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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청소년

타자의 헌법이론을 지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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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론가로서 자유민주주의가 난파하는 지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청소년 문제를 지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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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론가로서 자유민주주의가 난파하는 지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청소년 문제를 지목하곤 한다. 청소년 문제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을 만큼 고질적인 사회문제지만, 자유민주주의는 그 문제의 문제‘성’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까지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나 자신 역시 청소년기의 자녀를 둔 대한민국의 아버지인 까닭에 ‘항상 공부하라! 쉬지 말고 공부하라! 범사에 공부하라!’는 훈계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눈을 내리깔고 그 훈계를 듣는 중학교 3학년짜리 큰아이 앞에서 실제로 내가 노심초사하는 것은 그가 눈을 치켜뜨고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사태이다. 자유의 논리에 의존하든, 민주의 논리에 의존하든, 아니면 그 모두에 의존하든, 만약 그가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에 의존하여 반론을 제기한다면, 바로 그 순간 나는 깊디깊은 논리적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잘 드러내듯,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정치원리의 결합으로 탄생한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 두 가지 정치원리는 서로에게 모순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일 경우도 있다(자유민주주의의 패러독스!). 자유주의는 개인을 우선시하는 논리이고,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논리이다. 전자는 관용, 곧 똘레랑스를 확대하고 또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고, 후자는 자치의 실현, 곧 정치적 책임의 구조를 확립할 것을 주장한다. 자유주의가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며 다원성을 지향하는 논리라면, 민주주의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이며 일원성을 지향하는 논리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모순을 접목하여 조화시키려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 존재한다. 양자 사이에서 세계관적 타협을 확보하고 그 타협을 정치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청소년 문제 앞에서 난파한다. 우선 자유주의의 숭고한 이념에 따르면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유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점과 관련하여 성인의 자유와 청소년의 자유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목적으로서의 자유 그 자체에 관해서 성인의 자유와 청소년의 자유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목적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는 점뿐이다. 다시 말해, 성인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온전한 능력이 있고, 청소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 문제 앞에서 자유주의는 목적의 논리가 아니라 능력의 논리로 탈바꿈한다. 그것도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에 더욱 집중하는 진면목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청소년과 성인의 능력의 차이를 증명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유할 능력, 즉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능력에 있어서 어린이와 성인의 차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청소년과 성인의 차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신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포괄하여 성인보다 나은 청소년들도 심심치 않게 있고, 청소년보다 못한 성인들도 수두룩한 까닭이다. 어린이의 경우와 달리 성인에 비하여 청소년의 능력이 미약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생각만큼 용이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힘을 빌린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힘을 합쳐서 성인과 비(非)성인, 즉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교한 뒤,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능력이 미약하다는 점을 확정적으로 선언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민법 제4조 이하가 규정하고 있는 미성년자에 관한 법적 규정들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관련 민법 조문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성년에 이르지 못한 시민(어린이와 청소년)은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 즉 ‘심신이박약한 성인’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청소년은 ‘심신이 박약한 성인’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민법 조문들은 성인 전체와 청소년 전체를 능력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집단과 집단을 비교하는 것은 과연 자유주의적인가? 자유를 근본적으로 목적의 논리이자 그 목적의 주체인 개인의 논리로 이해한다면, 성인 전체와 청소년 전체의 능력을 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소년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여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청소년 전체의 능력이 성인 전체의 능력보다 열등하다고 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능력을 지닌 청소년 개인의 자유가 제약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성년자에 관한 법적 규정들은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 문제제기를 ‘민주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민법은 시민들의 선거로 구성된 국회의 입법권 행사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여기서 ‘민주적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엄격히 말해서, ‘성인들 사이에서만’이라는 뜻이다. 즉 (어린이와) 청소년 전체를 ‘심신이 박약한 성인’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하는 이 법률은 (어린이와) 청소년 전체를 배제한 가운데 오로지 성인들 사이에서 민주적으로 입법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률은, 적어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관한 한, 민주적 정당성을 완전하게 주장하기 힘들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스스로 동의한 적이 없는 법률에 의하여 ‘심신이 박약한 성인’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청소년 문제 앞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어김없이 난파한다. 자유주의도 주저앉고,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청소년 문제 앞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능력의 관점에서 자유를 이해하는 논리로, 그것도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를 옹호하는 논리로, 나아가 시민 전체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인들만의 민주주의를 전제하는 논리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솔직히 말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한 뒤 그들을 딛고 서는 성인들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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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앞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난파한다고, 청소년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야 하는가? 나는 청소년 문제가 헌법이론가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도록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성인들만의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한계를 딛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빠짐없이 포괄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바깥을 사유해야만 한다. 이하에서 나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중학교 3학년짜리 큰아이와의 대면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바깥에 관한 사유의 모험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동일자 속에서 타자가 탄생하는 철학적 기적의 가능성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우선 중학교 3학년짜리 큰아이를 마주한 아버지가 좌초한 자유민주주의자라는 설정에서부터 출발하자. 커다란 목소리로 큰아이를 불러세워 훈계를 시작한 순간,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모든 타인을 자유와 민주의 관점에서 대우해야 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서 이탈했음을 알게 된다.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으며,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할 동등한 지분을 가진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명제가 포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는 아들과 비대칭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는 지배하고 아들은 지배를 받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고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들의 자리는 자유민주주의의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이다. 그렇다면 이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부딪히게 되는 진실은 무엇인가? 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의 각도가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고 싶다. 아버지는 새삼스럽게 아들이 많이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입술이 파묻히도록 뽀뽀를 해주던 그 볼살에 울퉁불퉁한 여드름 자국과 거뭇거뭇한 구레나룻이 비칠 만큼 아들은 이미 아버지만큼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버지의 뱃속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그것은 ?엇인가? 어떤 두려움? 또는 위협감?

