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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소녀, 현실에 발을 딛다(1/2)

아무런 이유 없이도 끌리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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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뜯어보면 그렇게 특출한 외모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크리스틴이 그랬다.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창안한 『리빙 라이브러리』는 유럽에서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신개념의 ‘이벤트성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책’ 대신 ‘사람’을 빌려준다.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목록(사람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이 책의 도서목록에 등장하는 책(사람)들은 주로 많은 사람들에게 편견의 대상이 된, 혹은 ‘우리와는 다르다’고 분류된 소수자들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사람)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 사람 책 한 권당 대출시간은 30분.

***

사람 책 ‘싱글맘’을 읽다 _ 크리스틴 리스 Christine Reese

“다시 사랑하게 되면 이젠 외모 같은 거는 거들떠도 안 볼 거예요. 그냥 인간성 좋고, 자기 색깔 있고, 지루하지 않으면 돼요.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베일리와 사이좋게 지낼 남자여야 하고……. 음. 그러고 보니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아무런 이유 없이도 끌리는 사람이 있다.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게 특출한 외모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크리스틴이 그랬다. 20명이 넘는 리빙 라이브러리의 책(사람) 대기실에서 그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처음엔 머리카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야광 분홍색 머리카락에 눈에 띄는 피어싱. 화장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면서 유독 진한 마스카라. 일본 만화에서 막 튀어 나온 것 같은 외모.

그런데 그녀를 대출해서 마주 앉자마자 그녀가 그렇게 눈길을 끈 이유를 눈치 챘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웃음. 눈 꼬리가 가늘어지면서 터지는 웃음. 처음엔 풋풋거리더니 곧 입을 크게 벌려 웃는 그녀의 함박웃음에는 주변을 환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남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자유로움. 나는 크리스틴의 웃음과 딱 맞는 단어를 금세 찾아냈다. ‘사랑스럽다!’

분명 20대 같은데도 아직 10대 같은 발랄함이 묻어 있고, 그러면서도 어쩐지 30대의 성숙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여자.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스물셋이에요. 아들은 네 살이고요. 열아홉에 아이를 낳았죠.”

아. 그렇지. 나는 그제야 크리스틴이 ‘싱글맘’이라는 타이틀로 오늘 리빙 라이브러리에 참여했음을 떠올린다. 어쩐지 뭔가 다르긴 다르다. 내가 그동안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던 싱글맘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상. 세상이 끝난 것처럼 비관적이거나 우울한 얼굴로 축 처져 있는 전형적인 싱글맘에 대한 이미지(어쩌면 나의 선입관)는 전혀 없고 뭐가 그리 좋은지 좋아 죽겠다며 명랑 100단은 족히 넘을 듯한 표정으로 생글거린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10대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출산했다. 그녀가 싱글 맘이 된 사연은 이랬다.

정말 철이 없던 10대 중반, 동네 친구들과 하릴 없이 어울려 시간을 죽일 때였다. 술집에 갈 나이가 안 됐음은 물론 갈 돈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유일하게 받아줬던 곳은 동네 인터넷 카페였다. 그곳에서 크리스틴은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남자 친구를 알게 됐고, 그들은 곧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금방 꼴딱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간절했단다. 그래서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덜컥 임신을 하고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한테 용기를 내서 말했죠. 나, 임신했다고. 근데 엄마의 즉각적인 반응은 ‘설마 낳을 건 아니지?’였어요.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죠.”

10대에 임신을 해서, 출산을 하겠다는 딸에게 박수를 쳐줄 엄마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크리스틴 어머니도 역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크리스틴을 낳은 싱글맘이었다. 그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아는 어머니가 딸에게 똑같은 아픔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을 리가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는 건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각오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러기에 크리스틴은 아직 미래가 창창한 고등학생 신분이 아니던가.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붙들고 설득했다. 아이를 키우는 건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아이는 인형이 아니라고. 일단 낳으면 책임져야 하는데 어린 너희들이, 아직 돈벌쳀도 제대로 못하는 너희들이 어떻게 양육을 하겠냐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딸인 크리스틴 입장에서는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도 사랑을 해봤으면서 우리의 사랑은 왜 어린애들의 불장난처럼 받아들이는지 화가 났다. 모녀간의 한 치도 양보 없는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크리스틴이 집을 나와 남자친구와 동거에 들어가며 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둘 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양쪽 부모에게 조금씩 도움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니 근근이 생계는 유지할 만했다. 그러는 사이 예쁘고 건강한 아들 베일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이들의 신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나자 정부 보조금이 나오고 손자를 못 본 척 할 수 없었던 친가, 외가에서 경제적인 원조가 시작되었고, 열여덟 살 철없는 아빠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집에만 처박혀서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게임 고수로 이름을 날릴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하하. 구제불능인 남자였어요.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거죠.”

남자 친구는 좋은 녀석이긴 했다. 단지 책임감이 없고, 뭔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었을 뿐. 아기를 낳고 힘들어하는 여자 친구에게 아이의 양육부터 살림까지 전부 맡겨놓고 컴퓨터만 껴안고 살았다. 그런데도 크리스틴은 문제의 심각성을 금방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볼 시간적 여유 자체가 없었다. 금방 젖을 먹이고 돌아섰는데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돌보랴, 남편 뒤치다꺼리하랴, 요리하랴, 청소하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훌쩍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돌이킬 수 없이 믿음이 깨져 버린 그날 밤은 베일리가 5개월 정도 됐을 즈음이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리고, 겨우 아기를 재우고 그 옆에 쓰러져 잠들었던 크리스틴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처음에는 도둑이 들었나 했다. 살금살금 거실로 나가보니 남자 친구가 몰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가 크리스틴이 잠들면 다시 나가서 게임을 하곤 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건 아니다. 아이를 낳고도 책임감 없는 아버지, 남편은 싫었다.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노력하는 것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어야 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남자에겐 희망도 전망도, 그 무엇도 없었다. 크리스틴은 거실의 불을 환하게 켜고 힘주어 말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그 남자 사랑한 거, 후회는 안 해요. 제가 철이 없어서 사고를 친 거는 맞지만, 그 덕분에 ‘베일리’라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았으니까. 내 인생 최고로 멋진 사고를 쳤으니까.”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는 달과 함께하며, 매주 목요일 총 8편 연재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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