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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은 우리를 신의 경지로 인도했는가? -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오늘 읽을 한 권의 책은 우리 시대의 절대가치였던 이성과 계몽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인류의 자성을 촉구한 어둠 속의 횃불 같은 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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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다양합니다. 과학의 시대, 민주주의의 시대, 인간의 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시대의 수식어라면 아마도 ‘이성의 시대’이겠습니다.

‘이성의 시대’라는 말은 역사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최초 원시시대의 인간이 있었을 것이고, 조금씩 집단이 사회가 되어 가면서 신의 시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신에 의한 세상의 지배를 뛰어 넘으면서 대략 16세기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의 세계와 세계관을 규정지은 인간 스스로에 의한 ‘이성의 시대’가 열렸음을 감안할 때, ‘이성의 시대’는 다른 시대를 비이성, 야만, 혹은 무지라는 개념으로 두기에 가능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이라는 단어는 쉽게 비판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질서와 합리를 구현한 것이 이성이고, 그 이성의 역할 덕분에 인류는 등장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과학기술의 혜택과 제도적 진보는 이성이라는 개념에 힘입은 바 큽니다.

그러나 심지어 신조차도 비판 없는 사고는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성이라는 이 마냥 완벽해 보이는 개념에도 비판자는 존재했고, 그 비판은 이성의 어두운 면을 밝히며 이성의 시대 한가운데를 사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 바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오늘 읽을 한 권의 책은 우리 시대의 절대가치였던 이성과 계몽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인류의 자성을 촉구한 어둠 속의 횃불 같은 고전입니다.

『계몽의 변증법』은 앞에서 언급한 바 대로, 그 동안 지고지선의 가치라고 믿고 있었던 이성과 이성에 의한 계몽이라는 당대의 명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누구나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인간 이성에 의한 인류의 진화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신랄하게 공격 당하지만, 그 시대 전까지 사람들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이 그토록 신뢰받았던 이유도 나름 타당합니다. 중세 내내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영역을 억압받았던 역사가 있었고, 그 암울한 시대를 르네상스라는 이름의 인본주의로 돌파한 것이 실제 역사였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문명은 급속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냈습니다. 합리성과 과학에 기반한 사고는 우주와 세계를 보는 시각을 바꾸었고, 그런 기술들의 누적에 의해 유럽인들은 신대륙과 먼 미지의 세계로 탐험대를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세계는 좀더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인간이 생산하는 부와 가치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대했으며, 이 모든 것이 이성이라는 이름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찬양했습니다.

이성에 의한 이러한 발전은 당대에는 분명한 진보였습니다. 왕정에 기초를 두었던 근대 이전의 사회는 이제 개개인의 이성에 기반한 민주제 또는 공화제의 기틀을 다지며 전체 인민의 인권 향상에 기여했고,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꿈도 못 꾸었던 엄청난 양의 면화 생산과 그에 따른 의류가격의 하락은 서민들의 생활까지도 크게 개선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힘은 철학자 헤겔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절대 이성’ 에 의해 인류의 마지막 단계가 완성되는 형태의 논리까지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1969)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 오기도 했습니다. 대량생산에 의한 물질적 풍요는 즐거웠지만, 심지어 전쟁에서의 살육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활과 창의 시대에서 총의 시대로, 그것도 기계학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기관총이 등장한 세계 제 1차대전의 시기에는 기관총 앞에 돌격을 감행한 수백만의 유럽인이 몰살당했습니다. 2차대전 때는 로켓과 폭격이라는 신기술 앞에 민간인들도 죽어 나갔고, 원자폭탄이라는 공포의 무기까지도 등장하면서 과연 이성에 의한 진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사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뿐만도 아니었습니다. 당장 이성과 합리에 기반해 더 나은 사회조건이 구성되리라 믿었던 수많은 이들에게 나치의 등장은 충격이었습니다. 시민이 직접 투표에 참가해 뽑은 독일의 새 공화국, 그 이성의 의지가 모여 만든 정부가 보여준 대량학살의 참극과 그에 물들어 갔던 독일 시민들의 모습은 과연 수 세기를 이끌었던 이성의 결과물인지를 의심케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성의 충격적인 결과물이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한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로의 해법을 주장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스탈린 치하에서 나타난 가혹한 인권 탄압과 인간성을 무시한 냉혹한 전체주의로 변질되면서 희망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성에 걸었던 인류의 희망들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의 이러한 현상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두 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하나 하나 해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결론은 쉽게 이야기하면 간단합니다. ‘이성을 믿지 마라’.

