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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눈 맑은 새가 살고 있었다

이상권 「날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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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 깊숙이 박혀 있던 서릿발이 노골노골 풀어지던 날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넘보지 못하고 오직 햇살과 바람만이 살을 비비대고 있었다. 이런 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 색깔을 드러낸다.

1. 눈 맑은 새가 살고 있었다

흙살 깊숙이 박혀 있던 서릿발이 노골노골 풀어지던 날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넘보지 못하고 오직 햇살과 바람만이 살을 비비대고 있었다. 이런 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 색깔을 드러낸다. 나무와 돌멩이, 흙까지도……. 이런 날은 생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그 소리를 생명체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매들은 “새들의 몸속으로 들어온 바람이 동그란 뼛속을 통과하는 소리다” 하고 농담했으나 까마귀들은 “씨앗들이 숱한 시간의 경계를 지나 움트는 소리다” 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눈’의 고막에서도 그 울림이 맴돌이쳤다.

“날개가 꿈꾸는 소리 같아.”

하늘눈은 숨을 모아 힘껏 뱉어내면서 작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이런 날은 눈을 감아야 더 환해지는 법이다.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햇살의 간질거림까지 다 받아내면서 빛과 바람의 흐름 속으로 빨려든다. 날개란 빛이요, 바람이다. 날개는 하늘눈을 부드럽게 위로 더 위로 끌어올렸다. 때때로 날개와 격렬하게 충돌해오던 빛과 바람이 오늘은 친절하게 날개를 도왔다. 까마귀가 허우적허우적 날아오다가 “저놈이 미쳤나.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겁이 없군!” 하고 사납게 쏘아보았다.

하늘눈은 부드럽게 몸을 틀면서 아랫바람을 탔다. 너무 아쉬웠다. 이런 날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람과 햇살이랑 한통속으로 날아다닌다는 것, 그 자체를 즐기고 싶었다. 하늘눈은 하늘을 오르다보면 어느 정점에서부터 햇살과 바람이 수평을 이루면서 잔잔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늘눈은 아쉬움을 달래면서 고욤나무로 내려왔다. 눈이 맑은 암컷 딱새였다. 태깔이 매끄럽게 윤기 흐르는 갈색 옷에다, 햇살에 버무려지면서 꼬리에 아롱지는 황톳빛 망울이 참으로 멋스러웠다. 혼자 있는 걸 좋아했으며 오롯이 사색을 즐기면서 늘 하늘을 바라다보았고, 저물녘 나무 위에서 “날고 싶어, 하늘눈 속으로…… 미치도록” 하고 피리 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고작이었다. 어치들은 그 딱새를 보면 “저런저런, 또 망상에 잠겨 있군” 하며 ‘몽상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새들은 “또 하늘만 바라다보고 있구먼. 고개가 아프지 않을까!” 하며 ‘하늘바라기’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암컷 딱새는 고맙다는 표시로 가볍게 꼬리를 흔들어주었다. 암컷 딱새는 이미 다른 이름이 있었다. 암컷 딱새는 하늘이 살아 있는 거대한 눈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저 눈이 허락하는 깊이까지 날아가고 싶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품어주는 저 눈빛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하늘눈이라고 불렀다.


하늘눈은 뒤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어제부터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으나 다시 돌아서면 그런 느낌이 몸을 흔들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설레었다. 하늘눈은 아침부터 이런 두근거림으로 마음이 흔들렸는데 맑은 하늘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허공 깊은 곳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한 땀 한 땀 모아진 물살이 제법 큰길을 내며 골짜기로 흘렀다. 물가에는 통통하게 젖살 오른 버들개지들이 서로 볼비빔하면서 몸을 흔들었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덩굴들이 어깨와 어깨를 맞대면서 차일을 치고 있었다. 키 작은 봄풀들은 덩굴차일이 더 촘촘해지기 전에 서둘러 햇살동냥에 나섰다. 아무도 뒷바라지해주지 않았지만 작은 풀들은 자신의 운명을 꿋꿋하게 헤쳐나갔다. 하늘눈은 이 덩굴 아래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묵은 살림을 다 버리고 빈 꼬투리만 매단 고욤나무 가지가 바람을 탔고, 그 가지에서 쉬고 있던 하늘눈의 몸도 나무가 되어 흔들렸다. 늙은 고욤나무는 자신의 몸 아래쪽 속살을 비워내고 마련한 너른 공간을 새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세를 주었다. 하늘눈은 그곳에서 태어났고 한 번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이곳이 좋았다. 편했다.

하늘눈은 고욤나무 아래로 내려앉으며 주위를 예민하게 더듬었다. 뭔가 간절함이 깃들어 있는 눈빛이었다. 구체적으로 얼굴이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그때마다 하늘눈은 몸이 달아오르면서 하늘로 솟구쳐오를 수밖에 없었다. 보름 전에는 눈이 큰 수컷 딱새가 와서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때는 상대가 두려웠다. 그 뒤로도 서너 차례나 다른 수컷 딱새들이 다?와서 청혼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설레지 않았다. 하늘눈은 느리게 주위를 보다가 “또 저 ‘허풍쟁이’ 놈이잖아” 하고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수컷 멧새가 노란 꽃불을 밝힌 생강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허풍쟁이는 노란 머리털을 세우고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곧장 떠벌렸다. 가만히 듣다보면 자신이 마법사니 뭐니 저 산 너머에 사는 살쾡이하고 친구니 하면서 허풍을 떨어대는데 차마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하늘눈은 “하여간 저 허풍은 알아줘야 해……” 하고 웃어버렸다.

“이봐, 하늘눈아. 얘기 좀 하자는 말씀!”

오늘따라 허풍쟁이가 진지하게 말을 걸었다. 녀석의 애인으로 보이는 다른 멧새도 보였다.

“왜 내 말을 씹느냐는 말씀?”

하늘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허풍쟁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구새 먹은 고욤나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서야 하늘눈은 허풍쟁이가 왜 말을 걸어오는지 알았다. 허풍쟁이는 주인인 하늘눈한테 집을 양보해달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늘눈은 뒤늦게 당황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 집에다 살림을 차릴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다 집을 마련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눈은 “안 돼, 허풍쟁이야. 거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 하고 말했으나 허풍쟁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조금 뜸들이고 다시 소리쳐도 마찬가지였다. 허풍쟁이는 이미 그곳에다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고 여차하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결코 허풍 떠는 빛이 아니었다.

막상 허풍쟁이가 강하게 나오자 하늘눈은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하늘눈은 자신의 생가를 고집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하늘눈의 마음속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설렘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하늘눈은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고 그래서 한동안 자신의 생가를 내려다보다가 날개를 펼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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