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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한 냉정한 이야기가 전하는 감동 - 『쥐』

2차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을 이미 알고 있는 이에게도 또다른 충격을 전해 주는 『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읽는 이의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도 전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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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Document 현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의 특징인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장 명확히 드러났던 역사적 사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소총, 대포, 탱크뿐 아니라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모든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생산된 모든 것을 동원해 사람들은 적을 대량으로 죽였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묘사했던 거대한 생산의 톱니바퀴 아래 사람은 처참하게 죽어나갔고, 이는 꽤 오랫동안 우리 문명의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그 대량살상의 와중에서도 유독 참혹했던 것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었습니다. 민족이라는 조금은 불분명한 테제만으로도, 엄밀성의 철학자 칸트를 낳은 논리적인 독일인을 학살의 주범으로 몰아넣었던 이 학살은 2차대전 중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잔혹성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광포성 덕에 대부분의 역사 연구에서 아예 다른 챕터를 차지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독일계 미국인 2세이자, 미국 대중만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만화 예술가 아트 슈피겔만은 자신은 비록 겪지 못했지만 아버지 세대가 유럽 땅에서 겪었던 유태인 대학살의 주제를 자신만의 전위적인 필체로 재구성합니다. 만화로 구겐하임상, 퓰리처상 등 어지간한 권위는 휩쓸었던 이 작품은 음침하고 어두운 그림체로 무겁고 음울한 주제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이 주는 감동이 남달랐던지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2차대전 중의 유태인 학살을 다룬 오늘의 다시 보고 싶은 ‘만화’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입니다.

『쥐』는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만화입니다. 실제 작가이자 극중 화자인 만화가 ‘아티’는 2차대전 당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고 싶어 합니다. 잔소리가 많고 신경증이 가득해 보이는 아티의 아버지는, 항상 괴상한 만화만 그려대는 (실제로 작가의 만화는 상당히 전위적이고 기괴한 스타일을 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들이 못마땅하면서도 당신의 이야기를 그리겠다는 마음을 기특해 하기도 합니다.

유태계 독일인이자 젊고 유능한 사업가였던 아티의 아버지 블라덱은 독일에서 꽤나 잘나가는 축에 드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서서히 힘을 얻고 그 힘을 통해 독일 전역에 반 유태인의 정서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블라덱의 사업과 신상 또한 위협에 직면합니다.

나름 상류사회에서 잘생긴 외모와 재력으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던 블라덱은 점점 커져만 가는 위협을 피해 도주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나치가 좀 더 빨랐고, 블라덱과 그의 가족 그리고 함께 위협을 받는 유태인 친구들은 하나씩 죽거나 수용소에 끌려가는 악몽을 맞이합니다.

이미 『안네의 일기』<쉰들러 리스트>와 같이 다양한 컨텐츠에서 2차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은 상세하게 다뤄진 바 있습니다. 게다가 ‘유태인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는 종전 이후 독일 정부의 진정성 담긴 사죄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과 홍보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매우 익숙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2차대전 중 유태인이라는 소재를 슈피겔만은 보다 충격적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듬어 냅니다.

아트 슈피겔만
(Art Spiegelman, 1948~)
『쥐』가 새로울 수 있었던 요소 중 첫 번째는 바로 만화라는 장르의 활용입니다. 애쫃에 만화는 ‘비틀기’를 기반으로 하는 컨텐츠입니다. 미술보다 단순하고 가벼운 터치라는, 축약의 본성을 지니는 만화의 기법은 그 축약 속에서 모사의 대상을 과장과 강조라는 기법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른바 ‘기술적 풍자’라 불릴 수 있는, 모사 대상의 본질보다 더 본질스러운 드러내기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만화의 기법 자체를 슈피겔만은 또 한번 꼬아 사용합니다. 애초에 만화는 풍자의 기초가 되는 과장과 강조가 기본 기법인 장르입니다. 그렇기에 자칫 가벼워질 수 있는 장르의 특성을 저자는 서두에 밝힌 바 있듯이 다분히 전위적인 화풍으로 다시 그려냅니다.

