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가면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있고 그 뒤로 근사한 산길을 걸어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혁신주의자였던 정약용은 유배 온 생활의 대부분을 책을 쓰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면서 보냈다. 함께 차를 마시던 사람은 다도의 성인이라 불리던 초의선사. 데이트하는 연인들처럼 차를 마시려고 밤낮으로 산길을 넘어다닌 두 사람이 불과 십 년여 만에 도시를 뒤덮은 수입 커피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원래 우리는 ‘차’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적어도 한잔 커피에 오천 원 정도는 우습게 쓰는 요즘을 보면 그 유전자가 엉뚱한 곳으로 새는 것 아닌가 싶다.
좋은 물에 좋은 잎으로 우려낸 차를 마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치다. 좋은 찻잎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따낸 정성스러운 식품이다. 그 식품이 심기만 해도 자라나는 열대 지방의 커피나무 열매보다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좋은 차는 오감으로 마신다. 차를 따르는 소리, 찻잎의 은은한 향, 자완의 따뜻한 온기,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입으로 퍼지는 깨끗한 맛.
하나를 더 보태자면 차를 먹지 않아도 마실 때의 여유를 상상하며 차밭을 걷는 일. 특별한 산책이다.
백련사의 한편 야생차밭, 광주 무등산 속에 있는 차밭, 보성의 광대한 차밭을 거닐어 본 적은 있었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이 제주 땅에서 차밭을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동광검문소를 지나 금악리로 향하던 중 놀라운 광경에 차를 세웠다. 끝도 없이 이어진 차밭!
깜짝 놀란 나만큼이나 그녀도 놀랐다. 기업에서 운영하는 다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일 줄은 몰랐다. 보성, 하동에서도 보지 못한 거대한 크기의 단일 차밭처럼 보였다.
가는 길을 멈추고 무작정 차밭을 걷기로 했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눈에 들어왔다. 한라산의 네 시 방향엔 산방산이 보였다. 산은 눈에 덮였는데 차밭은 녹색으로 푸르렀다. 차의 수확은 4, 5월경이다. 제주의 차도 마찬가지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차밭의 외곽선을 따라 수백 개의 하얀 프로펠러가 돌고 있었다. 다른 차밭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 이곳 차밭에 있었다. 아주 기다란 장대에 선풍기를 달아놓았다. 풍력발전기라고 하기엔 선풍기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크기였다. 용도가 궁금했다. 그녀도 궁금했었나 보다. 금세 물었다.
“저거 왜 저기다 달아놨어?”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나도 처음 보는 용도의 물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A형의 남자는 여자에게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그녀는 이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녀는 학교에 갓 들어간 꼬마처럼 질문을 많이 한다. 세상에 궁금한 것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역시 그녀는 내가 모르는 것도 다 있다며 몇 발자국 앞서며 걷는다. 괜히 내가 놀림을 받은 기분을 들게 한다. 그게 그녀의 특기다. 또 말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리를 발생하지 않게 해주는 바람개비라고 했다. 유난히 안개가 많이 끼는 제주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 생각했다.
***
걷다 보니 프랑스의 포도밭을 걷던 생각이 났다. 출장으로 갔던 샴페인에서 포도밭을 원 없이 걸었었다. 술을 담그기 위한 용도로만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재배하는 포도는 먹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프랑스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곳 중 가장 작다는 샴페인의 포도밭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까지 심어진 풍요로운 포도밭을 보면서 비옥한 땅을 가진 프랑스를 부러워했었다. 그때는 우리나라의 차밭을 떠올리진 못했다. 남의 것만 부러워했던 거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음식재료와 값비싼 술이 나는 프랑스에도 이런 차밭은 없다. 와인을 모른다고 프랑스 사람들이 무시하면 너희는 차를 모르지 않느냐고 말하면 된다. 우리에겐 ‘차(茶)’가 있다. 하하.
***
차밭을 계속 걷고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포도밭은 밭 자체에 등급을 매긴다. 한번 고급인 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와인은 무조건 고급와인으로 팔리는 것이다. 차밭도 그런 식의 체계적인 노력이 이어진다면 아주 미세한 차이에도 약간의 돈을 더 들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고급 차를 만드는 찻잎과 일반 차를 만드는 찻잎의 구분은 보이지 않았다.
세계의 열강이 제국주의를 위해 전 세계로 침략 선을 띄운 이유는 향신료, 와인, 차 때문이었다. ‘애프터눈티’의 나라 영국과 ‘미식’의 나라 프랑스는 귀족들이 즐기는 향신료, 차등의 확보를 위해 전 세계를 잠식해나갔다. 홍차보다는 녹차를 즐기는 우리의 입맛을 당시의 그들이 잘 몰랐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영국 왕족 중 한 명이 녹차 맛을 알았다면 지금 보는 이 차밭이 영국 여왕의 것이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국내 최초의 차를 테마로 한 뮤지엄에 들러 녹차를 사고 녹차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삼층의 전망대에 서니 녹차 밭이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차의 바다에 배를 타는 느낌이다. 이 차밭이 우리나라 것이라 다행이었다.
오설록
- 산책은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좋다.
- 녹차라떼와 녹차아이스크림, 둘 중 하나는 먹어보자.
- 녹차박물관의 꼭대기는 전망대다. 차밭 뒤로 보이는 한라산과 산방산이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준다.
- 차의 수확시기 5월 직전에 찾는 차밭이 가장 풍요롭다. 차밭 사이의 길을 마음껏 거니는 것은 좋지만 찻잎을 따지는 말자. 정말 그러진 말자.
- 오설록 근처에 있는 서귀포축협한우식당에서 싸고 맛있는 내장탕을 맛보자. 오설록에서 대정방향, 서광동으로 내려오면 서광서리가 나온다. 서광서리에서 서부관광도로 방향으로 좌회전 받아 직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