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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인간 요리가 허용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나 일용품으로 간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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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번득이는 흰 이를 드러내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두 팔로 내 목을 감았다.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우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금 나를 회원으로 받아준 클럽에서 그렇게 따뜻한 환영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다.

“가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번득이는 흰 이를 드러내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두 팔로 내 목을 감았다.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우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금 나를 회원으로 받아준 클럽에서 그렇게 따뜻한 환영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 저녁거리지?” 몇몇 사람이 물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사람들은 밝고 친절했으며, 게다가 너그럽게도 회비를 받지 않았다. 나는 명예 회원이라고 그들이 말했다. 순진하고 한심한 나. 나는 저녁 식사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인 결과가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손님이나 요리사로 초대된 것이 아니라, ‘요리를 해먹을’ 한입거리로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대단히 관대했지만 나는 곧 그 관대함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럽의 좌우명인 ‘서브 맨(Serve Man, ‘인간에게 봉사하라.’와 ‘인간을 음식으로 차려내라.’라는 뜻이 중복되어 있다.ㅡ옮긴이)’이 무슨 뜻인지를 나는 서서히 이해했다. 그렇다, 런던의 펠멜 가에는 이렇게 식인 풍습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곧 죽겠지만 땅속에 묻히는 대신 스튜 요리가 될 신세였다. 적어도 좋은 그릇에 멋진 장식을 곁들여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일단 배경에 깔린 문제를 확인하면 우리는 위의 간략한 시나리오를 즉시 이해할 수 있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어쨌든 나는 그 미식가들의 의도에 동의한 적이 없었고, 요리 재료가 되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를 먹는 것은 잘못이었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풍자적인 목소리로 코앞에 닥친 아사를 피하기 위해 아기와 어린이를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의 생각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비행기 추락 사고의 생존자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대개 먼저 죽은 사람들을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묘사한 우리 클럽의 식도락 습관이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고, 행여 그 회원들이 최근에 자연사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만 먹는다 해도 놀라움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놀라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살아생전에 기꺼이 헌혈을 하고, 사후에 장기를 기증한다.

초점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코앞에 닥친 아사를 피하려고 사고나 자연사로 죽은 사람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 밖의 경우라면 사람들이 식인 풍습에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해도 인간이 인간의 유체를 먹는 것은 여전히 잘못일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동물ㅡ물고기, 가금류, 네 발 짐승ㅡ의 고기를 맛있게 먹고,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뱀, 고래, 악어, 심지어 고양이, 개, 침팬지의 고기 맛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먹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지독한 변태들뿐이다.

우리의 농업이 없었다면 많은 생물들ㅡ소, 양, 돼지ㅡ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죽이고 먹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아기들을 사육하자는 스위프트의 제안에 동의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우리가 개인을 창조한다고 해도 그 때문에 우리는 그 개인을 파괴할 권리를 갖진 못한다. 우리의 창조물이 동물들과 아기들처럼 자신의 권익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에겐 분명 그럴 권리가 없다. 심지어 위대한 그림을 창조한 피카소라 할지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감상하는 그 창조물을 파괴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식용으로 쓸 동물을 고통 없이 죽이는 일을 정당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어떤 초고등 동물이 인간을 사육하면서, 하등 동물인 우리 인간을 고통 없이 죽인다면 인간에겐 거의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면 비록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먹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 그 ‘초고등 동물의 사고’로 생각을 해도 우리로서는 사람의 고기를 먹는 방식이 편안하지는 않다.

사람의 고기는 다른 사람의 몸이고, 그래서 사람 파이, 호모사피엔스 케이크, 인간 통조림에 반대하는 일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주장들이 존재한다.

