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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것을 상상한 청소년의 최후는…

‘캐발랄’ 청소년, 금지된 것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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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한번 해볼까요? 다음에 설명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 우리는 이름표가 박힌 거무튀튀한 작업복을 입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매일 집을 나섭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죠. 그곳을 지키는 분들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 집단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일 겁니다.
● 우리를 거리에서 보려면 아주 이른 아침이나 아주 늦은 밤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광을 와서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는데, 그건 주로 낮 시간에 우리를 찾기 때문이죠.
●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30여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외입니다. 다들 밤에는 위험하다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자정이 넘어 학원에서 나오는 우리를 보고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겐 미숙하다, 충동적이다, 판단력이 흐리다, 쉽게 휩쓸린다, 싸가지 없다, 무섭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등의 나쁜 꼬리표가 주로 붙어 있습니다. 이런 얘기만 계속 듣다보니 우리도 정말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 다른 사람은 집을 나와 새 둥지를 마련하면‘ 독립’이지만, 우리가 그렇게하면‘ 비행’이라고 불립니다.
● 휴대폰을 마련하든, 소송을 하든, 셋방을 구하든, 일자리를 구하든, 뭘 하려면 부모나 다른 누군가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법률 무능력자’라는 말이지요.
●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비교적 가벼운 벌을 줍니다‘. 미숙하고 무능력한’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는 강력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지요. 권리가 없는 대가로 주어진 유일한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 대신에 우리가 심한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아도 가해자를 처벌하기 힘듭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폭력은 대개 잘 드러나지 않거나 폭력이라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대개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사랑이나 교육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도 무릎 꿇고 반성문을 쓰지는 않습니다. 법에 따라 처벌을 받고 고개를 숙일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 가야 하는 곳에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반성문을 써야 할 처지에 자주 놓입니다.
● 우리는 한국에 사는 사람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선거권을 포함해서 아무런 대표권이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늘 우리를 대리해주지요.
● 우리가 누구랑 살고 싶은지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랑 살고 싶은지 또는 사는 게 좋은지만 주로 고려되니까요.
●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누군가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삽니다. 그 사람이 주는대로 감사히 받고 한 달 살림을 빠듯하게 맞춰 살아야 하지요.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돈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자연스레 보게 됩니다. 돈 앞에 비굴해지는 것이지요.
● 우리가 일자리를 얻으면 똑같은 일을 하고서도 적은 돈을 받습니다. 그러고도 감사한 줄이나 알라는 식의 대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문제는‘ 실업문제’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 우리 중에는 정말 자살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스무 명에 한 명꼴로 실제 자살을 시도해본 적이 있고, OECD 국가 중 우리들 자살률이 1위라고 합니다.

몇 가지 힌트만 보고도 쉽게 정답을 떠올렸을 겁니다. 정답은 바로 청소년이지요. 청소년의 삶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유쾌한 것보다 꿀꿀한 것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 누군가에게 의존 또는 속박당해 사는 존재, 현재를 빼앗긴 채 미래만을 위해서 준비하고 훈련받아야 하는 존재, 권리는 없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있는 존재가 바로 청소년입니다. 인권은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말합니다. 사람에게 인권이 필요한 이유는 누구나 존엄하고 자율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면 누구나 인권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인권의 보편성(universality)은 청소년의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 청소년에게는 인권이 쉽게 부정될까요? 청소년과 인권이 만나면 도대체 어 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제부터 그 비밀의 방 안으로 들어가봅시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

2009년 9월 동방신기 멤버들이 소속사와의 전속계약이 가진 불공정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을 때, 동방신기 팬클럽은 ‘그들은 원숭이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한겨레」에 실었습니다. 소속사가 강요한 계약은 동방신기를 동물원 원숭이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동방신기의 문제제기는 인격권과 의사결정권, 곧 ‘사람’이 되기 위한 싸움이라는 ‘개념 찬’ 해석을 내놓은 것이지요.