반짝이는 눈과 귀여운 미소로 귀를 기울여주던 어린이 대신, 지금 아버지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불쾌한 분위기를 풍기며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낯선 사내이다. 내가 낳고, 내가 길렀던, 나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던 그 어린이가 있던 자리에 도저히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은 타자(他者)가 두렵게도 위협적인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이 낯선 타자의 발견과 함께 아버지는 아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는 자, 즉 타자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가 그 시선 속에 아들을 지배할 수 있듯이, 아버지를 바라봄으로써 아들 또한 그 시선으로 아버지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태를 진심으로 회피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이 사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지, 사르트르가 말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가 자유를 상실하고 지배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처럼 아버지를 위기로 몰아가는 타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타자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아들은, 특히 언제나 내 품을 찾아드는 사랑스런 어린 아들은, 완벽하게 나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런 뜻에서 아버지에게 아들은 원래 타자였던 아내나 여전히 타자인 친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아버지라는 동일자의 세계에 있는 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기의 소유이며,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자신이다. 바로 여기에 아버지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대면의 본질이 있다. 아버지에게 그것은 자기의 소유이며,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자신인 그 아들이 타자로 돌변하는 반란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동일자 속에서 타자가 탄생하는 철학적 기적의 가능성은 이처럼 반란의 형태로 도래한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긴급권을 행사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부라리며, 강력한 훈계와 함께 온갖 꾸지람을 늘어놓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 자신이 여전히 아들의 주권자임을 선언하고 선포한다. 긴급권의 행사와 형태는 정반대지만 내용은 전혀 동일한 또 하나의 방식은 아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버지와 하나였던 시절의 행복감을 되살리는 것이다. 전자가 채찍이자 징벌이라면 후자는 당근이자 호소인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아버지라도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들이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아버지는 자유를 상실하고 지배당하는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타자의 시선을 거부하기 위해 관계를 단절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선택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대면의 해결과정에서 관계의 단절이나 폭력의 선택은 자발적으로 금지되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든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타자는 원래부터 타자인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 타자, 즉 아버지의 아들인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대체로 마지막 수단을 동원한다. 목소리를 거두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면서, 그는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자책이 결코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아들이 들으라고, 자신을 책망한다. 너의 너됨이, 잘난 것만이 아니라 못난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이 모두 나 때문이라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호소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수단은 아버지라는 동일자가 내놓을 수 있는 최후의 울부짖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아들의 복종을 요구하는 일종의 매저 사디즘이다.

그러나 결국 매저사디즘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대면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달리 말해 자기의 소유로부터, 자신의 분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들을 해방시키는 것뿐이다. 이 해방 선포가 지체될수록 아들의 반란이 거세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동일자 속에서 타자가 탄생하는 철학적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 는 한, 중학교 3학년짜리 큰아이와의 비대칭적 관계는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어린 아들을 소유한 동일자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는 타자로서의 아버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청소년 문제는 헌법이론가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그 바깥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사유의 모험은 청소년기에 이른 아들과의 관계에서 모든 아버지가 경험하는 것과 같다. 두려움과 위협감, 채찍과 당근, 그리고 매저사디즘을 통과한 뒤에 아들의 해방을 선포함으로써 아버지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된다. 아들을 소유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인 아버지! 진정한 아버지로의 재탄생을 머뭇거리는 한, 청소년 문제 앞에서 난파한 자유민주주의는 복원될 수 없다.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인 ‘낯선 이’와 관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마치 내가 쓴 시나 내가 만든 물건처럼 그렇게 단순히 나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들의 타자성은 다른 자아(alter ego)의 타자성이 아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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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연구자들의 업적을 검토해보면 대한민국 청소년법제의 역사는 크게 4~5기로 구분된다. 각종 일반 법령에 청소년을 포함한 미성년자 관련 법규가 산재해 있던 1960년까지가 그 여명기라면, 최초의 청소년 관련 법률인 미성년자보호법, 아동복리법 등이 제정된 1961년부터 1977년까지를 1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재건과 경제개발을 내세운 군사정권의 국정지표 아래서 청소년정책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청소년에 대한 규제 위주의 보호정책이 법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2기는 1977년에서 1990년까지로 국가재건과 경제개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보호와 규제 위주이던 청소년정책에 육성 부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청소년대책위원회가 출범한 이후(1977) 범정부적인 청소년대책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청소년육성법(1987)이 제정되고, 청소년 전담 행정기구로서 체육청소년부가 창설되기도 했다.

