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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백 안에 담긴 세상 -〈위즈〉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을 뒤로 하고 졸지에 가족 부양을 떠안게 된 가정주부가 있습니다. 메리 루이스 파커가 분한 〈위즈〉의 낸시 보트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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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린 2006 월드컵에서 지단이 마테라치에게 가한 박치기를 놓고 설왕설래가 엄청났습니다. 독화술 전문가까지 동원된 이 진실 게임에서, 이유는 가족을 욕보였다거나 테러리스트에 빗댄 빈정거림 때문이었다는 설이 대세였지요. 저는 “테러리스트 설”에 마음(?)이 갔습니다만, 지단 자신은 마테라치가 누이와 관련하여 외설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지단이 알제리 이민자 출신임을 노려, “너 은퇴하고 알카이에다 들어갈 거지?”, 뭐 이런 말을 했다거나요, 축구는 어떤지 잘 모르겠고, 주구장창 뛰어다니는 중에, 그것도 A 매치게임에서 다른 나라 말을 쓰는 선수들끼리 상대 나라의 욕 몇 마디만 배워서 쓰면 모를까, 무슨 말을 할 시간이 그렇게 많을까 싶기도 하지만, 야구에서는 루상에서 만난 수비수와 주자가 지저분한 농담으로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박치기 지단, 어찌됐든 세상만사는 가족사로 귀결되게 마련이죠
그중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소재가 상대방 아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요. 신경을 거스르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듣는 입장의 선수는 어지간해서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예민한 문제는 인종적인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 투수를 상대로 아깝게 들어가지 않은 박찬호의 이단 옆차기의 발단도 인종차별적 발언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단은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일견 의외인 것도 같았는데, 영국의 한 언론에서는 가족 문제에 더없이 민감한 카톨릭 문화권의 성향 때문이라고 지단의 행동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꼭 카톨릭이 아니라고 해도 가족을 욕하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도 몇 가지 없지요. 특히 스포츠는 물리적인 충돌만이 규칙의 제재를 받지, 증명하기 어려운 언어폭력은 게임 당시에는 보통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규칙과 법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정의를 스스로 실현하겠다는 마음으로, 또는 그저 너무 분개해서 난투극을 벌이기도 합니다.

평소 점잖은 이미지의 지단도 가족을 모욕하는 것은 참지 못하고 폭발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인지 여부는 이런 행동에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가족이니까, 얼마나 잘났건, 얼마나 못났건 기를 쓰고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란 자신이 세상에 비쳐지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 번째 아이》에 등장하는 다섯 번째 아이처럼 괴물로 변해 가고, 부부 관계는 위선밖에 남지 않은 부모도 공중에 보이는 이미지를 관리하는 공보관으로 분주히 뜁니다. 아니면 너무 사랑해서, 어떤 짓을 저지르고 다니든 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시켜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법과 규칙을 어기는 사람도 있지만, 눈먼 사랑이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곤경에 빠지지 않으려고 법과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마가 마약상이 된 이유, 〈위즈〉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을 뒤로 하고 졸지에 가족 부양을 떠안게 된 가정주부가 있습니다. 메리 루이스 파커가 분한 〈위즈〉의 낸시 보트윈이지요. 남편은 번지르르한 교외 주택단지에 번지르르한 집 한 채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의 선택은? 값이 꽤 나가는 집을 팔고 좀더 평범한 동네의 집을 사고 조그만 가게라도 차려 성실하게 일하며,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시키며 열심히 사는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좋은 차를 타고, 아이들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하며, 가정부를 쓰고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을 포기하느니, 마약 딜러로라도 나서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집니다. 모든 사람이 거의 똑같이 생긴 집에 살고, 레인지 로버를 몰고 다니는 이 백인 마을에서 엄마는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마리화나를 팔지만 자기는 결코 약에 손을 대지 않고, 마리화나를 파는 일을 하는 것 외엔 어그레틱이라는 그 가상의 교외도시에 사는 사람치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편인 낸시는 둘 있는 아들의 안녕을 보살피고, 그들이 엄마마저 잃어 고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악전고투합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 된 큰 아들은 엄마로서는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이 마약과 섹스에 빠르게 눈을 떠가고, 좀 별나지만 착하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별난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정학 맞기를 일삼습니다. 포기하지 못하는 덩치 큰 집과 생활방식과 그 유지비용 때문에 재정상의 악순환은 거듭되지만, 엄마는 마약을 팔고 그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것으로 궁상떨고 사는 일을 피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골든 글로브 여우 주연상에 빛나는 메리 루이스 파커
겉으로는 연약하고 무력해 보이는 메리 루이스 파커는 이 엄마 역할로 보여준 호연으로 올해 골든 글로브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태생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이기도 하고, 예전에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나 〈의뢰인〉에서 보여준 연기 때문인지 몰라도, 남부 사투리가 아니라 말쑥한 영어를 선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게까지 보일 정도지만, 무력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강단 있는 의지를 연기하는 데 메리 루이스 파커는 참 잘 어울립니다. 이 엄마는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학교에서 열 살짜리 아이에게 약을 팔고, 아들은 제 지붕 아래서 벌써부터 여자친구와 버젓이 섹스를 하고, 열 살짜리 막내아들의 입에서는 f로 시작되는 단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오며, 도움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시동생까지 가세한 가족을 지퍼백에 담아 진공상태로 밀봉하려고 애쓰지만, 지퍼는 너무 쉽고 무기력하게 열리고 안은 곪아 들어갑니다.

〈위즈〉는 올라갈 가능성에 대한 희망보다는 추락할 공포에 더 시달리며 그 어떤 계층보다도 자신의 가족과 이익을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수성하려고 하는 중산층의 모습을 잘 그려냅니다. 형식과 포맷에서야 〈위기의 주부들〉의 마이너 판본이라는 추궁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내용과 구성은 보다 노골적이고 보다 다채로운 직설을 드러낸다고나 할까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어지간히 많이 잃지 않고서는 끄덕도 하지 않는 최상위 계층과 잃을 것이 전혀 없으므로 분방한 최하위 계층과 달리, 추락의 공포를 견디고 살아가는 중산층은 터부와 규칙에 대한 보수성, 아이러니, 가족의 위선을 그리기에 많이 애용되는 대상이지요. 흑인이 차를 몰고 지나가면 뒤에 가던 경찰차가 이유 없이 불러 세워 심문을 하는 곳, 백인 변호사와 회계사와 의사들만의 가족으로 채워진 곳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눈물겨운 집념이 이 드라마에 펼쳐집니다.

하루 온종일 약에 절어 사는 낸시의 회계사 더그와 가족의 안위를 위협하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한 철없는 시동생 앤디 콤비, 해탈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낸시의 마약 공급상이자 흑인인 헤일리아의 가족, 자기 자신과 가족을 끊임없는 불행에 빠뜨리는 것으로 행복을 찾으려는 낸시의 친구 실리아 등이 뭉친 〈위즈〉는 유료 케이블 채널인 쇼타임의 2005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입니다. 다소 상투적인 복선이기는 하지만, 30분짜리 10개 에피소드로 깔끔하게 출발한 이 깜찍한 블랙 코미디는 당연하고도 다행스럽게 시청자들에게 다음 시즌의 복귀를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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