「한겨레」 2009년 9월 10일자 1면 광고. 동방신기 팬 사이트 ‘동네방네(//dnbn.pe.kr)’를 중심으로 팬들의 광고비 모금운동이 진행됐다.

1987년은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함성이 크게 울려퍼진 해였습니다. 일반시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포함하여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했고,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건설을, 학생들은 민주적 학생회 건설을 소리 높여 외쳤던 해였지요. 그해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첫 민주노조를 건설했을 때 공장 안에서 시급히 개선돼야 할 과제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노동자들이 1순위로 꼽은 것이 바로 ‘두발자유’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장노동자들에게는 두발통제가 있었고 공장문 앞에서는 관리자들이 바리캉을 들고 단속을 벌였다고 해요. 노동자들이 임금인상도 아니고 두발자유를 제일 먼저 요구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군대나 다름없는 통제와 핍박에 내몰렸던 노동자들에게 공장문 앞에서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은 단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굴종과 체념, 억울함, 그 모든 것들의 상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자기 머리카락 하나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사람에게 무슨 인격과 자율성이 있었겠습니까? 노동자로서 정당한 자기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먼저 동물이 아닌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청소년도 인간이다!” “청소년에게 모든 인권을!”이라고 외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청소년의 삶을 동물의 삶에서 사람의 삶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금지된 것을 상상한 청소년, 무슨 일이 생겼나?

청소년의 인권현실이 어떠한지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한 고등학생이 복도를 지나다 몽둥이로 체벌을 가하고 있는 교사를 목격했습니다. 학생은 교사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붙잡고 “선생님, 그만하십시오”라고 말했지요. 그 학생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학교는 그 학생을 곧장 퇴학시킵니다. 교사의 정당한 지도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지요. 사회는 폭력이 나쁘다고 가르칩니다. 힘센 학생이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장면을 반 친구들이 둘러서서 구경만 한 사실이 알려지면, 모두들 청소년들의 폭력불감증을 탓합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 폭력을 중지시킨 이 학생에게는 퇴학이라는 중징계가 돌아왔습니다. 법률도, 사회통념도 교사에게 학생을 때릴 권리를 인정해주고 있는데다 학생이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한 학생은 학교의 두발규정이 왜 필요한지, 인권을 제한할 만큼 중대한 사유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납득할 만한 대답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학교에 다니는 한 학교가 정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정한 민주적인 규정이니 따라야 한다는 억지답변이 전부였습니다. 학생답다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인지,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수업에 정말 방해가 되는지,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두발의 자유라는 인권을 제한할 만한 이유가 되는지, 학교운영위원회에는 학생대표도 들어가지 않는데 과연 민주적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그 학생은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정당한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자기 존재를 걸고 두발규정의 정당성을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아온 반응은 묵살 아니면 ‘학생이 멋이나 부리려 한다’는 비아냥거림뿐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단속에 걸릴 때마다 벌점을 받아야 했고 결국 교내봉사에 이어 사회봉사 처분이라는 징계까지 받게 됐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학교에서는 ‘순종 천국, 반항 지옥’의 권위주의적인 통제질서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의 학교에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자의적인 기본권 제한이 넘쳐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일제고사 부활, 고교선택제 도입, 특권형 자율학교 지정 등 더욱 살벌해지고 있는 입시전쟁은 청소년을 한낱 상품으로 취급하면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우울증, 정서장애 등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청소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청소년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학교의 폭력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 민법에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를 청소년의 인권보다 절대적 우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반면 친권의 횡포에 맞서 청소년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구체적 권리는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가족 안에서는 자녀 사랑과 양육, 보호 등의 이름으로 청소년의 현재를 속박하고 진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부모의 ‘폭력’이 흔히 일어납니다. 일상 곳곳에서 청소년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가 결정권을 갖습니다. 부모의 자녀 보살핌은 대개 헌신과 사랑에서 비롯되지만, 헌신과 보호가 넘쳐나는 만큼 자녀의 성숙은 지체되는 결과를 빚습니다. 한 학생이 학교수업이 끝나고 한 단체에서 마련한 청소년 독서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에 빠지려면 부모님 동의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했습니다. 부모님께 말씀드려보니, 보충수업을 듣든가 학원에 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그 학생은 결국 무단으로 보충수업을 빠지면서 독서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러자 부모님은 용돈을 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독서모임을 포기해야 했지요. 또 한 학생은 강제이발과 체벌을 수시로 행하는 교사를 처벌해달라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일방적으로 민원을 철회해버렸습니다. 행여 자식이 학교에 찍혀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했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자기와 친구들의 인권문제를 공식해결하고자 했던 청소년의 의사는 부모에 의해 사뿐히 무시되었습니다.

