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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함께한 생애

겨울에 떠오르는 먹을거리 하면 누구는 찹쌀떡, 누구는 메밀묵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고구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가 아니라, 집에서 쪄 먹는 고구마. 겨울밤 간식거리로 가장 만만한 건 언제나 고구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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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떠오르는 먹을거리 하면 누구는 찹쌀떡, 누구는 메밀묵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고구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가 아니라, 집에서 쪄 먹는 고구마. 겨울밤 간식거리로 가장 만만한 건 언제나 고구마뿐. 내 기억 속 먹을거리 중에 고구마는 언제나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내 허기를 달래준 음식이다.

절하고 싶도록 달았던 그 뿌리

옛날에는 참 쌀을 아꼈다. 나 또한 쌀같이 귀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줄 알았다. 귀하고 또 귀한 것이 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쌀을 아껴 먹었다. 도장방(*쌀이나 곡식을 보관하는 방.)은 언제나 서늘했다. 그 서늘한 방에 언제부터 그 용도로 쓰이게 됐는지 가늠할 수도 없이 오래된 오지단지(*옹기로 만든 큰 쌀통.) 안에 쌀을 그득히 담아두고도 겨울이면 사람들은 언제나 하루 한 끼쯤은 고구마로 때우는 것을 당연하게들 여겼다. 하루 삼시 세끼를 모두 밥으로 먹으면, 무슨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겨울 점심때쯤 마을 골목 안에는 삶은 고구마 냄새가 자우룩이 퍼지곤 했던 것이다. 고구마 뒤주는 안방 아랫목께 귀퉁이에 있었다.

초여름 어느 비 오는 날, 한창 모내기에 바쁘지만 그래도 한나절 짬을 낸 아낙들은 고구마 줄기를 바구니에 담아 이고 산밭으로 갔다. 고구마 순은 언제나 여자들이 심었다. 가위로 줄기를 잘라 땅에 묻으면 고구마 순은 처음에는 땅에 적응하느라 혹은 비실비실하고 혹은 누리끼리했다가 어느 날부턴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아낙들은 고구마밭 김을 매고 북을 주었다. 그러다가 백 중쯤 되면 손가락만 한 새끼 고구마가 뿌리 밑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이나 애들 간식거리가 궁한 집에서는 아직 맛도 들지 않은 그 새끼 고구마를 캐다가 보리밥 위에 쪄 먹기도 했다.


고구마는 추석 무렵이나 되어야 제법 튼실해지고 단맛도 배어들어서 추석에 많은 음식을 장만할 형편이 못 되는 집들은 끝물 옥수수와 첫물 고구마를 추석 음식으로 내어놓기도 했다. 옥수수는 끝물이라 아쉬운 마음이 들어 맛있고, 첫물 고구마는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향기가 정말 달콤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첫물 고구마의 향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그 맛은 또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 햅쌀, 햇밤, 햇대추가 그렇듯이, 햇고구마는 그냥 고구마가 아니라 거의 축복이다. 자연의 축복! 그러니 따로 이것저것 추석 음식을 장만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튼실한 옥수수와 뽀오얀 고구마를 삶아 집에서 가장 예쁜 바구니에 정갈히 담아 내놓을 때, 식구들은 그 음식들에 절로 경배를 드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추수가 끝나고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 식구들은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는 언제나 모든 가을걷이가 끝났을 때 거두게 마련이다. 어느 집도 다른 일 제쳐 두고 고구마부터 거두는 집은 없다. 그러고 보니 고구마는 처음 땅에 심겨질 때도 그랬다. 모내기가 한창이라 누구도 밭에 고구마 심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언제 심어놨는지도 모르게 밭에 고구마 순을 심어놓는다. 그 누군가는 바로 언제나 그 집의 엄마들이다.

고구마를 거둘 때도 대개 아버지들은 엄마와 아이들이 고구마를 다 캐 놓았을 때 나타나기가 십상이다. 엄마와 아이들이 캐놓은 고구마를 아버지들은 커다란 바지게에다 가득 담아 져 나른다. 집 안방에는 이미 커다란 고구마 뒤주를 만들어놓았다. 겨우내 쌀과 함께 두고두고 그 집의 양식이 되어줄 고구마가 뒤주 안에 가득 쌓일 때쯤, 동산에는 소슬한 밤하늘에 달이 떠 있고 브이(V) 자를 이룬 기러기 떼가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고구마와 함께 긴긴 겨울을 나게 되는 것이다.

