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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쌀밥 한 그릇

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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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쌀밥, 너 오랜만이다

엄마는 내가 아파 칭얼대면 늘 이런 말로 나를 달랬다.

“미역국에 쌀밥 말아주께 언능 인나소 와.”

무엇무엇 하소 와, 라고 전라도 엄마들이 말할 때, 아픈 전라도 아이들은 혼몽 중에도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번지기 십상이었다. 더군다나 미역국에 쌀밥이라니. 사시사철 국이라곤 막된장 푼 토장국이었다. 미역국은 생일날과 명절에만 먹는 국이었다. 그런 귀한 국에 보리밥도 아니고 무밥도 아니고 조밥도 아니고 고구마밥도 아닌 쌀밥이라니!

미역국에 쌀밥이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나도,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말한 것은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임을. 엄마는 김이 펄펄 나는 미역국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 한 그릇을 오지게 말아 내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내가 나을 것만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아픈 입에 사실 토장국은 그 얼마나 짜고 쓴가. 그리고 사실 말해서 된장국, 토장국에는 쌀밥보다는 보리밥이 어울린다. 만날 먹는 게 보리밥이라서, 그래서 또 만날 우리 동네 가난한 사람들은 된장국만 끓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금도 아이들이 아프면 미역국에 쌀밥을 한다. 아무리 잡곡밥이 몸에 좋다 해도 아플 때는 미역국에 쌀밥이 최고다.

쌀! 쌀을 발음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쌀은 그냥 쌀이라고 안 해지고 늘 ‘귀한 쌀’이라고 저절로 뇌어진다. 귀한 쌀. 쌀은 정말로 한 톨도 귀했다. 언젠가 보리밥에 뉘처럼 끼어 있는 하얀 쌀 한 톨을 발견하고 나는 내 밥에 쌀 있는 거 누가 볼세라 가슴이 막 뛰기까지 했었다.

밥을 손에 들고 호호 불면서 마치 빵처럼 뜯어 먹던 사람들

우리 집은 논이 없었다. 농촌에 살면서 논 없이 사는 것처럼 고달픈 것이 없다. 논 많은 집은 그 많은 농사 다 지어 먹고 사느라 고달프겠지만, 논 없는 집은 사시사철 그놈의 쌀 결핍증으로 고달프다. 촌에서 쌀 없으면 돈 사기도 어렵다. 쌀 한 되가 삼천 원이라면 그 삼천 원을 사기 위해 보리쌀은 열 되를 퍼주어야 한다. 그러니 고달프다. 돈을 사서 학비를 하고 가용을 하자면 배를 곯아야 하기에.

그럼 논 없으면 쌀이라고 생긴 건 구경도 못할쏘냐. 그런 건 아니다. 쌀이 꼭 논에서만 나느냐. 쌀은 밭에서도 난다. 그 이름하여 산두쌀. 아버지는 논 살 돈을 마련하러 서울로, 어디로 돈 벌러 다니고,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산두쌀을 뿌렸다. 논에는 모를 심지만 밭에는 보리처럼 씨를 뿌린다. 남들이 논에서 논매기를 할 때 엄마랑 우리는 밭매기를 한다. 그래도 희한한 건 가을걷이할 때 사람들이 우리 집 산두쌀이 맛있다고, 그렇게 쌀 많은 집들이 우리 집 산두쌀 맛 좀 보자고 자꾸자꾸 우리 집에 오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냐고, 그러지야, 하고 귀하기가 금쪽같은 산두쌀밥을 푹푹 퍼준다. 사람들은 손에 들고 호호 불면서 밥을 마치 빵처럼 뜯어 먹는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쌀을 갖다 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은 쌀을 갖다 줘도 꼭 아무도 안 볼 때 살짝 놓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우리 집 뚤방(*토방의 전라도 방언.)에 쌀 함지가 놓여 있는 줄도 모르고 새벽에 변소를 가다가 그만 함지를 엎어뜨린 적이 있다. 그 쌀은 누가 갖다 줬을까. 시어머니 눈 무서워 야밤을 틈탄 어느 집 며느리였을까. 밥을 빵처럼 뜯어 먹던 주막 아짐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쌀이 하얗게 흩어진 모습은 마치 꿈속 같았다.

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한테서 쌀을 빼놓고는 사실 아무 얘기도 할 수가 없다. 쌀은 단순히 입 안으로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이루고 정신을 이룬다. 쌀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처음과 끝이다.


한 그릇 쌀밥 속에 가득한 향기, 소리

초등학교, 중탇교 시절 농번기라는 것이 있었다. 모내기철, 추수철이 바로 농번기다. 농번기에는 모든 아이들이 수업을 중단하고 모내기, 나락 베기 노력봉사를 나갔다. 모내기철에는 새벽부터 애향단(愛鄕團) 깃발 아래 그날 모내기할 논으로 간다. 고학년들은 모판에서 모를 찌고 저학년들은 모내기할 논으로 못다발을 나른다. 온 들판에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새까맣게 나와서 모를 낸다. 시꺼먼 거머리가 장딴지에 들러붙어 피가 줄줄 흐르는 줄도 모르고 모를 낸다. 못줄을 잡고 있던 도회지 출신 여선생님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아이들은 거머리에 물린 줄을 안다. 그 선생님이 나중에 헌 스타킹을 갖다 줘서 우리는 난생 처음 스타킹이라는 것을 신고 모를 내기도 했었다.