3기는 1990년에서 2000년까지로 대한민국 청소년헌장이 제정된 때부터 그 연장선에서 규제와 육성의 균형을 잡기 위해 청소년육성법을 폐지하고 청소년기본법을 제정했다가(1991) 다시 보호와 규제의 관점이 강조되어 청소년보호법(1997)과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2000)이 제정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한국사회의 자율화와 물질만능주의 경향을 이유로 성장 과정에 있는 청소년을 각종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다시금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4기는 2000년 이후 현재까지로, 청소년보호법 등이 취하고 있는 새로운 보호주의적 입장에 대하여 비판적 문제제기가 거듭되면서 청소년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재조명이 시도되고 있는 시기이다. 토론의 초점은 청소년보호를 위하여 청소년을 유해환경으로 이끈 성인을 처벌하는 청소년보호법 등의 접근방식이 청소년인권의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주어져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4년 이후에는 청소년 복지지원법, 청소년 활동진흥법이 제정되었고, 청소년 담당 행정기구인 청소년위원회의 명칭도 ‘국가청소년위원회’로 바뀌었으나, 청소년보호법 등은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그 개정의 방향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신기하게도 대한민국 청소년법제의 역사는 좌초한 자유민주주의자 아버지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대면에 관한 위의 철학적 분석과 상당히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우선 1기는 갑자기 자신만큼이나 커다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몸을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두려움 또는 위협감과 상통한다. 그 두려움과 위협감은 아들의 보호를 위해 아들의 몸을 규제하는 아버지의 긴급권 행사로 이어진다. 2기는 그러한 규제가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 이후 아버지의 대응이다. 일방적으로 아들의 몸을 규제하는 것보다 그 아들의 몸을 아버지가 바라는 방향으로 육성하겠다는 적극적 개입, 즉 당근과 호소의 정책이다. 3기는 당근과 호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의 기본적 지위를 법제화하려다가 그로 인해 아들이 그 법률을 자신에게 강요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아버지가 알게 된 시기이다. 자유를 상실할 위기에 몰린 아버지는 당근과 호소를 계속할 수도 없고, 채찍과 징벌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청소년법제의 역사에서 4기를 대표하는 법률은 청소년보호법이다. 이 법률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과의 대면에서 좌초한 자유민주주의자 아버지가 동원하는 마지막 수단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기에 청소년보호법은 40여 년에 걸친 청소년법제의 역사를 함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하여 청소년의 몸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에게 유해매체물, 유해약물, 유해물건 등을 제공한 성인을 처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것은 아들의 반란에 직면한 아버지가 마지막 수단으로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들의 못남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들은 여전히 자신의 소유일 수밖에 없다고 강변하는 일종의 매저사디즘이 청소년보호법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된 이래 한국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토론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청소년보호법의 저변에 흐르는 매저사디즘이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지가 논란의 초점이다. 이 글의 첫 장에서 결론 내렸듯이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토론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청소년을 유해환경에서 보호하는 것이 중대한 공익적 목표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을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자유를 능력의 차이로 탈바꿈시킨 뒤 성인들만이 결정권을 독점하는 기본 논리가 그대로라면, 청소년보호법 앞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난파한다는 결론이 달라지기는 어렵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청소년을 배제하는 청소년보호법의 의도를 꿰뚫어본 일부 지식인들은 입법 초기부터 주목할 만한 비판을 거듭 제기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비판이 지금도 대단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처벌되거나 처벌의 위협을 받는 것은 성인이지만 이로 인하여 원하는 표현물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바로 청소년이다. 표면적으로는 성인의 권리를 제한하지만, 실질적 내용은 청소년의 ‘볼 권리’ ‘들을 권 리’ ‘읽을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이다. 청소년보호법의 일차적 존재이유는 청소년을 통제하고 격리하고 억압하는 데 있다. 청소년보호법은 그 이름과 달리 청소년을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청소년을 ‘배제’하는 법인 것이다. “학생은 공부만 하면 돼!” 이 한마디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청소년관이 청소년보호법에 고스란히 침윤되어 있다.” (김도현, 『청소년보호법의 이념과 현실-‘배제’에서 ‘대화’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바로 이 점에서 ‘보호’의 대상이 되는 청소년은 대상화, 객체화되어버린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욕과 감정과 감각은 그들의 위치에서 이해되고 또 규율 혹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성인의 관점에서 그 성인들이 처하고 있는 사회구조를 그대로 떠맡게 되는,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 청소년 ‘보호’는 결코 보호일 수 없는 것이다.” (한상희, 이경, 『법과 일상생활의 문화비평적 재구성-‘몸’ 담론 분석을 통한 생활정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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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청소년보호법의 개정방향을 두고 벌여온 뜨거운 토론은 매저사디즘에 기대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 아버지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벌이는 힘겨루기와 같다. 이 힘겨루기의 결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주지하듯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호소가 먹혀들어 아들의 복종이 유지되든지, 아버지가 전격적으로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든지. 