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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눈뜬장님에게 사라마구가 외치다 -『눈먼 자들의 도시』

만약 갑자기 당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장 이 글을 읽지도 못할뿐더러, 지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시각 정보란 어마어마한 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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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갑자기 당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장 이 글을 읽지도 못할뿐더러, 지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시각 정보란 어마어마한 양으로,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 또한 대부분 정보를 시각을 통해 뇌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눈이 먼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가정은 단지 나 혼자만의 눈 멈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현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제공합니다. 만약 한 도시, 한 국가 구성원 전체가 눈이 먼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모든 시각 정보를 차단당한 이들에게 문명과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요?

주제 사라마구가 설정한 이 새로운 가정의 세계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설정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운전자가 운전 도중에 아무 이유 없이 눈앞이 하얗게 멀어버립니다. 단 한 사람의 눈이 멀었지만 시내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고,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똑같은 증세로 시력을 잃어 갑니다. 전파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라서 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눈이 먼 사람들을 몰래 수용소에 가두기 시작합니다.

주제 사라마구
수용소 안은 절망으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모두 눈먼 이들로 구성된 이곳은 먹을 것 하나도 제 손으로 쉽게 구하지 못하는 어둠으로 가득합니다. 밖에서 관리자와 감시인이 던져 주는 식량 상자를 찾아 본능적으로 움직여 보지만,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끝없는 혼란만을 일으킵니다. 그나마 처음엔 붐비지나 않았지, 갈수록 눈먼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수용소 안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늪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갖는 놀라운 흡입력과 설득력은 바로 이 설정에 크게 기댑니다. 이유 없이 하나둘씩 눈이 먼 사람들이 모두 수용소로 실려 오고, 그 안에서는 말 그대로 ‘눈먼 자들의 도시’가 형성됩니다. 어느 누구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은 시각 정보에 크게 의존하는 현대인에게 이성적 사고 자체를 박탈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다는 것은 식별하는 행위고, 이는 곧 이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눈먼’ 환경의 설정은 곧 인간에게서 질서와 이성의 항목을 발라내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본능을 다시 한번 ‘눈먼 사회’ 위에 재구성하는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사라마구는 이를 통해 인간 사회가 이성이라는 허약한 뼈대로 어떻게 치장되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눈먼’ 이러한 설정은 카프카의 단편 「변신」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변신」에서 주인공은 등줄기에 썩은 사과가 박힌 커다란 벌레로 변신하는데, 그는 벌레의 외양을 갖추면서 기존의 가족관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모두 박탈당한 채 방안에 갇힙니다.

「변신」이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소설적 설정은 과학 실험과 비슷한 방식입니다. 실험군과 대조군,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조건을 둠으로써 비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오히려 현실 사회를 다시 한번 비춰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시각 정보를 제거한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시각 정보에 크게 기댄 사회의 이면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단지 눈먼 사회뿐 아니라 또 하나의 설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오직 단 한 명, 눈뜬 사람’입니다. 처음 눈이 먼 운전자를 치료한 의사도 결국 눈이 멀고, 그를 수용소로 보내려고 특수 요원들이 구급차에 의사를 실어갈 때, 의사의 아내도 함께 탑니다.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그녀는 남편인 의사에게 속삭입니다.

“내가 같이 갈게요, 사실 나는 눈이 멀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눈먼 특별한 이유가 없듯이, 그녀만 눈멀지 않은 이유 또한 ‘아~무 이유 없’습니다. 단지 소설적 설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설정은 눈먼 사회를 보는 또 다른 시점으로 작동하며 독자에게 소설 내에서 비교적 관찰자적인 시점 위치를 확실히 잡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녀는 수용소의 참담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확실히 바라보며 이를 통해 독자에게 눈먼 자들의 도시가 눈뜬 이에게 어떤 모습인지 고스란히 전달해 줍니다. 아비규환의 막장 인생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보살피는 아내로서의 모습과 함께 이 모든 상황을 유일하게 지켜보는 관찰자로서 존재하며, 이는 소설의 핵심인 묘사를 구성하려는 작가의 필연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설정을 큰 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모두가 눈이 먼 새로운 사회조건하에서 탄생하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그려냅니다. 모두가 눈이 멀고, 그 와중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자원은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마침내 권력이 탄생합니다. 누군가가 들어오면서 권총 한 자루를 반입해 온 것입니다. 그 권총이 정확히 표적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는 권총 소리라는, 눈먼 상황에서는 더욱 두려운 청각적 경험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그 공포를 올라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권력을 장악합니다.