일부 기독교에서 선교를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로 활용하고 있는 ‘입양선교’ 역시 부모와 청소년 사이의 불평등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입양선교란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의 어린아이들을 입양한 후 양부모가 그 아이를 선교사로 길러 그 지역으로 다시 파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선교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현지 아이를 입양해서 선교사로 만드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그 아이가 정말 선교사가 되고 싶었는지, 양부모가 믿는 종교를 정말 믿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아이가 양부모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 장래를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이 ‘제노사이드(Genocide)’의 한 형태로 활용된 선례들도 많습니다. 제노사이드는 어떤 민족이나 집단의 절멸(絶滅)을 목표로 자행되는 살해행위입니다. 생명을 직접 빼앗기도 하지만, 후세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문화를 말살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호주로 이주해온 백인들이 원주민의 자녀를 백인가정에 입양해 원주민의 문화를 뿌리 뽑고자 했던 일이 대표적이지요.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독재 정권이 민주화 운동가의 자녀들을 빼앗아 협력자의 가정으로 입양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정권의 협력자에게 일종의 선물을 주고자 했던 의도도 있겠지만, 협력자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장차 정권협력자로 성장할 거란 기대도 있었을 겁니다. 이 모두가 청소년이 독자적인 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속박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활용한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청소년의 인권문제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사건’을 구성하지도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토록 청소년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낮은 이유는, 청소년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인권이 정당한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를 살펴보고, 그 지배적인 관점이 과연 정당한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을 바라보는 인식의 프레임

미니스커트 단속 사진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는 학생, 회사원,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남성을 대상으로는 장발 단속이, 여성을 대상으로는 치마 길이 단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의 미니스커트 단속을 어떤 문제로 바라봐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사람이 사람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모호해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부분적 진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왜 남성의 머리 길이는 짧게 하지 못해 안달했던 국가가 여성의 치마 길이는 길게 하지 못해 안달했는지를 전혀 말해주지 못하니까요. ‘남성적 국가’가 여성의 인권, 그중에서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말해야 진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학교 도덕교과서에서는 이 장면을 터무니없이 ‘세대갈등’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 장면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frame), 해석의 틀에 따라 진실이 가려지기도 하고 진실의 일부만 포착되기도 합니다. 인식의 프레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회집단을 바라보는 인식의 프레임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달라지니까요.

촛불소녀 코리아(//cafe.daum.net/candlegirls)

‘보호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을 옥죄는 대표적인 인식의 틀입니다. 청소년은 위험에 처하기 쉬운 약자이기에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관점이 바로 보호주의지요. 이 틀에 따르자면 청소년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힘이 없는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촛불소녀’를 아시나요?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결정나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2008년 한 해를 불태웠던 그 촛불집회의 상징이 바로 촛불소녀였습니다. 당시 위험에 빠진 건강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촛불을 켜든 이들이 바로 10대 여성이었기 때문에 촛불소녀가 촛불집회의 상징이 되는 건 당연했지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고 쓰인 피켓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교장의 부름 없이도 연단에 올라가 재기발랄한 연설을 토해냈던 청소년들,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우리가 두렵지 않느냐!’는 으름장으로 정부를 추궁했던 당당한 청소년들의 모습은 차차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밤 10시가 되면 ‘청소년의 귀가’를 외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촛불의 주역으로, 재기발랄한 정치적 주체로 청소년이 등장하는 순간,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촛불 바깥에서도 청소년 보호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보수논객으로서, 촛불집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조갑제 씨는 ‘서울 광화문을 청소년 통행제한구역으로 정하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내놓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청소년은 판단력이 없는 미숙한 존재라는 인식, 그리고 사회가 있으라고 명령한 곳을 이탈한 청소년을 낯설고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대리주의’도 한몫 거듭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대신 결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에게는 투표권이 없습니다. 학교의 교칙을 결정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 교사 대표와 학부모 대표는 들어가도 학생 대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보충수업을 빠질 때도, 학교수업 대신에 체험학습을 떠나는 순간에도 청소년 당사자가 아니라 보호자의 동의여부를 묻습니다. 그런데 과연 청소년은 스스로 판단내릴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일까요? 생물학적 나이로 20살이 되는 순간 사람은 갑자기 성숙한 인간으로 돌변하는 것일까요? 삶의 전 과정이 성숙을 향해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모든 사람은 늘 어떤 점에서는 미성숙하지 않을까요?

