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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의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 『파리대왕』

1950년대는 그러한 비판적 사유가 보편화된 시기였고, 그 속에서 나온 소설 『파리대왕』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무인도 불시착’이라는 실험적 기제를 통해 풀어낸 걸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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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계란 참 끝을 알 수 없이 복잡해서, 하나의 사건과 사고에도 개입하는 요소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쇠고기 문제로 촉발된 최근 일련의 사태만 해도 그 원인에 대해 짚는 방식이 가지가지이고, 결과 또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험이라는 기법을 도입합니다. 통제와 조절이 가능한 변수들을 남기고, 그 외의 변수들은 모두 고정시키거나 제거하여, 조절하는 변수가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이지요. 자연과학 분야에서 이 기법은 큰 성공을 거두어, 지금 여러분이 단지 액정만 가득 들어찬 화면을 통해 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나마의 기법도 사람의 삶을 건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러한 실험은 문학과 같은 예술 장르를 통해 가상의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보다 손쉬운 이해를 가져옵니다.

아마도 오늘 소개해 드릴 책 또한 그러한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인간을 탐구했던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윌리엄 골딩의 1953년 작 『파리대왕』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주제를 특정한 실험적 구조 안에 두고 그 내면과 본성을 탐구하는 실험적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험대상인 인간은 인간 무리, 그중에서도 어린아이들입니다.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관습 중 작가의 탐구 대상은 선천적인 쪽이었고, 그랬기에 아직 완벽한 사회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소년 그룹 수십 명을 비행기 불시착이라는 소재를 통해 무인도에 떨어뜨립니다. 이들은 완전한 사회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자연인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문명과 사회가 만든 기본적인 구조적 도구들을 간단하게나마 사용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핵전쟁의 위기라는 전체적인 배경 속에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몸에 밴 조직성과 사회성을 바탕으로 하여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를 꾸립니다. 소라껍질 나팔 소리로 집결한 아이들은 나름의 조직을 구성하고, 생존과 구조를 위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냥, 불 피우기, 집짓기, 요리하기 등 집단 생존에 필요한 많은 행동들을 스스로 만들고 분배하며 무인도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어쨌든 수십 명의 소년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구성되고, 각각의 포지션이 나타납니다. 소설의 주인공 격이라 할 수 있는 랄프는 맨 처음 소라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은 덕에 소년 그룹의 리더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그 리더의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소년 잭은 오로지 구조를 위한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는 랄프와는 달리, 사냥을 통한 생존과 자기보호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대립합니다.

소설 『파리대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무인도 속 고립된 사회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대변합니다. 그룹의 리더인 랄프는 소라껍질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데, 처음 소라껍질을 나팔로 사용하여 생존자를 모으고, 소라껍질을 일종의 발언권으로 사용하여 민주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민주적 사회제도의 틀을 만들고 유지하면서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들―불을 피워 구조신호를 보내는 일 등―을 최우선으로 삼는 랄프는 문명과 이성에 대한 철저한 옹호자이며, 무인도의 소년그룹 또한 동일한 질서를 통해 유지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이에 대적하는 잭은 질서보다 본능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 줍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그는 구조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생존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불은 고기를 익혀 먹기 위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가옵니다.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동물적 본능을 살려 그는 사냥에 일가견을 발휘하며, 이는 곧 무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거친 자연에 맞서 살아날 길로 공격적인 본능을 따르는 그는 랄프와 대척점에 서 있으며, 이성이 도래하기 이전 시대에 인류가 구성했던 사회제도의 표본입니다.

둘의 대립 외에도 랄프의 곁에 붙어 있는 피기라는 인물 또한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육중한 몸매와 둔한 동작으로 거친 야생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는 피기는, 그러나 놀라운 아이템을 하나 지니고 있는데, 나쁜 시력 덕택에 가지고 있는 안경입니다.

그의 안경은 볼록렌즈로, 태양광을 모아 손쉽게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입니다. 피기는 피기라는 인물 캐릭터보다도 먼저 그가 가진 안경이라는 도구로 인해 주목받습니다. 랄프의 입장에서 불을 피워 구조신호를 보내든지, 잭의 입장에서 사냥한 고기를 굽든지 간에 피기와 피기의 안경은 유용합니다.