부족한 식량에 대한 배급권을 갈취하자, 권총을 가진 자 주위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권력자를 치켜세우고 그 밑에 복무하며 그의 파이를 나눠 먹으려 협력하고, 나머지는 그나마도 부족한 자원이 더 부족해지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권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여자를 겁탈하고 폭력을 쓰며, 추악한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그대로 구현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러한 권력을 제압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관찰자인 ‘눈뜬 그녀’의 눈을 통해 독자는 암울한 세상의 현실을 직시합니다.

‘눈뜬 그녀’의 개입으로 수용소의 권력구조는 붕괴하고, 사람들은 이 지옥 속에 유일하게 눈을 뜬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로부터 살길을 찾으려던 사람들은 심지어 수용소 경비병 또한 모두 눈이 멀었고, 이 도시 전체가 모두 눈이 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어딘가 있을지 모를 희망을 찾아 ‘눈뜬 그녀’가 길잡이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고 수용소 밖으로 나서고, 오랜 여행 끝에 마치 처음과도 같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은 하나둘 시력을 되찾습니다.

‘눈이 멀었다, 모두’라는 설정 하나로 인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완벽하게 그려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눈뜬 그녀’입니다. 그녀는 처음에 자신은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감춘 채,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유일한 인물로서, 단지 관찰자로서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눈먼 세상이 극한으로 치달아 갈 때부터 서서히 세상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수용소에서 나와 사람들을 밖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모두가 눈을 떠갈 때 눈 뜨는 이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이쯤 되면 ‘눈뜬 그녀’의 정체가 분명해집니다. 소설에서 그녀는 신 혹은 절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자신만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춘 채 수용소로 들어가는 모습은 신이 말구유에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기독교의 예수 탄생과 같은 의미며, 모든 것을 보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 또한 아마겟돈(‘묵시록’상 선과 악이 벌이는 최후의 전쟁)에 가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신의 모습입니다. 단, 그녀가 단지 눈먼 세상에서 신의 역할만 수행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두가 눈멀 때 혼자 눈멀지 않은 진정한 그 세계의 ‘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여러모로 특이한 소설입니다. 눈이 머는 이유에 대해서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무작정 진행하는 작위적 설정에도, 독자는 엄청난 흡입솽을 느낍니다. 소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단히 종교적인 내러티브지만, 실상 그러한 내러티브에 담긴 주제는 대단히 계급적(눈먼 자를 격리수용하는 정부나,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 등)입니다. 작가는 상당히 열렬한 공산주의자고, 그의 국적은 가톨릭 성향이 매우 심하니 그 배경에 대해 짐작은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러한 모습이 일반적인 소설과 『눈먼 자들의 도시』를 크게 다른 모습으로 만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당장 4월에 한국에도 『눈먼 자들의 도시』로부터 4년 뒤의 이야기를 그린 후속작, 『눈뜬 자들의 도시』가 출간되었습니다. 전작에서 작가는 눈먼 사회의 현실이란 장치를 통해 실제 사회를 거울에 비추어 세밀하게 그렸고, 이번 작에서는 아예 ‘눈뜬 사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더욱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아니 고발하고자 하는 세계라는 큰 소재는 1편과 2편 사이의 십수 년 공백에도 달라진 점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 세계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리 눈뜬장님에게 사라마구가 ‘눈뜬 그녀’의 입을 빌려 소리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우리는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어 있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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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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