 고질이다. 고-질.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치기 어려운 건 또 고치지 않는 것이 나의 성벽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고질과 성벽이 빚어낸 합작품일 공산이 크다.


어디에서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관내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들을 둘러보고 복사하기도 했다. 그럴 땐 흡사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독학자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주인공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자주 보게 되는 독학자는 모든 책을 알파벳 순으로 다 읽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도서관이라면 그가 읽어나가는 책보다 새로 들어오는 책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한창 때는 1년에 300권씩 책을 읽었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도서관에 매년 새로 입고되는 책은 사실 그 몇 배가 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세상엔 그 가 읽지 않은 책 천지이다. 그래, 이토록 많은 책들과 상대하려면 뭔가 지침이 주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미리 읽어본 사람이 이 책은 이렇고, 저 책은 저렇다는 소개를 해준다면, 나중에 읽을 사람에게 요긴한 참고가 되지 않겠는가.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음식을 먼저 먹어본, 혹은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이 ‘가이드’가 될 만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면서 권장할 만한 일이다. 애당초 ‘선정도서’ ‘권장도서’ ‘추천도서’가 갖는 의미란 그런 것일 터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표면적인 이유는 여러 단체에서 매달, 매 분기, 혹은 매년 발표되는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이 ‘담합’에 의해 만들어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마다 사용하는 교과서 선정을 두고 교과서 출판사들의 로비가 개입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고만고만한 책들 가운데 일부를 특별히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하는 과정에 이해 당사자들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청소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에게 이런 목록이 꽤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면, 그런 담합에의 의혹도 자연스레 불거질 수 있다. 따라서 선정과정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가령 ‘책따세’의 경우에는 추천도서 선정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책따세 선생님과 회원들이 좋게 본 책을 추천받고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서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의견을 반영하여 검토도서를 정한다. 이렇게 1차로 선정된 책에 대해서는 교사가 꼼꼼히 검토하고 학생들에게 읽혀 그 반응을 확인한다. 그러고서 최종적으로 ‘넣을 책과 뺄 책’을 결정한다. 최대한 신중한 선정절차를 도입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추천도서 목록이 그만큼 논란을 낳을 여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라는 것도 해마다 발표하고 있고, 각 대학에서 ‘권장도서 100선(서울대)’이라는 식으로 권장도서 목록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목록이 반발을 사거나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은 드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권장도서 해제집』 같은 책을 사서 읽는 쪽은 대학생이 아니라 보통 입시를 준비 중인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다. ‘대학생 권장도서’라기보다는 ‘예비 대학생’이 읽을 만한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싶다. 소위 입학사정관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권장도서’ 목록이 학생들에게 주는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과 연 한국에서는 “독서 또한 입시 과목의 하나”라는 비판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거꾸로 독서는 입시와 무관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 문제가 갖는 딜레마다. 일본의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에서 주장한 바이기도 한데, 그에 따르면 “문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문제는 독서가 변죽만 울릴 뿐 핵심적인 입시과목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독서가 공부와는 별개로 간주된다는점에서 일본의 사정도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정인가?

“너는 그렇게 책만 읽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 책을 좋아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가끔씩 던질 만한 잔소리다. ‘공부=독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기이한 ‘한국식’ 잔소리는 문법적으론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의미론적으론 비문, 곧 틀린 말이다. “너는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라고 말을 바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일단은 이런 ‘부조리’가 한국 청소년 독서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우물 안 개구리’식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확인해둘 것은 모든 나라의 청소년이 그렇게 공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학생의 핀란드식 교육 경험담을 담은 『핀란드 공부법』이란 책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핀란드 학생들은 시험 전에 ‘공부한다’는 말 대신에 ‘읽는다’는 말을 쓴다. 엄마는 자식에게 “내일 시험이지? 많이 읽어”라고 격려하고, 학생들끼리는 “이제 곧 시험이네. 많이 읽었어?”라고 대화를 나눈다고. 일본에서도 공부법은 우리처럼 ‘암기’ 하나이지만 핀란드에서는 오직 ‘읽기’뿐이다. ‘공부=독서’라면 ‘공부하다’란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읽다’로 충분할 테니까.

물론 이런 차이는 시험문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긴 하다. 핀란드에서는 대부분의 시험이 에세이(작문) 시험이기에 단순한 암기로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렵다. ‘당신에게 문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란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얼 암기해야 할까? 생물 문제도 이런 식이라 한다. ‘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쓰시오.’ 수학조차도 고급 수준에선 에세이를 쓰게 한다니 교육방식이 우리와는 많이 다를뿐더러 아예 교육의 목표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모든 학생이 열등감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핀란드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체험담을 들어보면, 핀란드는 우리에게 너무 먼 나라이다.

