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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아침 일일연속극 - 『흙』

실제로 『흙』을 읽어 보면, 한편으로는 숭고한 계몽 정신에 대한 고취가 숨쉬면서도 그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이 전체 줄거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괜히 당대 최고의 인기 연재소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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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텔레비전이 가정마다 일반적으로 보급된 요즘 시대에는 TV 드라마가 최고의 대중적 이야깃거리입니다. 인터넷, 케이블TV와 같은 뉴미디어의 확산이 적었던 90년대까지만 해도 TV 연속극은 놀라운 시청률과 집중률을 보유하며 전 국민을 울리고 웃긴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이야기에 즐거워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없는 모양입니다. 90년대 한국 안방극장에 김수현이 있었다면, 그보다 약 60여 년 전에는 신문 연재소설이 있었습니다. 당대 신문의 양대 산맥이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각각 당대 최고의 소설가들이 연재하던 소설이 맞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동아일보의 이광수가 연재한 『흙』과 조선일보에 연재한 염상섭의 『삼대』입니다.

일반적으로 이광수의 『흙』은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브나로드 운동’에 관련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능 국어 교재에서 필수적으로 나오는 항목이기도 한데, 『흙』을 꼭 그렇게만 읽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흙』을 읽어 보면, 한편으로는 숭고한 계몽 정신에 대한 고취가 숨쉬면서도 그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이 전체 줄거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괜히 당대 최고의 인기 연재소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허숭은 당대의 전형적인 고학생입니다. 시골에서 상경해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지만, 딱히 학비와 생활비가 넉넉한 편이 아니라 서울 윤참판 댁에서 이것저것 일도 보고 가정교사 노릇도 하며 학업을 이어갑니다.

고등고시를 통과해 변호사가 된 허숭은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세련된 여자이자 윤참판의 딸인 정선과 결혼하지만, 오직 향락과 허세만을 추구하는 부잣집 공주님에 금세 환멸을 느끼고 고향인 살여울로 내려와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섭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전형적인 계몽주의 홍보물로만 보이고, 또 실제 수능 교재에서도 이런 식의 소개에만 그치곤 합니다만 원문을 읽어보면 ‘신문 연재 대중소설’로서의 아이콘들이 생생히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허숭은 상경하기 전, 고향 마을에서 원래 장래를 약속했던 처자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후 서울의 세련된 여성과 바로 혼인을 맺어버리는 ‘일일연속극스러운’ 상황을 연출합니다.

게다가 스토리가 이어지면서, 허숭의 아내 윤정선은 허숭의 친구 김갑진과 불륜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오류장에서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정선은 덜컥 갑진의 아이를 갖게 되고, 허숭은 게다가 홧김에 찾은 기생집에서 아내 정선의 옛 학교 친구이자 허숭을 몰래 사모했던 여인 선희를 만나기까지 합니다.

불륜치정극으로서의 『흙』이 갖는 절정은 불륜의 씨앗을 가진 정선이, 허숭이 시골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기차에서 내린 허숭과 선희가 정선을 바라보는 모습, 기차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잘라내기까지 한 정선의 눈물과 후회, 그리고 그 사고에서도 멀쩡하게 잘 자라버린 정선의 아이까지… 아니, 그 아이마저도 자신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허숭의 자세까지 한 회 한 회 연재될 때마다 1930년의 독자들은 희로애락을 공유했을 것입니다.

계몽주의의 사설조와 불륜치정극으로서의 감정 기복이 동시에 녹아 있는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세련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구식과 모-던의 차이가 지금보다도 더욱 뚜렷한 계급 격차를 가졌던 것이 1930년대임을 생각할 때, 소설의 인물들이 보이는 행보는 하나하나 세련된 모습입니다.

인텔리가 되어 피폐한 농촌 사회를 일으키고자 하고, 한편으로는 이른바 신식 자유연애의 환락에서 허우적대기도 하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소설은 그래서 동경의 시선과 비하의 손가락질을 함께 받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일연속극들이 부잣집이라는 배경 설정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행보들을 보여줌으로써 ‘욕하면서 보는 즐거움’을 만들어 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흙』은 같은 브나로드 계열로 분류되는 심훈의 『상록수』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차이점을 갖습니다. 『상록수』는 끝까지 지고지순하고 뭔가 세상 저 너머에 있을 법한 이상적인 이야기, 도덕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반면, 『흙』은 세속의 때 묻은 모습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상록수』 또한 중간에 ‘동혁의 몸이 그녀를 덮쳐 눌러왔다.’ 같은 표현이 들어 있었다면 지금처럼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브나로드 계열의 계몽소설이 아닌, 신문연재 대중소설로서 갖는 『흙』의 또 다른 커다란 포인트는 바로 뚜렷한 인물 설정입니다. 도덕적이고 맑고 아름다운 인물과 악당의 단순 대립이 아니라 『흙』에 나오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선택을 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입장과 가치관을 보여 줍니다.

신식 교육과 스타일로 무장한 30년대판 ‘된장녀’ 윤정선은 허숭 따위 시골뜨기에 별 관심도 없다가 변호사가 되자 결혼을 고려하고, 막상 결혼하고서도 그의 고리타분함에 질려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버립니다. 그러다가 덜컥 불륜의 아이를 임신하고, 사고로 장애를 입은 뒤에는 오랜 고민과 후회 끝에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숭고한 이상을 안고 살지만 세속의 이권과 욕망에 완전히 초연하지는 못했던 허숭의 캐릭터나, 한량에 친구 여자나 집적대는 캐릭터인 김갑진의 반전 등은 계몽주의 소설이 갖는 일방적인 방향성을 살짝 비틀면서 인간사의 다채로운 캐릭터를 보여주면서도, 당대의 신문이 버릴 수 없었던 계도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면서 계몽과 세속의 완전한 타협을 유감없이 이룩합니다. 전혀 매치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두 요소의 찰떡궁합이야말로 『흙』이 갖는 소설로서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연재를 마친 이광수의 후기 또한 『흙』을 읽으신다면 가급적 같이 보시길 추천합니다. 연재 중에 독자들로부터 받았던 엄청난 편지들의 내용은 마치 지금의 드라마 게시판을 보는 듯 합니다. ‘김갑진을 죽여라!’부터 ‘정선이를 살려주세요.’까지 독자/시청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캐릭터와 함께 웃고 우는 모양입니다. 이광수는 그러한 독자들의 청에 난감함을 표하며, 『흙』의 결말은 그렇게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며 에둘러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만약 요즘 시대였다면 『흙』 시즌 2라도 나왔을는지 모를 결말 또한 당대 독자들의 조바심을 건드렸을 것입니다.

최근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일제시대 근대화기에 대한 재조명이 꽤나 활발한 모양입니다. 암울했던 시기이지만, 돌이켜 본다면 사실 이야기 소재로서는 그때만 한 시절이 없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했고, 그랬기에 독자들의 감정 이입이 무척이나 큰 폭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지금은 만지기 어려운 당대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장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같은 트렌드 속에서 『흙』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새로운 재미를 줄 것입니다. 사회 전반의 풍조를 일신해야 한다는 정언명제가 깔린 속에서, 일제라는 눈에 보이는 악당의 수탈로 지쳐가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싸운다는 점은 사실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외려 새롭습니다.

마냥 그 시대라고 민족의 이념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자칫 일제? 존재에 가려져 30년대가 풍겼던 삶의 향기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1930년대의 인기 신문 연재소설 속에 비치는 당대의 삶을 엿보는 일은 역사적 관점이나 무슨 이념의 푯대도 아니고, 수능 언어영역 점수 올리기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침 드라마 보는 재미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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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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