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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를 추모하며 - 『시뮬라시옹』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보드리야르가 지난 3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널예스에서 보드리야르 특집으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한 권쯤은 함께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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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6일의 부고는 21세기 현대 사회의 첨단을 사는 몇몇 이들에게는 기억될 만한 사건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보드리야르가 이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추모의 물결까지 일어날 만큼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YES24를 포함한 주요 인터넷 서점은 나름의 특집 코너를 마련했고([기획]‘시뮬라시옹’의 주창자, 장 보드리야르 별세) 미디어에서도 하찮게 다룰 테마는 아닙니다. 채널예스에서 보드리야르 특집으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한 권쯤은 함께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와 함께 보드리야르의 연구에서 가장 큰 중심을 차지해 온 핵심 개념입니다. 커뮤니케이션학자인 마샬 맥루한이 처음 도입했던 개념을 자신의 연구에서 확장해 온 보드리야르는 이 책 『시뮬라시옹』을 통해 비로소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가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를 총정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를 공부하거나 책 『시뮬라시옹』을 읽으려면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정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3월 6일 별세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1929-2007)
시뮬라시옹이란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라는 개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가리키며, 그 파생된 이미지를 시뮬라크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파생된 실재는 그러나 본래 모사하고자 했던 원본 혹은 실재와는 갈수록 그 격차가 커지며, 나중에는 실재와는 무관한 복사본 자체만의 고유한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더욱 개념이 쉬워집니다. 인류 최초의 모사물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 알타미라의 원시인 동굴 벽화는 물소 사냥이라는 실재를 동굴 벽에 숯과 같은 그림도구로 모사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모사한 그림이 실제 배를 불려주는 사냥이 아니라는 것은 그린 이나 보는 이 모두 알고 있으며, 다만 그림이 ‘사냥’을 그렸다는 사실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러나 모사 기술이 발전하면 조금씩 의미는 달라집니다. 당장 한국에서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났던 솔거의 유명한 일화가 그 사례라 할 수 있겠네요. 솔거의 소나무 그림은 아주 사실적이어서 참새들이 날아와서는 벽에 부딪혀 수십 마리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실재를 따라잡을 정도로 정밀한 묘사가 가능해지면 그때부터는 현실과 모사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실재를 능가할 정도로 정밀한 묘사가 가능해진다면?’이라는 가정을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발견합니다. 실제 촬영에 임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정독했을 정도로 영화와 책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영화의 ‘매트릭스’야말로 실재를 능가하는 모사입니다. 단순히 사진이나 그림 같은 시각에 기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오감을 모두 속일 수 있는 완벽한 모사가 바로 매트릭스입니다. 매트릭스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실재보다 더 실제 같은 모사 속에서 살아가며, 그들이 나중에 발견하는 실재란 정말 보잘것없으며 자신의 매트릭스 안 삶과 무관합니다.

바로 이것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가장 극단적인 예시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 낸 모사물인 매트릭스가 시뮬라크르이고, 매트릭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입니다. 전제 그대로 매트릭스는 실재보다 더욱 실제적이지만, 실재와의 연관성은 전혀 없이 독자적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시뮬라크르입니다. 매트릭스 안에서 사는 이들에게 실재는 의미가 없으며, 오직 이미지와 기호로만 구성된 세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비단 매트릭스만이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이야기입니다. 당장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실재와는 동떨어진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합니다. 당장 여러분이 YES24에서 책을 살 때 결제하는 신용?드는 대표적인 시뮬라크르이고, 화폐의 발달은 시뮬라시옹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최초 인간의 노동이 유효한 가치를 생산해 냈던 것은 수렵, 채집, 목축, 농경의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가치 생산은 생산자가 직접 그 가치를 누리는 형태였는데, 이후 화폐의 등장으로 이른바 교환가치가 발생합니다. 내가 만들지 못하는 가치를 얻으려고 인간은 화폐를 통해 각자의 가치를 교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화폐는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이나 금속이지만 교환의 의미로서 가치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화폐에서 파생하는 경제구조는 수표, 어음, 예금과 증권, 선물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진화하면서 ‘인간이 생산한’ 그 가치에서 멀어지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체계를 구축했고, 마침내 신용카드, 온라인결제와 같은 형태로 진화합니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시뮬라시옹 논리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현대사회에 대한 적절하고 날카로운 분석’이라는 평부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등의 냉소적 반응까지 나름의 이슈로 자리매김해 왔지만, 전체적인 중론은 ‘음… 이런 견해도 있군’ 선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어찌 보면 독자층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드리야르를 읽는 이들의 관심이 대부분 인문/사회과학에 국한된 현실은 보드리야르의 의미 적용과 확장에 장애 요소입니다. 만약 『시뮬라시옹』을 마케팅 담당자나 브랜드매니저 등 비즈니스 실무진이 읽는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케팅 사례로 자주 쓰이는 예시 하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페라리는 고속도로 200km 주행보다 길 막힌 강남역 사거리에서 빛을 발한다”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시뮬라크르를 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입니다.

현대사회의 소비는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상품의 고유한 가치가 아닌, 상품이 지닌 기호에 대한 지급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한때 이슈가 되었던 이른바 ‘된장녀’ 트렌드의 핵심은 스타벅스 커피의 맛이 아닌 ‘뉴요커’풍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었고, 명품에 대한 소비와 선호는 명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명품을 소지함으로써 주변의 시선을 받는 데서 오는 기호 가치의 상향에서 비롯됩니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부분을 명확하게 짚어내는데, 이것은 사실 마케터들이 오래전부터 천착해 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만일 누군가 이 책을 마케팅/트렌드 용으로 읽는다면, 책에서 얻을 의미와 해답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매우 방대한 분야에서 접목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 사상의 출발점이 마르크시즘이었던 것에서, 우리는 정치·경제학적 패턴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사조는 마샬 맥루한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어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의미가 있으며, 존 버거 등 현대 미학의 주요 흐름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눈에 쉽게 띄는 것은 사실 팝아트 계열입니다.

마릴린 먼로의 사진 늘어놓기, 토마토수프 캔 나열하기 등으로 유명한 앤디 워홀의 팝아트 작품을 기억하신다면, 위에서 언급한 시뮬라시옹의 과정과 앤디 워홀의 작업이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워홀과 보드리야르의 생각은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현대 사회의 소비가 보여주는 물신의 새 풍조가 표류하는 기호로서 자리매김하며, 그 기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시대가 왔음을 각각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 보드리야르의 책 중 본질과 개념을 가장 간결하게 꿰뚫는 책이 『시뮬라시옹』입니다. 책은 역자의 방대한 주석과 프랑스 철학 특유의 난해한 단어가 독자를 갈팡질팡하게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별 게 없다고 본다면 별 게 없을 수 있습니다.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에서 시작하는 내용에 대한 변주와 덧붙임이 대부분이며, 그 큰 줄기만 놓치지 않고 읽는다면 일반 교양서로 이 책에 접근하는 이들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더 깊은 이해를 원한다면 분야별로 아래와 같은 참고 도서를 추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비의 사회』 – 장 보드리야르 (정치경제학)
마르크시즘을 모태로 하면서도 마르크시즘과 보드리야르가 결별해야 하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생산에 초점을 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소비에 무게를 두는 보드리야르의 분석을 비교해봄 직하다.




『본다는 것의 의미』 – 존 버거 (미학)
그림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광고 이미지로 기호가 대중의 시선과 맞물려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설명해준다.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 데이비드 하비 (예술사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의 근원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접근해 볼만한 도서. 그러나 내용 자체는 무척 난해하여 혼자 읽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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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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