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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축제

새별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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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 지금 이 시간에 세상에서 그들은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계획되진 않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행복해졌다. 축제의 밤이었다.

계획된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계획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더 어렵다.

*

이미 지나버린 6월, 난 프랑스의 낡은 도시 디종에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애초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갑자기 생겨 꽤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다음 주로 정해졌다는 워크숍, 갑자기 방문한 친지와의 술자리, 1박2일짜리 외국 출장 등 뭐 이런 것들인데 프랑스에 있었던 나에게 디종은 그런 것과 비슷했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하룻밤을 디종에서 묵었어야 하는 상황.

한때 파리를 능가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였다는 디종은 황금 같은 부르고뉴의 피노누아 언덕을 지나온 나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맑지 않은 느낌에 오래되고 낡은 공업도시형 콘크리트 건물들, 밝지 않은 사람들의 눈빛이 불청객의 마음을 가진 나를 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에 사진이나 찍고 떠나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호텔에서 편하게 쉬려고 했는데 하필 내가 도착한 그날이 매년 6월에 벌어지는 프랑스의 음악축제 당일이었다.

*

일곱 시. 이른 시간이었지만 해는 져버려 도시는 어두웠다. 하지만 호텔에서 몇 분여를 걸어 나온 디종의 도심은 이미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골목마다 맥주를 마시며 앉아 있는 젊은 영혼들과 블록마다 전개되고 있는 라이브 연주자들이 하나 되어 꿈틀거렸다.

공연은 꽤 다양했다. 록부터 샹송까지, 노래를 하는 이들은 1년 동안 이 날만을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별 계획 없이 하루만 묵고 가려 했던 외지인은 그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고 정확히 한 시간 뒤, 디종 시장 앞에서 축전을 즐기기 시작했다. 디제잉을 하던 두 명의 게이 DJ커플의 스테이지 앞에서 한 손엔 맥주를 다른 한 손엔 시가를 들고 흐느적대고 있었다. 축전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몇 곡을 들으며 몇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 여러 도시를 여행 중이었던 난 디종의 밤을 잊지 못한다. 안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

서귀포 방향에서 출발하여 새별오름으로 가는 길이다. 생전 막히지 않는 관광도로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아예 명절 경부고속도로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오름에서 열리는 정월 대보름축제라, 난 지금 그 축전을 향해 가고 있다.

*


결국, 새별오름의 입구까지 가지 않기로 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인브릿지 클럽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까지 차들은 들어차 있었다. 대충 주차를 하고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걷다 보니 갑자기 폭죽이 터졌다. 예정보다 빨리 터뜨린 게 분명했다. 일곱 시 십오 분쯤이라 했는데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채 안 된 시간. 행여나 불놀이 구경을 못할까 발길을 재촉했다. 몇 번의 폭죽과 저렴한 사회자의 행사개시를 알리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축제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새별오름의 입구에 거의 다 올 무렵 멀리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보증하는 공식적인 단체 불놀이 축전. 제주의 오름이 불타고 있었다.

*


한국 사람들은 불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오름을 구경하고 있었다. 만 명도 넘어 보였다. 승합차의 꼭대기, 자전거의 안장, 바위 위 제각각 좋은 위치를 찾아 불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곳에서 보는 것은 디종 이후 처음이었다. 여전히 제주의 오름은 불타고 있었다.

*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불길이 이어지고 번지는 동안 스테이지 위에서는 창하는 아주머니가 주문처럼 이십 분째 옹헤야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음이라 생각될 정도로 거슬렸지만, 주술적으로 반복되는 목소리는 폭탄주를 마신 것처럼 정신을 마비시켰다. 새별오름이 타들어가는 냄새는 어렸을 적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 성냥, 일회용라이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가능했던 불장난은 어린 시절에 어린 아이가 혼자 할 수 있었던 토털 퍼포먼스였었다. 시각효과, 뜨거운 온기, 냄새, 매운 연기에 흐르는 눈물, 장작이 터지는 소리 게다가 어른들에게 걸릴까 걱정되는 긴장감까지 모든 게 완벽한 놀이였다.


서울에서 자랐지만,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내곤 했던 나는 시골아이들과 자주 불장난을 했다. 겨우내 하던 불장난은 버려진 부탄가스통을 쓰면서 한층 더 규모를 키웠었는데 서툴렀던 나는 어떤 아이의 비닐 잠바에 불을 붙이고 말았고 그 아이의 머리카락은 모두 타버리면서 나의 불장난은 끝이 났다.

타 들어가는 오름의 능선을 보고 있자니 잊고 지낸 불장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아이, 잘 있을까?

*


들불축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제주에 이렇게 외국인들이 많았던가? 간이스테이지 앞에서 수많은 외국인이 원주민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군무였다. 문명인을 납치해서 먹기 직전에 추는 식인종의 행위의식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등장한 사물놀이패들은 꽹과리와 태평소, 징과 북으로 그들의 장단에 힘을 실어줬다.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얼굴 작은 ‘골’족의 남자들, 보드카를 손에 든 러시아인 연인, 헝가리 보헤미안 연인 같은 각기 국적 다른 외국인들이 사물놀이패와 한데 엉켜 덩실덩실 몸을 흔들었다. 노래 가사 없이 리듬으로만 이어지는 타악기 소리가 그들에겐 이미 익숙해 보였다. 갈 곳을 몰라 괜히 화가 나 있었던 디종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나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지금 이 새별오름 앞에서 굉장히 신이 나있었다. 계획되지 않았던 이 춤판에서.

이 밤 지금 이 시간에 세상에서 그들은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계획되진 않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행복해졌다. 축제의 밤이었다.
*

아, 그녀도 옆에 있었다. 그녀는 이런 축제는 처음이라고 했다. 많이 좋았다고 했다. 불타는 오름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location
- 제주에서 1135번 도로를 따라 중문 방향으로 가면 애월읍을 지나 오른쪽으로 새별오름이 보인다.
- 정월대보름이 끼어 있는 한 주 내내 행사가 이어진다. 꽤 알찬 행사들이 이어지니 미리 일정을 참고하자.
- 들불축제가 없을 때 다른 오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을에 오르면 특히 좋다. 억새가 오름 전체를 뒤덮는다.
- 십여 분 올라가면 서부에 형성된 오름 군과 대정 앞바다, 산방산, 송악산 등이 한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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