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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 여중생의 죽음의 공통점

사라진 ‘랭보’들의 함성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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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 시를 쓰는 데 청소년과 성인들의 생물학적 연 치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재미와 상관없이


청소년들? 시를 쓰는 데 청소년과 성인들의 생물학적 연 치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시가 살아 있는 것들의 살아 있음으로 인한 불가피한 상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성인과 청소년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상처의 깊이와 심각성을 나이를 기준으로 감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김시습이나 랭보, 당나라 때의 이하 등 괴인한 재능을 일찍이 유년 때부터 쏟아놓던 천재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런 구분은 좀 어처구니가 없다. 실제로 내게 건네진 열서너 살 어린 시인들의 시들은 결코 어리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어를 다루는 수사 능력이 너무 능숙하고 화려해서 불안할 지경이다. ‘뭐야? 왜 이렇게 시들을 잘 써!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속으로 불평이 터져나올 만큼 이들은 이미 ‘시’에 익숙했다. 기형도가 이미 노래한 것처럼 ‘죽은 가지들이 봄이 되어도 뚝뚝 부러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나무의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은 추악하다’고 그랬는데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죽은 가지를 닮아 있는 새 가지들은 도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하지. 결국 나이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익숙한 시의 기율대로 너무 잘 쓰는 것이 문제인가.

시는 자신이 쓴 세계에 대한 감성을 승인받고 이해 가능한 범주 속에서 소통(위르겐 하버마스)하기 위해 치르는 언어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설명하거나 묘사해서 그럴듯하게 복원하고 재현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저 느껴지므로 환하게 알게 되는 어떤 상태, 즉 ‘이해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들’을 상상력을 통해 구현하는 언어의 질서다. 존재를 창조(알랭 바디우)하는 것은 김수영의 말대로 불온한 일일진대, 제도 안팎의 ‘교육’을 통해 해답을 습득한 상태에서 젊은 시인들의 시가 시작되고 있는 것은 잘 쓰는 규격품을 만드는 일이 되어버릴 수 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마저 미리 구획정리를 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전복’인지를 미리 아는 ‘전복’은 무엇일까. 새로움은 그저 기술적인 것일 따름일까. 뛰어난 묘사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현란한 이미지들, 내 손에 주어진 젊은 시인들의 잘 쓴 시를 읽기 전에 영화 한 편을 읽는 것으로 이 만남을 시작하고 싶다. 칸 영화제에 출품돼 기립박수를 받았던 이창동 감독의 <시>가 그것이다.


영화 <시>는 재미없다. 경쾌하게 미끄러지고 깨어지고 치고받지 않는다. 당연히 속도감도 없다. 늘어지고 평범해진 일상 속의 중소도시에 그렇고 그런 군상들이 별 필연성 없이 시를 배우러 모이고 흩어진다. 그러나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이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스며드는 ‘죽음’이 흐르는 강물처럼 일상의 배음을 이룬다.

화면이 열리면 강이 스크린의 프레임을 뚫고 나와 객석을 뒤덮을 듯 다가온다. 강의 흐름을 따라 먼 곳에서 무엇인가 흘러내려온다. 흰 교복 상의를 입은 여학생의 시신이 둥둥 떠 눈앞으로 흘러온다. 하지만 물속에 엎드린 채 흘러오는 시신의 얼굴은 확인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흘러와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강의 수면 위에 얹혀진 알 수 없는 시신 한 구. 영화 <시>의 내러티브는 이 시신의 내력을 풀어내는 일을 중심에 놓고 구성된다. 그러나 이창동의 <시>는 히치콕의 돌발적인 공포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감추어진 범인 찾기같이 드러내지 않고 접근해가기 식의 추리 호흡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흐르는 강은 환원 불가능한 시간의 속성을 형상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겪었던 기억 또한 강처럼 흐르는 것이어서 종종 그것의 살아 있음을 환기시키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매일매일의 크고 작은 일상의 욕구와 압도적인 현실적 필요에 의해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 지속 가능한 기억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더구나 보고 듣고 느껴지는 세계의 실감이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억 위에 날마다 덧씌워지는 기억을 뚫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지속시키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 모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이 산 자들의 삶을 정화할 수 없다면 죽음은 죽음일 수 없다”는 김진경 시인의 경고는 기억되지 않는, 혹은 상투적으로 기억되는 죽음의 기만을 이야기한다. 모든 일상이 우리의 경험 안에서 신성해질 때 압도적인 일상의 무의미함이 구원되는 것이 맞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은 오직 시적인 것, 즉 예술이 환기하는 기호들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영화 <시>의 첫 장면은 우리의 눈앞에 시신 한 구를 들이밀면서 ‘이 죽음을 보라’고 말한다. 아니 이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일상의 속도대로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여중생(촛불집회 당시 광화문을 지나던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전선엔 여중생들뿐”이라고 곁에서 중얼거리는 황지우 시인의 자조어린 탄식을 들으며 ‘여중생’이라는 어휘가 지닌 주술적인 느낌에 오싹했던 적이 있다. 왜 영화 <시>에 대사 한마디 없이 죽은 시신으로 출연한 여학생에게서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는지)은 여섯 명의 또래 남학생들에게 몇 차례의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했다. 남학생들의 아비들은 그 중소도시에서 부동산을 하거나 노래방, 식당 등을 운영하는, 먹고살 만한 평범한 집안의 아이들이다. 한 아이 동욱(이다윗)만 부모 대신 보조금을 받으며 간병인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외할머니와 살아간다. 바로 이 외할머니(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파리에서 살아가는 70년대의 대스타 윤정희가 배역을 맡고 있다. 이미 육순을 훌쩍 넘긴 이 여배우는 한때 이 땅의 모든 젊은 남성들의 로망이었다), 이미 현실 속에서는 거의 잊혀진 과거의 여배우가 등장하는 것 역시 기억과 관계가 있다. 영화 속에서 윤정희는 사물의 단어를 비롯해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치매를 앓고 있다. 소녀의 감성을 지닌 채 곱게 늙은 이 외할머니(영화 속의 그녀는 미자라는 이름을 갖는다)가 영화 <시>의 중심인물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무심히 화단에 핀 꽃 몇 송이에 곧잘 감동하는 외할머니는 불현듯 시를 배우고 싶어진다. 왜 시를 쓰고 싶은 걸까. 시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이며 어떨 때 시가 찾아오는 것일까. 김용택이 교사로 출연하는 문학교실에 등록한 외할머니에게 시란 막연하기만 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내는 일상은 너무도 빤한 것이어서 특별히 놀랍거나 이해 불가능한 경우란 그리 흔치 않다. 다 그렇고 그런 범주 속에 생활이 펼쳐지고 생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론자이거나 실재론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그 빤한 일상은 너무나 투명하고 깊은 함정이어서 누구도 다 말할 수 없고 다 말해지지도 않는다. 어제까지 살아 있던 어머니가 아니 사랑하는 그 무엇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화산이 폭발해 순식간에 죽어간 폼페이의 사람들이나, 죽기 몇 분 전까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왜 누구에게 죽어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천안함 속의 수병들 모두 일상의 가장 무심하고 평범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뒤에 남는 사람들에겐 경악스런 일이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따른다.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이름 없는 한 여중생의 죽음이라도 그렇다. 마치 우리의 일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 갑자기 드러나는 블랙홀처럼 또 다른 차원이 우리를 찾아온다. 바로 그 빤한 일상의 어느 모서리를 뚫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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