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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손자병법』

80년대를 휩쓴 대중 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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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TV 광고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소설 한 편을 <다시 보고 싶은 책>으로 찾아 읽어 보고자 합니다. 가장 널리 인기를 끌었던 대중소설가 정비석의 장편 역사소설,『소설 손자병법』입니다.

한때 TV에서 책 광고가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20년 전만 해도 책 CF를 TV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그때에 비하면 책의 암흑시대겠지요. 지금의 책 대여점보다 일상적인 공간이 대본소(貸本所, 일본식 책 대여점 이름입니다)였고, 많은 사람들은 여가를 책으로 보냈으니까요.



 

TV에서 광고로 만나는 책은 대부분이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는 소설류였습니다. 당시 TV 광고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소설 한 편을 <다시 보고 싶은 책>으로 찾아 읽어 보고자 합니다. 가장 널리 인기를 끌었던 대중소설가 정비석의 장편 역사소설, 『소설 손자병법』입니다.

『소설 손자병법』이라는 제목을 들으신다면 유사한 소설 제목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먼저 드실 겁니다. 『소설 목민심서』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등 한국의 고전 중에서 꽤 그 이름이 알려진 책들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로 꽤 좋은 반향을 일으켜 왔고, 대부분의 책들이 스테디셀러 급의 매출을 일으키며 출판 역사의 한자리씩을 차지해 왔습니다. 그 부류 중에서도 『소설 손자병법』은 꽤나 나이 든 축에 속합니다. 1983년의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니 90년대의 다른 역사소설과는 세대가 좀 다른 편입니다.

『소설 손자병법』은 실제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춘추전국시대의 군사전략가 손무孫武와 그가 살던 시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들을 풀어나간 소설입니다. 중원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어 촌놈 취급을 받던 남방의 오나라와 그보다 더 남방이자 거의 야만족에 가까운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월나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중원의 제, 초 등의 이야기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스케일의 역사 소설입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책은 실존 인물과 사건에 근간하고 있어 팩션의 형태를 간직합니다. 당장 이야기의 시작을 맡는 인물은 초나라 출신의 인물인 오자서(본명 오원, 자서는 자字입니다) 입니다.

초나라 평왕의 태자를 가르치던 스승인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는 태자의 비를 간택하는 문제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왕으로부터 노여움을 사 죽음을 맞습니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분노한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초나라를 탈출해 초를 치기 위한 기회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처음 약소국 정나라에서 함께 탈출한 태지를 통해 쿠데타를 도모해 보나 실패한 오자서는 혈혈단신으로 오나라로 찾아가는데, 여기서 한 가닥 복수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오나라 왕의 차남인 태자 광光은 야심 있고 능력도 넘치며 모두의 존경을 받아 왕의 위엄을 가졌으나, 차남이라는 이유로 왕권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도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않은 상태였고, 오자서는 바로 이점을 간파하고 태자 광의 휘하에서 그의 집권을 위해 협력을 시작합니다.

오자서의 지략을 빌려 태자의 쿠데타는 성공하고, 마침내 태자 광은 오왕 합려로 등극하게 됩니다. 오나라의 전권을 쥐게 된 오자서는 오나라의 부국강병과 자신의 복수를 위해 군사를 도모해 줄 장군을 찾았고, 마침내 손무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본래 제나라 사람으로 오나라에 넘어와 군사학을 공부하던 손무는 오자서와 합려에 의해 오나라 대원수로 등용됩니다. 그의 저서인 병법 13편(오늘날 우리가 손자병법이라 부르는)을 받아보고도 실전 가능성을 의심하던 합려는 손무가 궁녀의 목을 쳐 가면서 궁녀 200명을 군대로 순식간에 만드는 것을 보고 전권을 위임합니다.

손무와 오자서의 힘으로 강대해진 오나라는 마침내 초나라를 침공하여 수도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오자서는 마침내 복수에 성공하고, 손무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전까지 겸비한 군사의 귀재로 천하에 이름을 알립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후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한때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었던 합려는 자신의 성취가 주는 안락에 빠져들고, 이로 인해 나라는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늘 오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변방의 월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해 오고, 전투에서 합려는 사망하고 맙니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월나라와 다시 한번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합니다. 이때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속국으로 둔 부차는 이후 월왕 구천의 복수로 인해 결국 다시금 패배하면서 길고 긴 이야기는 종착역에 다다릅니다.