위의 포스터는 2008년과 2010년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 비공식 출마한 ‘기호 0번 청소년 후보’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이 청소년들은 당돌하지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대다수 청소년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육정책인데, 교육 대통령이라 불리는 교육감을 뽑는 선거에 청소년은 왜 참여할 권리가 없냐는 것이지요. 더 이상 ‘자비로운 어른’에 의해 대리되는 존재로만 만족하지 않겠다, 아무리 좋은 주인님을 모신다 해도 노예는 노예에 불과하다, 현장경험 풍부한 청소년이야말로 자기에게 좋은 교육정책이 무엇인지 가장 잘 판단할 힘이 있다, 당사자인 청소년을 빼고 치러지는 교육감 선거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당선시킨다고 해도 반쪽 선거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보호주의와 대리주의라는 인식의 프레임 밑바탕에는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이 깔려 있습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오늘의 권리, 지금 바로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은 ‘유예’되어야 하고 성숙한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들의 ‘훈육’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속박해야 하는 유예의 삶, 스스로 결정하고 타인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기보다 힘을 쥔 타자에 복종해야 하는 삶이 의무로 주어져 있기에 청소년의 인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권을 빼앗긴 자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이리스 마리온 영(Iris Marion Young)이란 사회학자는 『정의 그리고 차이의 정치학』(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이라는 책에서 인권을 빼앗긴 소수자들이 겪게 되는 억압을 유형화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이 없는 존재이고,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배제?분리된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포획되어 대상화되기 쉽고, 그들이 수행하는 일은 가치절하되어 있으며,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이지요. 아이리스 마리온 영이 제시한 억압의 양태에다 청소년의 삶을 대입해보면 기막히게 맞아떨어집니다. 청소년은 정치적 힘이 없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좀체 들리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집, 학교, 학원만을 오가면서 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고, 주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청소년에게는 미성숙하거나 위험하거나 충동적이라는 집단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어 한 사람의 잘못도 청소년 전체를 위험집단으로 부상시키는 이유가 되곤 합니다. 청소년의 학습노동은 대가를 지불받고 수행하는 사회적 기여로 평가되지 못하며 아르바이트 현장에서도 청소년의 노동은 값싼 노동으로 취급받습니다.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나 학대는 부모나 교사의 사랑이나 열정적 지도로 둔갑해버려 근절되지 않습니다. 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덮어버리는 불평등이 청소년의 삶에 가로놓여 있는 셈이지요.

청소년이 이와 같은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격과 자율성을, 인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소년을 옥죄고 있는 지배적인 인식의 프레임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핵심은 ‘미성숙의 신화’를 벗겨내는 일입니다.