출처: //www.flickr.com/photos/12339449@N02/1812662748/

사람을 먹는 것이 단지 유쾌한 식사ㅡ또는 별로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ㅡ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의 삶을 평가절하 할 수 있다. 그런 식습관이 자연사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ㅡ‘고기를 기증하겠다.’는 카드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ㅡ에 한정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보는 우리의 방식은 나쁜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그 시선에는 요리의 관점이 스며들 수가 있다. 어쨌든 어떤 사람들은 포르노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를 살로 보고 여자들의 인격을 평가절하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인간 요리가 허용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나 일용품으로 간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시체를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왜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스며들어야 하는가?

사람에 대한 존중심은 사람의 몸에 대한 존중심을 수반하고, 그런 존중심은 사람의 시체로까지 확대된다. 단지 식도락을 위해 사람의 시체를 먹는 것, 정육점에 매달아 놓는 것, 인간 통조림을 슈퍼마켓 진열대에 올려놓는 것은 그 존중심을 훼손하는 행위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망자의 장기를 이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크리스마스에 잡아먹으려고 칠면조 몇 마리ㅡ루신더, 루드비히, 루드밀라ㅡ를 키우는 가정을 생각해보자.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때 가족들 중 루신더와 그 형제들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들이 그들을 인간 사회의 명예 회원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 보는 상황에서라도 사람들을ㅡ강제 수용소에서처럼ㅡ단지 숫자로 호명하면 그때도 우리는 그들을 비인간화하고, 존중심을 차단하고, 그들의 지위를 고깃덩어리로 격하시킨다. 심지어 환자를 단지 ‘충수염’이나 ‘탈장’으로 부르는 것에도 비인간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물론 다양한 사례가 있을 것이다. 맥락과 의도와 인지에 따라 사례는 달라질 수 있다. 가끔은 사람을 단지 몸으로 취급해도 괜찮을 때가 있다. 예술가인 스텔락은 자신의 몸을 갈고리에 끼우고 뉴욕시의 거리에 매달아 놓았다. 그때 그는 그 자신을 평가절하 했는가? 분명치 않다. 그는 자신의 몸을 예술적 오브제로 사용하는 동안에도 계속 자발적인 주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시체가 정육점에 걸려 있는 것을 상상했다. 그런 장면은 분명 심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사를 한 후에 자신의 몸이 먹히기를 바라는 사람들ㅡ적절한 규정과 재량이 주어진 상황에서 존중받으면서 먹히기를 바라는 사람들ㅡ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을 실제로 입증했는가? 그런 생각은 자연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점이 비도덕적일까?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끝내고 유해를 처리하는 방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실제로 우리는 화장과 매장에 대한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심지어 어떤 산모들은 출산 후에 태반을 먹기도 한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는 자신의 유해가 먹히는 것도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아마 고인이 사랑했던 사람들만 참석한 가운데 대단히 의미 깊고 의례적인 만찬 의식이 거행될 것이다. 아마 그 의식은 고인과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결합을 상징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적절한 의식이 거행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불행하게 끝날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만찬은 종교적인 일체감과 관계가 있거나 죽은 자의 살이 살아 있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생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만찬을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희생 의식으로 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고 소설이나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삶에도 적절한 결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식은 아무리 그럴듯한 정당성이 부여되더라도 오늘날에는 웃음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의문이 증폭되기 전에 서둘러 덧붙이자면, 이것은 도덕적 상대주의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풍습을 정당화할 때 우리는 모든 문화에서 쉽게 인정하는 가치들ㅡ마지막 소망을 존중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 사랑의 표현ㅡ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존경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사람을 먹는 것은 도덕성이 높은 사회에서 중요한 관습일 수 있다. 여기서 E. M. 포스터의 가르침인 ‘단지 연결만 시키라.’ㅡ다른 사람들의 소망을 강조하고, 소중히 하고, 그것과 연결만 시키라ㅡ가 떠오른다. 이제 그 말에는 포스터의 의도보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추가될 수 있다. 방금 묘사한 상황에서 사람을 먹고 먹히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포스터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단지 연결만 시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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