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에 희끗희끗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건만 검은 ‘맘보 쓰봉’에 ‘나이롱 샤쓰’를 입은 아홉 살 나는, 그리고 내 동무들은 쑥을 캐러 동네 앞들로 나갔다. 언제나 내게 봄에 대한 첫 기억은 쑥에 가 닿는다. 그것도 코끝을 아리게 하는 알싸한 슬픔의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알싸하면서도 왠지 포근한 슬픔.
나는 다만 자연의 아이였을 뿐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혹여 지금쯤 봄이 왔을까, 아직 안 왔다면 봄은 지금 어디만큼 오고 있을까를 가늠하러 들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니 어린애가 참 요망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기다림에 대한 기억, 기다림 끝에 다가온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의 기억,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다 자연에서 얻은 것이다.
내 온몸, 내 온 마음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나도 잊어먹고 있는 수많은 감성들, 기쁨, 슬픔, 고통, 막막함, 설렘 들은 내가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으리라. 비 오면 비 온다고 가슴 설레고, 해 나면 해 난다고, 밤 되면 밤 온다고 혼자 가슴 두근거리는 삶은 결코 살지 않았으리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지명은 전라남도 곡성이지만 내 고향은 곡성이라기보다 자연이다. 내게 먹을 것을 끊임없이 내보내준 흙과 물과 공기와 햇빛과 별빛과 새소리와 꽃향기…… 그것들이 나를 키웠다. 그것은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난 이도 그럴 것이고 삼천포에서 태어난 이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루하루 밤과 낮을 보내면서 자연이 준 먹을거리를 먹으며 산다. 봉화 사람은 봉화가 키운 게 아니고 봉화의 자연이 키웠다.
곡성 사람인 나도 그렇다. 나는 다만 자연의 아이였을 뿐이다. 자연의 아이들은 비 오면 비 온다고 가슴 설레고, 해 나면 해 난다고, 밤 되면 밤 온다고 혼자 가슴 두근거리게 되어 있다. 그것이 그렇다.
봄이면 우리를 홀리던 그 냄새들
쑥은 내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서가 혼합된 상징이다. 먼 산에 희끗희끗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건만 검은 ‘맘보 쓰봉(*맘보 바지.)’에 ‘나이롱 샤쓰’를 입은 아홉 살 나는, 그리고 내 동무들은 쑥을 캐러 동네 앞들로 나갔다. 빨래터를 지나고 저수지 둑길을 지나고 계단식 논둑길을 지나, 뒤로는 자그마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바람이 드세지 않고 양지쪽이라서 햇빛이 잘 드는 묏등으로 갔다. 그때가 아마 봄방학 때였으니까 정월 보름에서 이월 보름 사이께나 되지 않을까.
칼과 바구니를 들고 양지쪽을 아무리 훑어봐도 쑥은커녕 ‘쑥 같은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캘 수 있는 것은 뽕나무 밑에 우북우북 자라 있는 달래, 냉이, 광대나물뿐이었다. 그것들을 캐면서 우리는 푸념처럼 노래 불렀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다고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옛날 촌에 살았던 가시내들은 왜 그렇게 쑥을 캐고 싶어했을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나와 우리 동네 가시내들은 산으로 들로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봄이면 나물 뜯는 것이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뜨개질하기가 일이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동네 가시내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나물을 캐러 온 봄내 들로 산으로 쏘다녔었다.
쑥은 주로 불탄 자리에서 많이 돋아난다. 봄 햇빛을 받으며 병아리 부리처럼 뾰족 돋아난 해쑥을 무쇠 과도로 쏙쏙 도려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마음이 고요해진다. 우리 동네 가시내들은 학교 갔다 오면서도 책보자기 풀어놓고 연필 깎는 칼로 쑥을 캤다. 봄에 쑥 캐기는 거의 본능적 습관이었다. 집에 와서도 또 바구니 들고 나가서 쑥을 캤다. 쑥은 아무리 많이 캐도 삶아놓으면 한 주먹밖에 안 된다. 특히 해쑥이 그렇다.
그렇게 캐온 쑥으로 그해 첫 쑥국을 끓여 먹는 밤, 온 집 안에는 은은한 쑥 향기가 떠다니곤 했다. 김치는 이미 시어빠져 묵은지가 된 지 오래, 만날 군둥내 나는 김칫국만 끓여 먹다가 내 손으로 캐온 쑥으로 쑥국을 끓여 온 식구가 ‘와아, 진짜 봄은 봄이로구나’ 하면서 새로운 쑥국을 먹고 난 밤은 왜 그리도 행복하던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밤을 꼽으라면 바로 그렇게 그해 첫 쑥국을 끓여 먹었던 밤이다. 쑥국을 양껏 먹고 난 밤에는 마음속 가득 희망의 새순이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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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 먹고 자란 것들을 둘러싼 환경들, 밤과 낮, 바람과 공기와 햇빛,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과 감정들이 실린 스물여섯 가지 먹을거리 이야기을 담은 음식 산문집. 봄이면 쑥 냄새를 좇아 들판을 헤매고, 땡감이 터질듯 무르익는 가을이면 시원한 추어탕 한 솥을 고대하던 지난시절의 기억들을 소복한 흰 쌀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