세상을 뒤집는 질문, ‘미성숙하다’와 ‘미성숙해지다’의 차이

청소년에게서 미성숙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본질적인 특성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청소년을 누군가의 ‘보호와 대리결정’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 훈육돼야 할 과도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관념은 근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생각이었습니다. 사회학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에 따르면,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아동기(childhood)라는 관념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인과 아동의 생활세계 역시 뚜렷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동은 크기가 작은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아동의 옷이나 놀이, 아동만의 분리된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거나 관직에 올랐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사회가 형성되면서 순진무구하고 미성숙함을 특징으로 하는 ‘아동기’라는 관념이 출현했고 이러한 관념을 생산하고 뒷받침하는 제도들도 발명되었습니다. 아동의 미성숙이 강조되면 될수록 아동을 외부세계로부터 격리시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성장했습니다. 아동이 알아서는 안 될, 보아서는 안 될, 가서는 안 될 비밀의 세계, 어른들만의 세계도 확장되었지요. 아동은 어른이 허용한 공간과 시간, 지식 안에서만 머무르면서 양육되고 훈육돼야 할 존재가 됐습니다.

아동이 있어야 할 곳으로 새로이 지정된 대표적 공간이 바로 학교입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학교는 여러 연령대의 사람이 섞여 배움을 익히는 곳이었지만, 근대 이후 학교는 특정한 연령대의 사람만이 모이는 곳이 됐습니다. 학생이라는 말이 아동의 동의어가 된 것도, 같은 학년이 같은 나이와 동의어가 된 것도 근대 이후의 일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아동기도 어린이기와 청소년기로 점차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근대세계에서 아동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가족과 사회의 각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회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가족과 학교는 인권의 원리가 부정되는, 사적(私的)이고 비정치적?비사회적 공간으로 생각되었으니까요. 이와 함께 아동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고 발언할 기회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근대의 아동은 보호를 얻은 대신 자유를 잃게 됐습니다. 근대의 아동에게는 가족과 학교가 ‘둥지’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유배지’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미성숙함은 열등함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성숙한 존재들에게는 보호와 통제가 따라붙습니다. 어리니까 제외되고 모자라니까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합니다. 다양한 것을 경험할 기회도, 스스로 결정하고 참여할 기회도,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도, 원하는 변화를 일으켜볼 기회도 점차 멀어집니다. 실수할 기회, 배울 기회를 놓친 사람이 그만큼 성숙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성숙해지고 무력화되기 마련이지요. 무지(ignorance)와 무권력(powerless)을 특징으로 하는 기나긴 아동기가 악순환되는 바퀴는 이렇게 굴러갑니다. 결국 청소년이 원래부터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하다는 신화와 그 신화가 불러낸 보호와 통제의 제도?관행들이 청소년을 미성숙하게 길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성숙의 굴레에 사로잡혀 자율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지시나 명령이 없을 때 오히려 혼란스러워 합니다.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는 오랜 세월 감방에 갇혀 있다 석방된 사람이 감방 너비 이상으로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허락받은 공간 이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를 잃은 대가입니다. 이렇게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누군가의 보호가 철회되었을 때나 바로 그 보호자가 보호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할 때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폭력을 사랑이나 관심으로 받아들입니다. 폭력의 가해자에게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을 불러일으킨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습니다.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청소년이 이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습니다. 한 청소년 동아리에서 체벌에 관한 찬반토론을 벌였는데 격론이 오가던 끝에 결국 체벌 찬성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우리 청소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통제가 없으면 엇나간다,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가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것이지요. 자신도 동료도 신뢰할 수 없어 스스로 통제자를 초빙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성숙의 굴레가 가져온 가장 참혹한 결과일 것입니다.