『계몽의 변증법』저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이른바 암흑기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구원해 낸 역사로서의 결과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성 그 자체가 절대선은 아니며, 특히 이성이 ‘도구적 이성’이라 불리는 일종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상에 의해 인간은 절대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신화의 시대를 만들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신화를 이겨낸 이성, 계몽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이름을 빌린 신화라는 것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신화, 계몽이 같은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와 계몽이 왜 다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와 계몽의 가장 큰 차이는 행위의 주체가 신이냐, 인간이냐 입니다. 계몽 이전의 시대에는 모든 행위의 주체가 신이었습니다. 신이 우주와 자연을 만들었고, 세상의 법칙을 주관하므로 인간은 신에게 빌고 그를 통해 자연을 개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 이후에는 그 주체가 인간이 되며, 그에 따라 인간은 신에게 비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의 이성을 통해 세계의 법칙을 연구하고 고쳐 나가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럼에도 둘이 같은 개념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저자들은 원시시대의 개념을 꺼내 듭니다. 이른바 신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 즉 주술의 시대입니다.

샤머니즘, 애니미즘과 같은 원시 신앙의 형태는 신화나 계몽과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특징을 갖는데, 바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북미 원주민 주술사들이나 오세아니아 원주민 무당들이 보여주는 여러 원시신앙의 행위는 자연을 객체로 두지 않고 주체인 나 자신과 일체 시킵니다. 이러한 원시 신앙에는 인격신의 형태가 등장하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일체화하는 모방의 의식mimesis 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합니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1895~1973)
바로 이 점, 인간이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할 대상인 인간 바깥의 세계에 대한 관점이 신화나 계몽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주장하는 핵심입니다. 신화나 계몽은 둘 다 인간 바깥의 세계(이후 자연이라 통칭하겠습니다)를 동일하게 객체로 두며, 개발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개발을 편리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며, 그런 도구를 잘 휘두른다는 기계적 사실이 인간을 이상향의 끝에 도달시킬 수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이라는 새로운 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신화들에 주목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진 시대가 만들어낸 환상은 특히 문화의 영역에서 두드러졌고, 이러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문화 소스는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둔하게 만드는 효과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를 적절히 활용한 나치의 성공사례였고, TV와 같은 여타 매체가 항상 정치적 영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례들입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일련의 흐름을 받아온 부분이 없지 않기에,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고찰도 두드러집니다. 『계몽의 변증법』은 산업 시대의 대중문화를 ‘문화산업’ 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예술과 문화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가 아닌 자본에 의한 이윤 계산이 앞서게 된 대중문화계를 비판합니다. 모든 프로덕션과 프로모터들은 문화예술의 기획에 앞서 예산을 먼저 짜고, 투여된 자본에 대비해 확보할 수 있는 수익을 계산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대중문화가 가진 본질적 속성이며, 이는 문화가 아닌 문화산업이라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일견 마르크시즘과 맥을 같이하는 듯 하면서도 사실 『계몽의 변증법』은 근본적인 부문에서는 마르크시즘의 견해를 반대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기초 중 먹고 사는 물리적, 경제적 영역을 ‘물적 토대’라고 부르고, 철학과 정신, 제도와 도덕 같은 정신적 문제를 ‘상부구조’라 부르는 전통적 마르크시즘의 개념 하에서 정통 마르크시즘은 ‘물적 토대에 의해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반면,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물적 토대에 의해 상부구조가 반드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정통 마르크시즘과 달리 물적 토대보다 그 상부구조, 문화와 의식에 주목하면서 특히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명의 발전을 크게 이끌어 온 이성의 어두운 그늘을 밝혀 낸 『계몽의 변증법』은 2차대전과 나치즘, 스탈린의 등장과 핵무기 개발 등 인류의 진보에 걸었던 신념들이 무너지는 현장을 냉철하게 분석해 내어 이후 맹목적, 도구적 이성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반성을 촉구하게 만든 저작입니다. 『계몽의 변증법』 이후 인간은 이성, 합리와 같은 굳게 믿어 마지않았던 많은 가치들을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가치들이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히려 또 한걸음의 진보를 만들어냈다는 평까지도 듣고 있습니다.

단순히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만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장 우리가 사는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많은 것들이 도구화되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건을 잘 만들던 장인이 어느 날부터 CEO라는 경영활동의 대가가 되는 것을 ‘생산의 도구화’가 아닌 ‘돈 잘 버는 성공사례’로 받아들이고 있고, 훌륭한 뮤지션은 홍대 앞 거리에서 추운 날 곱은 손으로 기타를 튕기는 사람이 아닌 ‘앨범 몇 만장 판매’로 집계되는 세상에 별다른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CEO가 되고자 하고, 모두가 MBA라는 경영학 석사 자리를 따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 그렇게 의심 없는 하루와 의심 없는 독서는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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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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