그렇다면 한국 청소년들이 책 읽는 모습은 어떠한가? 『선생님들이 직접 겪고 쓴 독서교육 길라잡이』에 실린 ‘고등학생의 눈으로 본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체험적 독서론이 참고할 만하다. 10년쯤 전의 사례이긴 하나 요즘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진 않다. 일단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읽으라는 책들은 모두 다 삶에 도움이 된다고, 또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라는 서두부터가 ‘권장도서’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를 집약해준다. 글의 필자는 한창 놀고 싶어할 청소년기에 하루에 거의 7~8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는 한국 학생들의 현실에 대한 푸념을 잊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노동은 ‘공부’라는 노동이다. 곧 한국에서는 ‘공부=독서’가 아니라 ‘공부=노동’이다. 그런 만큼 공부(노동)의 연장으로서의 독서를 학생들이 즐길 리 없다. ‘좋은 책’의 기준으로 “우선 재미있는 책”이 고려되는 것은 독서만큼은 공부에서 분리시키고 싶은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그가 고른 두 번째 기준은 “야해서는 안 된다”이고 세 번째가 “장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하고 선정적인 책은 혈기방장한 고등학생으로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기피 이유이고, 장편 선호는 ‘나에게 딱 맞는 책’이 한 권으로 끝난다면 너무 황당할 거라는 게 이유다. 여기서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독서의 쾌락원칙이다. 고통은 최소화하고 쾌감을 최대화하려는 원칙 말이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책은 자연스레 판타지 대작들 쪽으로 기운다. 특이하게도 필자는 국내 판타지물인 『가즈나이트』나 『드래곤 라자』 등을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는데, 거기에는 고등학생 특유의 ‘애국심’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판타지 소설을 ?호쿇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교훈이나 삶의 지혜” 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가즈나이트』를 가장 좋은 책으로 꼽은 고등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지는 몰라도, 나는 교훈과 삶의 지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지식과 함께 소위 ‘교훈과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터득하는 주체’로 간주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는 ‘미성년’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태도와 상관적인 것이 청소년기가 갖는 문제적 위상이다. 프랑수아 스퀴텐과 브누아 페테르스의 그래픽 노블 대작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에 나오는 한 주인공처럼 청소년은 ‘기울어진 신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어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작용하는 것은 ‘또 다른 중력’이다.


“선생님, 좋은 책 좀 소개해주세요”라고 달라붙지만, 한편으론 “내가 읽을 책을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 청소년들의 또 다른 계산 아닐까. ‘책따세’를 주도하고 있는 허병두 교사가 『푸른 영혼을 위한 책읽기 교육』에서 털어놓고 있는 경험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 국어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읽을 만한 책을 자주 소개해주지만 나중에 점검해보면 정작 책을 찾아 읽는 아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 “왜 아이들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고서 정작 찾아 읽지는 않는 것일까”란 것이 허 교사의 의문이었다. 거기서 그는 교사들이 제시하는 일방적인 추천도서 목록이 학생들의 정서적?심리적 상황을 고려하는 데 미흡했다는 자각으로 책 소개또한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지적 수준, 그리고 청소년기의 특성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상황별 권장도서목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더 관찰해볼 일이다.

다만 나로선 ‘보다 효과적인’ 권장도서목록을 제시하는 것과는 별도로 ‘권장도서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서 한 번쯤 의문을 품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 교사는 “‘청소년 도서’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는 반문에 대해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하는데, 사실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자면 ‘과연 이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한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허 교사가 드는 사례이지만, 가령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이 훌륭한 문학작품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등장인물인 술집작부 백화의 “내 배 위로 연대 병력이 지나갔어”라는 대사 때문에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점을 고수하는 교사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때 가능한 태도다. ‘교육의 대상’이란 돌봄의 대상이면서 훈육의 대상이다.아직 자립적인 사고와 판단능력이 부족하기에 적극적인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라고 따져 묻기 전에 궁금한 것은 과연 ‘통제’가 가능한 것인가이다. 과거 노출 수위가 높은 장면들만 ‘가위질’하고 상영하던 영화들처럼, 문제가 될 만한 대사와 장면을 삭제한 ‘안전한 문학작품’들만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가능할까? 학생들은 청소년 권장도서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 대다수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는 「삼포 가는 길」을 과연 읽지 않는것일까? 사실 술집작부의 말보다도 청소년들에게 더 유해한 것은 ‘스폰서 검사’ 스캔들, 곧 일부 검사들에 대한 향응과 성접대 관련 보도이지 않을까? 더구나 전자가 픽션이라면 후자는 TV뉴스에 ?오는 현실이다. 초등학생 납치?성폭행과 여중생 성폭행?살해사건 등은 또 어떤가? 참혹한 국지전의 참상과 난민들의 기아를 보여주는 국제뉴스들은 어떤가? 너무나도 유해할 듯한 이런 ‘현실’을 과연 청소년들로부터 완전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지? 그러니까 ‘청소년 권장도서’를 제시하는 기본 취지에 대한 동의 유무와 무관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실효성이다. 그런 문제? 대한 고려 없이 ‘청소년 권장도서’의 의의를 강변한다면 그건 권장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 이전에 ‘알리바이’ 같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만큼 애쓰고 있지 않느냐는 알리바이 말이다.