미성숙의 신화는 역사적으로 다른 소수자들에게도 차별과 배제, 억압을 유지시켜온 굴레였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옛 노예의 후손인 미국의 흑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낸 것도 20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여성도 흑인도 예전에는 스스로를 대표할 자격이 없는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이들이 인권의 주인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스스로 미성숙의 굴레를 깨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청소년들도 인간의 이름으로, 인권의 이름으로 미성숙의 신화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흐름은 이미 거대한 국제적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 전환의 물결이 일다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처벌할 마땅한 법률이 없어 ‘동물학대금지법’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 정도로만 취급됐음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아동을 보호할 독자적 법률은 동물을 보호할 법률보다도 뒤늦게 출현한 셈이지요. 20세기에 들어서면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해 두 차례의 큰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 번째 전환은 20세기 전반기에 찾아옵니다. 아동을 중심에 두고 아동의 생활세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아동중심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에는 아동의 권리를 선언한 최초의 국제선언이 발표됐습니다. ‘제네바 선언’이라 불리는 이 선언은 아동은 기아나 재해, 전쟁 등의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우선적인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동관은 당시로는 획기적이었지만, 앞서 살펴봤던 보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돌봄이 주어지는 것만으로는 ‘동물’의 상태를 벗어나기 힘드니까요. 두 번째 전환은 20세기 중반에 찾아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인간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권리를 보장 할것을 요구하면서 사회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도마에 올린 것은 권위주의에 찌든 학교였습니다. 그들이 던진 비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왜 교문 앞에 멈춰 서 있는가. 당시 청소년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이론가들이 내걸었던 요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1 _ 공장법이나 아동보호법과 같은 법률은 우리를 착취로부터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우리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법률 역시 우리가‘ 부모 아니면 국가, 즉 누군가의 재산’이라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2 _ 학교에 가지 않을 권리: 의무교육은 우리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학교생활은 수감생활과 다름없다.
3 _ 교육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 학교운영에 학생이 의사를 표현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보장해야 하며, 나아가 학교규율의 제정과 커리큘럼의 결정에까지 학생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4 _ 결사의 권리: 학생에게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조직을 결성하거나 조직에 가입하고 동맹휴업과 같은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5 _ 적법절차에 대한 권리: 학교에서도 학생의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어야하며, 학생들이 두려움 없이 학교나 교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수 있고 그러한 진정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교장이나 교사에게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하는‘부모대위설(친권이양론)’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6 _ 용모를 통한 자기표현의 권리: 부모에게 교복 착용의 동의서를 받아내는 일은‘ 온화한 형식의 갈취’이며, 학생 자신이 서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7 _ 표현의 자유: 교지, 동아리, 학회활동 등에 대한 자의적인 검열을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기숙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적인 편지에 대한 검열도 폐지되어야 한다.
8 _ 체벌의 폐지: 체벌은 우리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모욕하는 일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
9 _ 신앙활동의 자유: 우리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종교교육이나 예배는 거부되어야 하며, 학교뿐 아니라 부모에 의한 특정 종교의 강요도 거부되어야 한다. 나아가 종교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주입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10 _ 지식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우리는 모든 지식과 비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성(性), 사회에서 폭력이 수행해온 역할, 술이나 담배 등에 관한 지식도 포함된다.

그 외에도 특정연령 이상이 되면 성적자유를 인권으로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 실수할 수 있는 권리(the right to make his own mistakes), 선거권, 후견인의 선택권, 자신의 학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조직마다 주장하는 바는 조금씩 달랐지만 아동을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에게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은 같았습니다.

이런 도전들이 꾸준히 이어지자 어린이, 청소년을 바라보는 케케묵은 생각들이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법원에서는 부모가 이혼할 때 자녀가 누구와 살고 싶어하슴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서명을 받거나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학생을 징계하는 것은 인권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학교를 변화시키고 대안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도 가속화되었습니다. 유엔에서는 세계청소년대회를 열어 청소년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떠한지 듣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발언과 참여가 늘어나자 선거연령도 18세, 17세로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들은 어린이, 청소년의 권리를 법적 구속력을 갖춘 국제조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1989년 ‘유엔 아동권리협약(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이 역사적인 탄생을 하게 됩니다. 18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이 누려야 할 권리를 모든 나라가 지켜야 할 국제법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 협약은 ‘4P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4P란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은 차별 없이 이 협약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보호(Protection)의 원칙’,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 시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생존과 발달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제공(Provision)의 원칙’, 어린이와 청소년의 최상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인권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예방(Prevention)의 원칙’ 그리고 어 린이와 청소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참여(Participation)의 원칙’을 말합니다. 이 원칙에 따라 협약은 어린이, 청소년에게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교육권, 건강권, 사회보장권, 쉴 권리, 전쟁?사법절차 등 특별한 상황에 놓였을 때 지원받을 권리, 경제적?성적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협약은 그동안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해왔던 운동들의 주요 유산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돌하고 캐발랄한 청소년, 다른 질서를 꿈꾸다