전체 스토리는 실제 역사 속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렇기에 3권짜리 소설 안에서 볼 수 있는 고사성어들도 상당합니다. 당장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마지막에 보여준 복수극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배경 이야기입니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잤고, 구천은 부차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자 끼니마다 쓰디쓴 쓸개를 빨면서 마음을 다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또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배경이 됩니다.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저런 복수극의 과정을 겪은 바 있는데, 같은 배에 타면 그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자서가 복수를 위해 초나라를 침공하고 원수인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자, 친구 신포서가 그 잔혹함을 질타한 바 있습니다. 오자서는 이에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화답하는데, 이 구절이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성어를 만듭니다.

이렇게 상당한 역사적 근거 속에서 소설이 진행되면서도, 소설은 소설의 장점인 가상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드라마틱한 재미를 부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손무가 오나라를 떠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병학의 대가인 손무는 자신이 연구한 학문이 실전에 적용되는 현장을 보면서 고뇌에 휩싸입니다. 죽어가는 병사들, 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죽어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한 손무는 낙향하게 되는데, 이때 당대의 현인 중 한 명인 공자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젊은 시절 공자를 만났을 때 그의 설교를 ‘이상주의자의 헛소리’로 취급했던 손무는 나이가 들어 낙향하면서 다시금 공자와 그 제자들을 만나 새로운 생각을 얻으며, 뒤늦게 공자를 찾아가지만 공자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들은 순전히 작가의 창작 영역입니다. 공자와 손자가 만났다는 기록도 없고 두 사람이 연구한 영역도 다른데, 저자는 상상력을 동원해 당대의 석학들이 만나는 장면을 재구성해 사고와 사고가 갖는 충돌과 갈등, 융합의 길을 보여주는 재미를 더합니다.

이러한 소설적 상상력들은 역사 자체가 품은 드라마성과 결합하면서 소설의 맥박을 더욱 거세고 빠르게 뛰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 시대 상황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좌절을 저자는 강렬한 캐릭터와 작위적인 상상력을 통해 부풀려 내는 데 성공해, 읽는 이들을 역사와 가상 사이의 새로운 공간에 몰입하게 합니다.

당장 소설은 손무가 제나라로 복귀해 병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결말을 짓지 않습니다. 손무의 후예라고만 알려져 있는 또 다른 병법가 손빈이 소설 속에서는 손무의 손자로 등장합니다. 할아버지의 옆에서 병법을 배우려 하자 할아버지는 이따위를 배워 뭐에 쓰느냐고 호통을 치는 장면도 나오며, 후일 손빈이 방연과 겪게 되는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까지도 100년의 시대를 넘어 당겨다 씀으로써 새로운 흥밋거리를 창출합니다.

순수문학계에서는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정비석은 이런 잔재미와 흥분을 만들어내는 작가로는 널리 인정받은 편입니다. 그의 문제작 『자유부인』을 필두로 한 거침없는 대중성은 『소설 손자병법』에서는 정통 역사소설류의 장구함보다는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희비와 갈등의 드라마에 중점을 두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됩니다.

이러한 강렬함 덕택에 『소설 손자병법』은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후대의 역사소설에도 영향을 미쳐, 앞서 언급한 대로 유명한 동양고전의 저자들이 겪은 이야기들을 가상으로 윤색한 다양한 소설들의 영감이 됩니다.

대표적인 『소설 토정비결』의 경우도 그 구상 자체는 『소설 손자병법』과 동일한 형태를 갖춥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토정 이지함을 중심으로, 그의 친구 안명세가 겪은 사화, 유학에 환멸을 느끼고 도학에 집중하면서 얻는 깨달음을 임진왜란까지 이어 가며 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도학과 비술의 개념으로 새롭게 구상해 내어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은 『소설 토정비결』『소설 손자병법』과 그 인기의 비결이 동일합니다.

『다빈치 코드』로 한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했던 팩션은 사실 외국에서만 불었던 유행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다양한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팩션 장르는 분명 대중들에게 가장 큰 여가로 자리 잡았던 시절이 존재했습니다. 놀이가 발달하고 여가가 늘어나면서 그 한쪽 구석에는 오히려 밀려나는 여가 생활이 존재하는데, 아마 TV 광고에서 자취를 감춘 몇몇 종류일 것입니다. 대중소설, 테마파크 같은 분야는 이제 더 이상 TV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재미가 늘어난 것이지, 과거 대중을 열광시켰던 그 재미의 본질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도 저도 귀찮고 심지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도 귀찮은 겨울이라면, 한 번쯤은 80년대식의 이불 깔고 소설 읽기에도 도전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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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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