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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의 시대, 예술의 기원을 읽다 - 『시학』

컨텐츠가 답이라고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최초의 예술 이론인 『시학』을 가볍게 들춰보는 것도 컨텐츠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자양분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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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문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표준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문학 교과서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작품을 기억하실 겁니다. 4언절구의 한자시로 전하는 이 최초의 문학작품은 ‘시’입니다.

한반도만의 특수성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고대에 유행했던 문학을 모은 『시경』은 말 그대로 시를 모은 책이었고, 서구의 고전문학 중에서도 손꼽히는 『일리아드』『오디세이』도 모두 서사‘시’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문학에 있어 가장 오래된 장르는 시입니다.

그렇기에 문명의 여명기에 시라는 장르가 가진 본질을 연구하는 책이라면 사실상 문학의 기원 자체를 다루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인 『시학』은 그래서 사실상 문학이라는 예술 장르 전반의 특성을 고찰하는 문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서도 가장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익숙한 『시학』의 이야기는 ‘문예비평의 시초’라는 거창한 칭호에 비해서는 읽기 쉽고 짧은, 지하철 출퇴근으로 일주일이면 읽을 만한 분량입니다.

실제 『시학』은 내용 속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 장르를 다루는 느낌이 생각보다 작습니다. 『시학』이 다루는 장르는 운율과 율격을 갖춘 일반적인 시 외에도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는 서사시, 실제 무대에서 상연하는 연극을 위한 대본뿐 아니라 연극 그 자체, 연극에서 사용되는 합창과 연주 그 자체까지도 포괄합니다.

‘왜 시학에서 이런 것도 다루나?’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간과 지금 우리의 시간이 갖는 간극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21세기의 한반도는 문맹률이 1% 미만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고, TV와 신문, 영화, 게임, 인터넷 등 보고 접할 수 있는 매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는 달랐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행했던 컨텐츠는 대규모 공용 극장에서의 연극이었습니다. 이 연극이라는 것은 사실 초창기에는 연극이라고 부르기 좀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초기의 극장 무대는 주로 낭송회장이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서의 대중 연설을 통해 사람들은 청중이 되어 듣는 방식을 익혔고, 이는 고스란히 극장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극장에서는 정치 연설이 아닌 시와 같은 대중을 상대로 한 오락물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와 같은 글의 필사본 가격이 비싸고 희귀한 데다 문맹률 또한 높았기에 대중적 오락물로는 시 낭송과 같은 컨텐츠가 유효했습니다.

이러한 시 낭송은 점차 관객인 대중과의 교감을 만들기 위해 진화합니다. 처음엔 단순히 낭송만 하던 낭송자는 어느 순간부터 표정과 손동작을 통해 더 강한 호소력을 만들기 시작했고, 시의 구성 또한 낭송 시간에 맞게 적절한 플롯을 갖추어 제한된 시간 안에 청중의 감정에 강렬하게 호소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율격을 갖춘 노래 형태의 시가 아니더라도 그 플롯을 통해 시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초기 연극과 가까운 형태가 완성됩니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시학』이 다루는 장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만으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시학』에서의 ‘시’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장르입니다. 시로부터 시작되어 비언어 표현과 춤, 음악, 플롯 등이 가미되어 나타나는 공연물, 공연대본, 서사시 등을 모두 포괄합니다. 정확히는 ‘초기 예술형태에 대한 분석적 접근’이 『시학』의 본질입니다.

그 초? 예술들이 다양한 표현 방식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동일한 점 하나를 갖는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라고 부릅니다. 미메시스란, 굳이 우리말로 하면 재현representation과 모방imitaion의 사이 정도에 위치하는 개념입니다.

공연장 구석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 무대 한가운데에서 얼굴 표정과 손발 짓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연기하는 사람,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은 모두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나 감정을 자신의 기법에 녹여냅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죽인 남자가 아버지임을 알고 비참해 하는 장면을 노래할 수도 있고, 악기로 선율을 만들 수도 있고, 운율시로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결국 무언가 다른 감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의 본질로 지칭하는 이 ‘미메시스’는 예술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핵심적인 기제입니다. 미메시스라는 방식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직접 느끼지 못했던 타인의 경험과 감정,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감정을 예술에 이입시켜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술이 사람에게 주는 감동의 기제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BC 384 ~ BC 322)
미메시스를 통한 카타르시스라는 이 예술의 기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시학』에서는 논합니다. 플롯의 효과적인 구성, 등장하는 인물의 설정 등을 통해 최고의 비극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시학』이 주로 비극을 다루는 이유는 시학 자체가 희극편, 비극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희극 부분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그럴듯하고 흥미로운 가설을 던진 바 있습니다.)

『시학』은 주로 비극의 구조와 구성을 다루고 있지만, 당대의 순수문학쯤으로 자리매김했던 서사시 또한 쉽사리 버리지 않습니다. 서사시보다 비극이 예술이라는 본연의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정의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요소들을 함부로 폄훼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에게 시간이 더 존재했더라면 시학 3편으로 서사시를 따로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까지도 남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학』에 깔린 보편적인 오해들은 길지 않은 원전 자체를 한번 일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지만, 부가적인 설명을 약간 더 곁들이자면 오늘날의 우리가 갖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예술과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애초에 『시학』에서 예술은 테크네techne로 표현됩니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와 같은 어원인 테크네는 보다 기술적인 면에 가까운 단어이고, 예술 자체를 어떤 영감에 의해 다루는 감성의 영역이 아닌 장인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 시대의 사고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에 관한 영감에 가까운 개념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서구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략 19세기에 시작된 낭만주의 흐름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트로 표현되는 예술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는 작품의 근원을 ‘우주, 또는 신으로부터 예술가가 영감을 얻어 즉흥적으로 뿜어내는’ 것에 두었고, 사실 이때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오래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그런 개념이 아예 없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시점에서 『시학』을 읽다 보면 간혹 말이 어긋나는 부분도 발생합니다.

철학의 5대 분과로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을 꼽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특히 미학 분야의 고전 텍스트로 확고한 자리를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세미나 모임들의 주요 읽을거리로 몇 천 년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컨텐츠가 답이라고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최초의 예술 이론인 『시학』을 가볍게 들춰보는 것도 컨텐츠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자양분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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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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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저/<천병희> 역16,150원(5% + 5%)

서구의 고전 시학과 문예비평의 초석이 되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 그리고 플라톤의 「시론」이 함께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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