광학이 발견되고 그 힘이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 즈음인데, 이 발견의 산물을 가지고 있는 피기 자체는 대단히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는 랄프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적극적인 지지자는 되지 못합니다. 아마도 정치적 입장 없이 이리저리 이용되는 과학자, 지식인 정도의 표상인 듯한 피기는 피기 자신보다 안경에 집착하는 주변의 환경 덕에 소외되며,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던 ‘도구화된 이성’으로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소년들은 처음에는 모두 랄프의 지휘 아래 살아가지만, 이른바 ‘괴물’의 출현을 통해 상황이 뒤바뀝니다. 잭은 섬에 괴물이 있다는 루머를 통해 소년들 속에 공포를 심어주며 일종의 무장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위협적인 환경에 두려움을 느낀 소년들은 하나둘씩 랄프의 곁을 떠나 잭에게 가담합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공포 앞에서 민주적 질서는 붕괴하고, 잭은 이러한 습성을 파악하고 일종의 종교적 제의와 희생물을 통해 공포를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로 랄프의 시민사회는 붕괴하고, 이성이 배제된 야만적 질서에 기반한 잭을 중심으로 소년들의 사회는 새롭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공포와 광기의 본능이 소년사회 전체를 지배하면서 섬은 공포의 도가니로 변합니다. 한번 공포로 형성된 질서는 끊임없는 공포를 필요로 하는데, 최초로 ‘괴물’로서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실체가 추락한 조종사의 시체였음이 드러나면서 잭의 사회는 또 다른 희생물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로 피기가 죽고, 갈수록 피의 집착이 강해지면서 마침내 랄프의 생존까지 위기에 닥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소설의 제목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은 이러한 지옥도가 나타나는 이야기 전체에 방점을 찍는 제목입니다. 파리대왕의 본 이름은 베엘제붑, 벨제뷔트, 페르제바브 등으로 불리는데, 중세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3대 악마(베엘제붑, 루시퍼, 아스타로트) 중 가장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파리라는 상징물이 암시하듯이, 파리대왕은 교활함이나 악랄함보다는 보다 더럽고 본능적인 형태의 악을 상징하는 형태로 자주 등장하며, 소설에서 결국 소년 집단이 보여주는 처절하고 본능적인 피의 잔치를 상징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잭’을 가리켜 파리대왕으로 칭하지 않는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악마는 특정한 인간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 절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측면이라고 소설은 에둘러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애써 어설픈 질서를 유지하려고 랄프에 곁에 섰던 아이들도 결국 공포에 대한 본능적 방어행동으로 잭에게로 돌아서는 모습은 결국 인간의 본능에서 출발하는 악의 시점을 가리키는 묘사입니다.

잭의 집단은 완벽하게 야만사회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잭 일당은 안경이라는 근대 과학 도구를 사용해 불을 피우며, 수렵에도 도구를 이용하고 그들의 생활은 나름의 조직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세계를 읽는 의도를 보여 줍니다. 저자는 인간 이성이 만들어 온 역사와 질서는 인간의 본능에 의해 한순간에 악의 의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소설이 발표된 1953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또한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에 의한 첫 전쟁인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특히나 서구권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피워 낸 문명의 이기들이 독가스와 미사일, 원자폭탄 등 대량 살상의 도구를 낳았다는 사실에 무한한 공포를 느낀 시대였습니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주도했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성 비판과 소설 『파리대왕』은 일련의 맥을 같이 합니다. 둘 다 2차 대전 이후 인간이성이 만든 끔찍함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했고,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구별하면서 효율과 합리만을 추구하는 근대 이성에 대한 비판을 시작합니다.

『파리대왕』에서 나타나는 소년들의 대립하는 모습도 어찌 보면 그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일 것입니다. 도구와 과학의 발달은 합리적 사고라는 이성의 본질적 모습을 결국 해치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러한 장면은 2차 대전에서 과학기술이 만든 대량 살상의 현실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헤겔까지만 해도 이성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지고한 가치였고, 인간이 손대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원거리에 위치했다고 여겼지만 그 결과는 양대 대전을 겪으며 여지없이 무너졌고, 그 잿더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달려온 길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는 그러한 비판적 사유가 보편화된 시기였고, 그 속에서 나온 소설 『파리대왕』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무인도 불시착’이라는 실험적 기제를 통해 풀어낸 걸작이었습니다.

대전이 끝나고 나름 대량 살상의 위기는 전 세계의 이성들이 모두 모여 경계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도구적 이성의 위험성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한 로직과 프로세스로 구성된 수많은 투자 및 경영방식은 효율과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를 휘젓고 있고, 이러한 거대 자본의 이성에 기반한 움직임 속에 많은 이들이 1년 전과 똑같이 일하면서도 그 생존 기반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 공포를 피하기 위해 또 다른 금융상품에 자신의 재화를 털어 넣는 현실은 총칼에서 화폐로만 바뀐 채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대량 살상의 도구적 이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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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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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저/<유종호> 역8,100원(10% + 5%)

비록 장교의 눈에는 소년들의 삶의 투쟁이 재미있는 놀이로 비춰졌을지언정 소위 성인들이 저지른 인간본성의 적나라한 표출은 소년들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섬 소년들이 장악한 그곳에서 그들 사이의 음모와 권력 그리고 편가르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저자는 소년들의 벌거벗은 몸뚱이마냥 우리 사회를 그려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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