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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집착의 미국 만세? - 〈E-Ring〉

블랙홀이 된 NBC에서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E-Ring〉마저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시청률 부진으로 종영된 쇼를 다룰 때마다 드린 말씀을 또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다른 네트워크에서였다면 살아남았을 텐데, 하는 가능성 큰 가정도 허망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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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겨울 즈음에 메릴랜드 주에 사는 친구 집을 들러서 며칠을 머물다가, 워싱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초행길이기도 했거니와 아침 이른 출발이라 길이 막힐 것도 걱정이 됐고, 또 짐도 많아서 한국 택시회사에 콜택시를 불러 타고 갔습니다. 홍세화 씨가 파리에서 택시를 몰 때 저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는 것도 많고 말주변도 훌륭했던 택시 기사는 시종일관 이런저런 얘기를 건넸습니다.

그리하여 택시가 워싱턴에 접어들었을 무렵, 워싱턴에는 처음 와봤다고 하니까, 워싱턴에 관한 일반 상식 문제를 낼 테니 맞혀보라고 했겠지요? 주로 “CIA 본부는 어디에 있느냐?”, “백악관에서 대통령 집무실과 보좌관 사무실이 있는 곳의 별칭이 뭐냐?”와 같은 문제였는데, 액션 첩보 드라마로 단련이 되어있는 터라 쉽게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답니다. 펜타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지나갈 무렵, 워싱턴의 택시 기사가 이번 문제를 맞히면 팁은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얼마나 어려운 문제기에? “미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 상주하는 근무 인원은 대략 몇 명일까?”가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NBC에서 2005년 9월 21일 파일럿을 방영했던 드라마 〈E-Ring〉에서, 관료주의와 복잡한 행정 절차에 기겁을 한 풋내기 제임스 티즈뉴스키 소령에게 맥널티 대령(데니스 호퍼 분)이 “이곳은 모든 적으로부터 조국의 국체를 수호하기로 맹세한 2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네. 익숙해지면 여기가 어떤 곳인지 깨닫게 될 걸세” 하던 비장한 발언을 기억해 냈더라면, 하고 땅을 쳤단 말이지요.

하지만, 지난 5월에 NBC가 중간에 몇 달 쉬기도 하며 불안한 행보를 보이던 〈E-Ring〉에 더 이상의 에피소드는 없다며 조기 종영을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미국 시청자 한국 시청자 할 것 없이 일부는 드라마가 너무 ‘미국 만세’라는 것이 사단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시청률 부진과 그에 따른 조기 종영의 원인이고 뭐고 간에, 드라마가 선하고 의로운 미국(사실은 주인공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지만)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거슬린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팍스 아메리카나로서 미국의 면모를 군데군데 드러내며 보는 사람 낯을 간지럽게 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냉전 시대에 득세하던 문화 상품에 ‘미국 만세’나 애국심 끼워 팔기가 9/11을 기점으로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냉전 종식 후 초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에서 ‘배달의 기수’ 식의 막무가내 애국주의를 표현하는 문화 상품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일으키거나 참여하고 있는 모든 전쟁, 타국에서 벌이는 활동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그런 일방통행 상품으로는 장사 자체가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까요. 할리우드는 전무후무한 9/11 같은 사태에 감정의 고삐가 다소 풀렸고, 전술적으로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내 침착함과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사실 상대가 노골적으로 억누르며 나오지 않고, 자기반성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다’라는 식으로 은밀하고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면, 반대자로서는 응대하기가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E-Ring〉은 그런 은밀하고 교묘한 재간이 부족한 나머지, ‘미국 만세’를 외치고 싶은 ‘음흉한’ 속셈이 들통나버리고 만 것일까요? 피정복민을 관대함으로 대했던 팍스 로마나와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가 기질적으로 비슷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일 것입니다. 강간당할 위기에 있는 소녀를 구하다가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미군 병사의 이야기나 1994년 르완다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졌을 때는 관여하지 않다가 똑같은 사태가 재발할 것 같다는 징후만으로 조치를 취하는 펜타곤의 인도주의적인 모습은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내용과 정확히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이 드라마는 정말로 ‘미국 만세’ 하고 싶은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내수용 상품만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요? 세계 수출을 통해 더 큰 이윤을 창출해 내려는 목표로 바쁜 것은 둘째 치고, 치솟는 교육비, 의료비, 기름값에 미국 내 민심도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내수용에 희망을 걸 상황도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최근에 나온 거의 모든 정치, 군사, 수사 드라마에는 관료주의나 출세 또는 보신주의의 이전투구가 반드시 등장합니다. 특히 공식적인 수가 열다섯 개에 달한다는 정보기관 간의 세력과 이권 다툼도 즐겨 등장하면서,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로 의뭉스럽게 우리는 불편부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환심을 사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 밀고 나가자면,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간들이 약해졌다’, ‘괜히 정치적으로 트집 잡혀 나동그라지는 일이 없게 보신만을 꾀하는 현실이 한탄스럽다’, ‘그리하여 애국주의가 됐든 반공이 됐든 인권에 관한 것이 됐든, 강한 신념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옛날이 그립다’라는 향수까지 감지하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다 감지해 낼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고 깨친 만큼 판단하고, 뭘 보든 그 판단력을 믿고 작품을 감상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할리우드 같은 거대 매체가 기를 쓰고 팔아먹으려고 하고, 빅 브라더가 대중을 어리석음의 음지 속에 가두어두려고 한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E-Ring〉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많이 받지 못했던 것은 물정 모르고 ‘미국 만세’를 내쳐 외치거나 공공연하게 애국심 마케팅을 지향한 것과는 결정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장성들이 웬 분홍색 종이에 작전을 허가한다는 표시로 사인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작전 지휘와 수행 과정의 흡입력이 그다지 차고 넘치지는 않아서였을까요? 〈E-Ring〉은 펜타곤 판 〈웨스트 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액션이 주였다면, 주인공이 펜타곤의 작전참모부가 있는 E-Ring이 아니라 델타 포스의 장교나 부사관쯤이 되었겠지요. 현장의 액션도 골고루 안배하려고 하나, 빌딩 안 책상물림 간의 정치 게임이 우선 볼거리를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E-Ring은 중앙에 정원을 놓고 환 형태로 놓여 있는 A, B, C, D 링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링이며, 미 국방부의 핵심 역할을 하는 작전참모부가 있는 곳입니다. A동이야 중앙의 정원이라도 내다볼 수 있다지만, 창문 열면 다음 건물밖에 안 보이게 중간에 끼어 있는 B, C, D 동을 빼고는 유일하게 외부의 전망을 누릴 수 있는 동이기도 하지요. 그 E-Ring에서 델타 포스 출신의 주인공 제임스 티즈뉴스키 소령이 맥널티 대령의 지휘 아래, 특히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군사적 긴급 사태에 대처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개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여부부터 작전 수립까지 윗선의 재가를 받고, 그 다음에 작전을 수행합니다. 못 하게 하면? 해야 할 일을 그냥 내버려두고 지나갈 주인공이 아니지요. 국제 관계나 정치적 이해 때문에 작전 허가가 나지 않으면, JT 소령과 맥널티 대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과 똑같은 규칙으로 게임을 하면서 일을 성사하고 회의실의 장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립니다.

블랙홀이 된 NBC에서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E-Ring〉마저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시청률 부진으로 종영된 쇼를 다룰 때마다 드린 말씀을 또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다른 네트워크에서였다면 살아남았을 텐데, 하는 가능성 큰 가정도 허망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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