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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수학의 세계 - 〈Numb3rs〉

저런 소재로 어떻게 얘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위험천만해 보이면서도 보기 좋게 본때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지요. 과학 수사물의 변주에 이제 하다하다 못해 수학까지 끌어들이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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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수억 달러를 들여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고도 망하는 블록버스터가 안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재미있게 만들고도 칭찬 받기가 쉽지 않고, 못하면 단단히 망신살만 뻗치는 것이 이 경우입니다. 반면에 아이디어와 구성의 탄탄함이 제작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고 이슈가 되는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런 소재로 어떻게 얘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위험천만해 보이면서도 보기 좋게 본때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지요. 과학 수사물의 변주에 이제 하다하다 못해 수학까지 끌어들이다니요. CBS의 〈Numb3rs〉는 과학 수사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 네트워크가 단단한 자기 과신에 빠져들었으며, 잘 팔리는 재료에 양념 구성만 약간 바꾸어 쉽게 팔아먹겠다는 매너리즘에 극도로 빠져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전히 넘겨짚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학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Numb3rs〉
“에어디쉬 번호 ∞”, 즉 수학과는 담 쌓고 지내는 시청자들까지 빨아들이는 〈Numb3rs〉의 흡입력은 놀랍고도 놀랍습니다. 오프닝 크레디트에 나오는 “우리는 매일 수학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날씨를 예측하고 시간을 알아보고 돈을 다루기 위해서”라는 독백이야 수긍하지 못할 점이 전혀 없지만, 인간의 행동과 인간 사이의 일을 숫자로 해석하고 나타낸다는 것이 언뜻 와 닿지 않는 괴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지만 또 G. H. 하디가 말했다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름다운 시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시를 읽었을 때 그 아름다움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런 시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Numb3rs〉에 있습니다. 단순히 공식과 방정식이 아닌 논리와 이성이라는 수학의 세계, 종종 마주치곤 하는 인문학적 궤변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을 이용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가장 큰 신비에 침잠해 보는 그 안도감이라니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수론과 방정식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Numb3rs〉는 숫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반대되는 이론이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시청자들마저 있습니다.

‘넘버스’라고 읽어요. 숫자 3은 영어 대문자 E를 180도 회전시킨 것이랍니다.
뭐, 모르는 게 약인 경우에 해당된다는 주장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수학적으로 허투루 하고 있다거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칠판 위에 가득 휘갈겨져 있는 방정식은 그럴듯한 소품이 아니라 진짜이며, 에피소드에 나오는 사건에 분명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FBI 요원인 형 돈 엡스와 수학 신동에서 세계적인 명망을 얻는 천재로 거듭난 동생 찰리 엡스가 인간의 행위, 특히 범죄 행위를 수학을 통해 통역하려고 합니다. 이 드라마는 잘되는 드라마의 특징 가운데 하나, 바로 캐릭터의 완성도도 갖추고 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까지 포함한 엡스 가족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고 애틋하고 정감 있는 가족애를 보여주고 있지요. 〈앨리 맥빌〉의 괴짜 변호사 존 케이지를 맡았던 피터 맥니콜은 물리학자이자 찰리의 동료 래리 플라인하르트로 나오는데, 존 케이지에서 그다지 변모하지 않았음에도 기이할 만큼 질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수사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중심인물들이 엡스 가족이기 때문에 돈 엡스의 FBI 동료들은 존재감이 그다지 강하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도시계획자 출신이자 최근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며 1960년~1970년대의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앨런 엡스와 “정부의 앞잡이” 큰 아들 돈 엡스, (거의) 오로지 숫자만을 사랑하는 막내 찰리 엡스, 이렇게 3부자가 1900년대 초반에 유행했다던가 하는 크래프츠먼 스타일의 멋진 집에서 알콩달콩 하는 모습이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배우 살인미소 1위가 〈앨리어스〉의 제니퍼 가너라면, 남자배우 1위에 등극하고도 남을 돈 엡스의 가히 판타스틱한 미소와 더불어,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이라는 영화감독 형제가 제작하는 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형제간의 관계도 어느 것 하나 과장하는 것 없이 참으로 섬세합니다.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가 형제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었답니다.
과학 영재로 자라서 열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질시와 부러움, 견제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지만, 형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에 더없는 의미를 두는 수학 천재 찰리는 연필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수학의 세계와 속세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지저분한 치부를 망설임 없이 들여다보는 FBI에서의 일의 세계 사이를 오고 갑니다. 필즈 메달 수상을 거부하고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다는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 완벽한 수학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켜버린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 수학의 발전을 위해 어떤 수학자보다도 공동연구를 많이 하며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살았던 수학계의 구루 폴 에어디쉬, 여러모로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임을 증명해 보였던 폴 에어디쉬의 모습이 찰리의 모습에 불현듯 겹쳐질 때가 있습니다. 몹시 평범한 사람 같지만, 발명이 아니라 이미 우주에 널려 있는 수학적 진실의 발견을 업으로 삼고 사는 수학자의 고독과 괴짜 기질이 언뜻언뜻 드러나지요.

크리에이터인 니콜라스 팔라치와 셔릴 휴튼은 첫 작품인 이 드라마로 과학에 대한 공공의 이해를 증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칼 세이건 상을 수상했습니다. 미국 일선 수학교사들은 이 드라마를 교재 삼아 학생들의 흥미를 돋운다고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 교육적이고 건전한 드라마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책”에 드는 발견을 하며 수학적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확실히 맛을 보여주니까요. 이런 드라마가 가능한 것이 물론 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미국의 풍요로운 제작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풍요로운 제작 여건만큼이나 처절한 경쟁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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