허병두 교사가 “두 번 세 번 고민하여,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법한 책들”이라고 고른 책 가운데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포함돼 있는데, 사실 국내에서는 많은 청소년 권장도서목록에 포함돼 있지만 미국에서조차도 일부 학교에서 한때는 ‘금서’로 지정됐던 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제아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집에 돌아오기까지 2박3일 동안 겪은 방황을 그려낸 소설”이다. “이 땅의 10대들도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로 공감할 이야기”라고 허 교사는 추천이유를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호텔에 투숙한 홀든이 엘리베이터 보이의 꼬드김으로 창녀와 하룻밤을 보낼 뻔한 장면도 나온다. 또 가장 자상한 조언을 해준 선생님을 잠자고 있는 자신을 성추행하려는 ‘변태’로 오인하고 급하게 도망가는 장면도 들어 있다. 공감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10대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는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이 작품이 ‘청소년 권장도서’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다른 한편으로 ‘권장도서’의 힘과 의의를 승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권장도서이거나 아니거나’가 아닐까. 그것이 학생들의 독서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이란 건 지극히 미심쩍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 영향이 권장도서를 둘러싼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나 입시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학생들과는 무관해 보인다.

청소년 권장도서가 ‘섬기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기 독서가 교육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겠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오토 볼노브가 『실존철학과 교육학』에서 제시한 견해를 빌리자면, 원래 수공업적 작업에서 ‘재료의 가공’이란 뜻으로 사용되던 라틴어 ‘formatio animae’의 독일어 번역이 ‘빌둥(Bildung)’이었다. 우리말로는 ‘교육’ ‘교양’ ‘도야’ 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한 기원적 의미를 갖는 교육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기계적인 이해로, 교육을 외부로부터의 기계적인 주조로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적 이해로, 교육을 내부로부터의 유기체적인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서로 상반되는 듯싶지만 이 두 가지 교육관은 인간의 ‘가소성’을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연속적인 형성이든 혹은 연속적인 발달이든 간에 두 경우 모두 점진적으로 인간의 교육을 성취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육관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연속성과 가소성에 기반한 인간관은 공통적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인간관도 엄연히 가능하며 또한 존재한다. 가령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근본적으로는 어떤 연속적인 삶의 경과도 있을 수 없다. 점진적인 발전이란 없으며 어느 한순간에 집결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비약이 있을 뿐이다.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뭔가를 형성해갈 수 있다는 ‘가소성’을 전제하지만, 실존철학은 그러한 가소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창하게 실존적인 인간학까지 꺼낸 것은 권장도서의 이데올로기가 전제하는 것 역시인간의 가소성이 아닌가란 판단 때문이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제 때 에 잘 먹은 학생들의 영양이나 성장이 좋은 것처럼 주위에서 어떻게 돌봐주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독서의 경우라면, 학생들은 ‘재료’가 아니다. 권장도서의 조합으로 우리는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독서의 효과다. 독서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란 진술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자학적 페시미즘이 시작부터 도드라진다. 그리고는 ‘의식 자체가 병’이라는 결론까지 도출해낸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더라도 이런 작품은 가뜩이나 자의식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래서 이시이 요지로라는 도쿄대 교수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 15권’에 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일반론이며 모든 독서는 특수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불온한’ 혹은 ‘유해한’ 책이라는 데 현혹되어 또 이 작품을 읽으려는 청소년들이 반드시 있다. 대부분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집어던지겠지만 한둘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입문’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걸 경험할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를 재조정할 수도 있다. 독서는 그런 것이며, 그것이 또한 독서의 힘이고 본성이다. 그러니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건 권장도서로도 역부족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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