넓은 들에서 하루 종일 모내기 노력봉사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애향단 깃발 아래 행진을 하였다. 그러다가 산모롱이 다랑논에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 둘이서 외롭게 모심기하는 것을 보고 또 이 애향단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쭐우쭐 논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온달만큼 남았던 논을 반달만큼, 초승달만큼, 손톱만큼, 그러다가 다 심었다. 모내기 끝난 논물에 석양빛이 붉게 붉게 담겨 있었다. 석양빛은 아이들 얼굴에도 붉게 붉게 채색되어 있었다.

논둑길을 밟으며 ‘맹호부대 용사들아’(베트남 파병부대의 군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은 마치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전사들 같았다. 모내기 노력봉사를 하고 돌아온 컴컴한 집에 엄마는 없었다. 내가 남의 집 논에 모내기를 하는 동안, 엄마는 하루 종일 산밭에서 산두밭을 맸을 것이다. 내가 엄마를 마중 나가면 엄마는 저만치 어둠 속에서 손에 호미를 쥐고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뒤에서 보름달이 엄마를 따라오고 엄마 옷자락에서는 찔레꽃 향기가 났다.

한 그릇의 쌀밥 속에서 나는 찔레꽃 향기를 맡는다. 쌀밥 속에 들어 있는 게 어디 향기뿐인가. 쌀밥을 보면서 나는 뻐꾸기 소리도 듣는다. 내가 밥을 먹으면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소리도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온다. 만날 여름만 계속되는 베트남 쌀보다 우리나라 쌀이 맛있는 이유는 아마 봄의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소리, 여름의 매미 소리와 칡꽃 향기, 가을의 국화꽃 향기와 바람 냄새, 쓰르라미 소리들이 모두 그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아, 쌀밥 해줘어

쌀이 없다면 생일도, 명절도, 제사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쌀이 없으면 사는 것이 아무 재미도 없을 것이다. 요즘이야 모든 맛난 것이 다 밀가루로 되어 있지만, 우리게 아이들에겐 밀가루로 해 먹는 맛난 거라야 막걸리 넣은 빵 정도. 모든 맛난 것은 다 쌀로 해 먹었다. 평소에 쌀밥은 못 해 먹어도 명절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쌀로 만드는 모든 것을 했다. 논 한 뙈기 없던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겨우내 동네에는 튀밥장수가 들어와 살았다. 쌀 한 되하고 사카린 서너 알, 장작 두어 개를 들고 가 튀밥을 튀겨가지고 와서 그냥도 먹고 ‘옥꼬시’도 만들어 먹었다. 쌀튀밥을 따끈따끈한 조청에 버무려서 방망이로 판판하게 치대어 칼로 썩둑썩둑 썰어놓은 게 옥꼬시다. 우리말로 하고 싶어도 엄마가 ‘옥꼬시 옥꼬시’라고 하시던 통에 나도 그냥 옥꼬시라고밖에는 어떻게 말하기가 그렇다.

쌀로 만든 것 중에 또 하나 맛난 것은 유과다. 나는 완성품 유과보다, 유과가 되기 전의 과정 속에 있는 쌀들이 더 맛있다. 유과를 하려면 찹쌀에 소금을 조금 넣고 고두밥을 찌는데, 갓 쪄나온 약간 간이 든 찹쌀 고두밥은 진짜 맛있다. 나는 그것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다. 그 다음에는 청주를 조금 넣고 고두밥을 확독에 친다. 약간 달고 약간 술맛이 나면서 고두밥은 이제 쭈우쭉 늘어지는 떡이 된다. 그 떡이 또 그렇게 맛있다.

그것을 고물을 뿌린 암반 위에 편 다음 홍두깨로 판판하게 민다. 그런 다음 밥그릇 같은 것을 놓고 동그랗게 잘라서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흰 종이를 깔고 말린다. 꼬득꼬득 말라가는 그것이 또 나는 왜 그렇게 맛있던지, 엄마 몰래 솔개솔개 잘도 ‘돌라’ 먹었다. 적당히 잘 마르면 드디어 무쇠솥 안에 곱돌을 구워서 유과를 구운 곱돌 위에서 굽는다.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유과를 기름에 튀기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요새 먹는 유과의 고소한 맛은 기름 맛이던가?

아, 아무리 이러고저러고 해도, 쌀로 만든 것 중에 가장 맛있던 것은 쌀밥이더라! 방앗간에서 막 찧어온 푸르스름한 햅쌀로 가마솥에 지어낸 푸짐한 쌀밥 한 그릇이더라! 내가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눈물 그렁한 채 무수히 외었던 그 말, ‘엄마아, 쌀밥 해줘어’ 했던 바로 그 밥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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