너무 노래서 민망한 고구마밥 한 주걱

겨울 초입부터 사람들은 지겹다면 지겹고 정답다면 정다운 고구마를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를 연구한다. 고구마를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그냥 날것으로 먹는 것이다. 문풍지가 바람에 더르르 떨고 물 묻은 손을 대면 문고리에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엄동설한 긴긴 밤에 출출한 배를 달래줄 간식거리로는 곶감이나 홍시가 그 중 으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고급이었으므로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겨울밤 간식거리로 가장 만만한 건 언제나 고구마뿐. 저녁밥 먹을 무렵 눈밭에 고구마 몇 개를 휙 던져놓았다가 부엉이조차 울다 지칠 무렵, 땡땡 언 고구마를 깎아 먹는 맛이란!

겨울 아침이면 언제나 부엌문 틈으로 고구마밥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올 때쯤 눈이 떠진다. 쌀은 눈을 씻고 살펴봐야 희끗희끗한 저것이 쌀이로구나 싶고, 고구마밥은 순전히 조밥이다. 누런 조와 고구마가 대종을 이룬 속에 너무 노라면 어쩐지 민망할까 봐 구색 맞추느라고 쌀 한 홉 넣은 밥. 고구마밥은 밥그릇에 담을 때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냥 훌훌 섞어서 푸면 제대로 된 고구마밥을 먹을 수가 없다.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치대듯이 하면서 퍼야 밥이 부드러워진다.

그 밥을 먹고 산에 나무하러 갔다 와서 이제 또 점심으로는 동치미 한 보시기, 김치 한 보시기에 김이 설설 오르는 고구마 한 양재기를 밥상에 떠억 하니 올려놓는다. 고구마에서는 다디단 물이 흘러나와서 손가락이 찐득찐득해진다. 일명 물고구마다. 그런 물고구마로는 고구마조청을 해 먹으면 그만이다.

엄마는 설에 떡을 찍어 먹으려고 설이 아직 멀었는데도 미리 고구마조청을 고았다. 엿기름물에 고구마를 삶는 것도 아니고 찌는 것도 아니고 달이는 것도 아닌 폭폭 고는 것이다. 어찌나 오랜 시간을 고았는지 어느 해인가는 고구마조청을 달여 먹은 양은솥 밑에 ‘빵꾸’가 났다. 설에 쓰려고 고아놓은 조청을 나는 산에 나무하러 가기 전에 한 입, 나무해 가지고 와서 한 입, 썰매 타러 가기 전에 한 입, 썰매 타고 와서 한 입, 야금야금, 솔개솔개 퍼먹어버렸다. 어느 하루는 그렇게 퍼먹은 조청 때문에 속이 ‘다려서’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속에서 꼭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고구마조청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은 쑥떡이다. 그것도 쌀이 많이 안 들어가고 거칠거칠한 쑥이 태반인 쑥떡, 낭글낭글한 쑥떡을 조청에 찍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면 목구멍 안에서 ‘쑤욱떠억’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거칠거칠한 쑥떡을 고구마조청에 찍어 먹었던 설도 지나고 정월 보름께쯤이면, 뒤주 안 고구마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러는 썩고 더러는 쥐가 갉아먹고, 그야말로 보릿고개가 다가온다. 고구마가 떨어지면 보릿고개다. 쌀은 그렇게도 아껴 먹었건만 언제나 고구마보다 먼저 떨어졌다. 그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겠다. 쌀은 바로 돈이었기 때문이다. 쌀 한 됫박, 두 됫박으로 돈을 샀기 때문이다.

삼월 삼짇날께가 돌아오면, 집집마다 썩은 고구마 삶는 냄새가 진동한다. 고구마 뒤주를 헐어서 나온 썩은 고구마와 잔챙이 고구마를 삶아서 최후의 고구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삶아진 고구마를 엄마들은 채반에 널어서 봄볕에 말리기도 했다. 긴긴 봄날, 학교 갔다가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면 채반 위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는 고구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 기억 속 먹을거리 중에 고구마는 언제나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내 허기를 달래준 음식이다. 고구마 없는 내 한 생애를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행복한 만찬>은 ‘달’과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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