앞서 1960년대 후반 서구사회를 달구었던 청소년들의 외침을 만나고 나서, 지금 이 땅의 청소년들의 외침과 너무나 똑같아서 깜짝 놀랐을 겁니다. 비록 40여 년이나 뒤처지긴 했지만, 거대한 전환의 물결은 이 땅에서도 일고 있습니다. 때론 당돌하게, 때론 엄숙하게, 때론 캐발랄하게 청소년을 대하는 기존 질서와 관념에 도전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는 것이지요. 200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07 60주년을 맞아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에서는 “나이가 적다고 누리지 말아야 할 인권은 없다!”면서 ‘2008 청소년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다음은 그 선언 중 눈에 띄는 몇 가지 조항을 옮겨온 것입니다.

♪‘ 미성년자’라는 말은 청소년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말이야‘. 미성년자’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워버리자!
♪ 처음 만나서 나이 좀 많다고 곧장 반말하거나 막 대하는 건 정말 붸~ㄱ.
♪ 처벌이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하고, 인권 침해현장에서 당장 멈추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 “예의”나“학생의 본분” “자식의 본분” 같은 말로 우리의 정당한 인권을 위한 행동을 공격하거나 하면 못써.
♪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거짓된 핑계로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라! 찜질방, 게임방, 노래방 등에 10시 이후 출입을 금지하거나, 청소년통행금지 거리를 지정하거나, 셧 다운제를 도입하려는 것은 청소년 보호가 아니라 청소년의 행동에 대한 통제라구!
♪ 교사, 교장, 교육감, 지방자치단체, 국회의원, 대통령 등 청소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들을 선택할 수도 탄핵할 수도 있어야 해.
♪ 청소년을 강제로 동원해서 노동시킬 수 없어. 예를 들면, 봉사시간을 채워오게 하거나 다른 강압적인 방법으로 봉사활동이나 참여하고 싶지 않은 행사에 강제로 참석시켜서는 안 돼.
♪ 가출은 청소년들의 주거권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 만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적극적 표현 방식일 수 있어. 청소년들이 원하는 독립적 주거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해.
♪ 청소년에게는 나이와 성적 지향(동성애, 이성애 기타 등등), 성 정체성에 상관 없이 짝사랑하고 연애하고 성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 때리지 좀 마! 교사나 부모(보호자)나 다른 어른이나 또래나, 누구든 우리에게 매질, 발길질, 주먹질, 기합, 모욕 등의 폭력을 행하지 말아야 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어떤 이유라도 그게 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할 이유는 될 수 없어‘. 사랑의 매’는 거짓말이야.
♪ 종교계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라고 해서 강제로 종교의례에 동원하거나 헌금을 내라고 하지 말고, 종교를 가지고 차별하지도 마! 그리고 부모나 가족이 믿는 종교를 청소년들이 똑같이 믿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
♪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지 마.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는 사라져야 해.
♪ 청소년은 잘 쌀 권리가 있어. 수업시간이라는 등의 이유로 화장실이 급한 데 못 가게 하거나 하면 안 돼. 병 걸리면 책임질 거야? 화장실의 청결 상태나 시설, 숫자도 충분히 좋아야 해.
♪ 학교에서 체력검사나 신체검사를 할 때도 그렇고, 에이즈 감염 등 의료상의 정보를 함부로 알리거나 청소년의 동의 없이 가족들에게 알려선 안 돼.

이 선언문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받아들여지기 힘든, 상당히 논쟁적인 권리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권리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어떤 권리에는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너무 과하다,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 권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들 권리가 출현하게 된 맥락과 선언의 작성자들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는 일입니다. 이 선언을 읽으면서 각 권리에 해당하는 장면이, 작성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면, 선언의 작성자들이 꿈꾼 ‘다른 질서’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나눌 준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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