『씬 시티』에서나 볼 법한 흑백의 거친 톤, 웃는 표정마저도 메말라 보이는 앙상한 화풍 등을 통해 『쥐』는 삭막했던 2차대전 당시의 동유럽 풍경과 거대한 공포 앞에 전율했던 인간의 모습을 발랄한 풍자가 아닌 어두운 풍자로 그려 냅니다. 그러한 표현 덕택에 만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담담한 입장에서도 그릴 걸 다 그려내는 효과를 얻습니다.

이 ‘담담함 속의 표현’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쥐』의 서사 구조입니다. 직접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만화 속의 시간은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오갑니다. 2차대전 시기에 공포에 맞서던 젊은 사업가였던 아버지 블라덱은 각종 알약 속에 끊임없이 신경질을 내는 미국의 늙은이로 등장합니다. 명백하게 달라진 같은 인물의 두 가지 모습을 계속 대비시키면서 화풍으로 표현했던 그 담담하고 메마른 서사는 더욱 부각됩니다.

공포와 전율의 시기에 대한 이런 담담한 묘사는 캐릭터의 설정으로 더욱 강해집니다. 『쥐』는 말 그대로 ‘쥐’가 주인공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동물로 그려집니다. 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와 같은 형태입니다. 심지어 유태인 블라덱이 신분을 숨기고 가는 기차 여행에서는 쥐가 돼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잔인하고 냉혹했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묘사가 인간으로 그려졌더라면 독자에게 전달되는 감상은 보다 처절했을 것이지만, 이를 동물로 표현하면서 『쥐』는 보다 냉정한 입장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하는 효과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의 강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쥐처럼 다락방과 창고의 비밀 공간에 숨어 살던 유태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쥐였고, 그런 유태인을 잡아다 가스실에 처넣는 독일인은 고양이로의 비유에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태의 주변인이면서도,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쥐를 고양이에게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쥐를 숨겨주기도 하는 제3자 폴란드인은 돼지로의 비유에 손색이 없습니다.

저자의 이런 냉정한 시각은 심지어 피해자인 유태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블라덱은 책 서두에서 아예 ‘친구 따위는 먹고살만하니 있는 거다. 배고프고 춥고 위험한 상황을 겪어보면 친구가 뭔지 알 수 있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만화 『쥐』 전체에서 드러나는 인간 자체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 대전 중에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인간이 할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쥐』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같은 유태인이 유태인을 나치에 팔아넘기면서 먹고사는 경우도 많았고, 유태인을 숨겨주어 인정 많은 것으로 여겨졌던 폴란드인들도 결국 유태인의 돈이 떨어지면 바로 신고해버리는 장면도 자주 등장합니다.

굳이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정작 인종차별의 최대 피해자였고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주인공 블라덱은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움직이다가, 아들이 지나가는 흑인을 태워준 사실에 분개하며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흑인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지요. 피해자가 새로운 핍박자를 만든다는 이 이야기는 마치 오늘날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듯한 뉘앙스마저도 풍기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냉소가 『쥐』를 있게 한 요소입니다. 기존의 컨텐츠들이 유태인 대학살을 다루던, 피해자로서쟀 유태인 시선에서 벗어나 『쥐』는 2차대전 당시 인간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인간 대학살을 말 그대로 인간의 시선에서 조망합니다. 피해자인 유태인도 결국 인간이고, 오늘에 와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핍박하고 차별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독일인과 유태인도 인간의 도덕이라는 허울을 쓰긴 하지만 절박한 그 상황이 오면 결국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 다분히 성악설에 기초한 저자의 관점은 모든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냉소로써 표현하여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최악의 사건을 다분히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측면으로 접근합니다.

2차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을 이미 알고 있는 이에게도 또다른 충격을 전해 주는 『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읽는 이의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도 전해 줍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사건을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진실하게 묘사해 버린 데서 책은 매력을 발산합니다. 그 가슴 깊은 전율과 불편한 진실이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말로 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합니다.

참고로, 굳이 이와 같은 제목의 책을 고른 이유가 시국상의 이유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둡니다. ‘오해’가 많은 세상이니 언급해 두는 게 안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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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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