그런데 최근의 추세는 전자의 선택을 넘어 아들의 몸에까지 규제를 가하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흐름이 역력하다. 밤 12시 이후 온라인게임을 금지하는 ‘강제 셧다운제’와 같이 청소년의 자유와 권리를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가까스로 아들의 반란을 진압한 아버지가 다시 주권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노욕(老慾)을 불태우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향은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의 난파를 더욱 심화시키는 퇴행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러한 퇴행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시급하게 시작해야 할 일은 청소년 문제 앞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난파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작업이다. 청소년 문제, 즉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는 자유민주주의 속에서 해결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한 뒤 그들을 딛고 서는 성인들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 문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정초하는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앞서 강조했듯이,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되는 방식, 다시 말해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동일자에서 타자가 탄생하는 철학적 기적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일단 청소년 문제에 관한 두 가지 기본적인 해결책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는 가능한 한 성년연령을 낮추되 그 중에서도 특히 선거권부여연령을 더욱 하향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20세(민법), 19세(청소년 보호법, 공직선거법)로 사실상 이원화되어 있는 성년연령을 통일할 필요에 얽매이기보다는, 그 가운데 선거권부여연령이 ‘동의에 의한 지배(rule by consent)’를 성취하는 데 관건이 된다는 점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비하여 청소년의 지적 수준과 정신적 성숙도가 현저하게 높아진 현실을 감안할 때, 선거권부여연령을 18세까지 낮추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주의할 것은 이처럼 18세부터 선거권을 부여할 경우, 예컨대 주류, 유해매체 등에 관한 접근기회를 입법을 통하여 상향조정하더라도 헌법논리로는 오히려 정당화하기가 용이해진다는 점이다. 적어도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에게 그것은 ‘동의에 의한 지배’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년연령, 특히 선거권부여연령을 하향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관점에서도 비슷한 노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둘째로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청소년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취급하여 청소년 전체와 성인 전체를 비교하는 기본전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재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미성년자제도를 어린이와 청소년의 구분에 입각하여 청소년에 관해서는 독립적인 의사표시 능력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법정대리인의 개입을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과 같은 방안들을 하루바삐 공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제안들이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청소년 문제 앞에서 난파한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민법상의 미성년자제도 역시 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저사디즘에 입각한 청소년보호법 또한 쉽사리 폐지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청소년 문제는 언제까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난파시키는 헌법이론의 블랙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나 알고있는 공개된 비밀 하나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소년 문제 앞에서 어김없이 난파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가 끊임없이 그 바깥으로부터 다시 정초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정치적 현안으로서 청소년 문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그 문제를 책임지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이 그렇듯이 청소년 문제는 대체로 성인들에 의하여 공론화되곤 한다. 예외적으로 청소년들 자신에 의하여 문제화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역들은 성인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언제까지라도 청소년으로 남아 청소년 문제를 책임지는 피터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은 한편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성인들만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청소년 문제를 도외시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성인들의 입장에서 청소년 문제는 어찌되었든 시간만 끌면 관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그 바깥으로부터 정초하는 것이 이념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구든 시간이 지나면 청소년을 지나 성인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아버지는 끝내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채찍과 당근, 그리고 매저사디즘도 도저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무용(無用)한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섭리(攝理), 즉 세월의 힘을 빌려 모든 아버지를 아들의 타자됨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아버지로 만들어가는 오묘한 이치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다. 만약 세월이 흐르지 않아 어제의 청소년이 오늘도 여전히 청소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어떤 논리로 성인들만의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가 난파를 면할 수 있? 것인가?

동일자 속에서 타자를 탄생시키는 아버지와 아들의 철학적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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