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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탐정 생활 - 〈베로니카 마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이른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으나 잘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창 무성한 〈베로니카 마스〉라는 드라마도 그런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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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대개 돈을 많이 들일수록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들이면,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먼 곳으로 여행 가서 더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대중문화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들이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쓸 수 있는 도구를 비교적 자유롭게 쓰면서, 또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인기 많은 배우를 쓰고 양질의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요컨대 양질의 재료를 바탕으로 더 때깔 좋고 탄탄한 물건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큰, 더 좋은 조건을 우선 따놓고 들어가는 셈이지요. 블록버스터들은 종종 제작비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을 대대적인 홍보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아니 한국에서도 영화나 드라마 제작비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경우에는 드라마까지 포함하여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 풍부합니다. 거기에 전 세계적인 시청자 팬층이 날로 두터워지고 있는 것도 제작비를 한층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이 되겠지요. 한국도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해가면서, 작품의 제작 규모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이 500만 명 이상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을 넘긴다는 초특급 예산의 영화도 나오곤 하며,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었기에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을 수 있는 드라마가 기획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자의 입장에서 사는 경우와는 다르게, 물건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비교적 더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이 그 예외입니다.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는데도, 시장에서 참패를 하고 마는 고급차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디어와 적은 투자로 크나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없지 않고요.

대중문화산업에서도 그런 예외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개런티로 3000만 달러를 받았네 어쩌네, 제작비가 사상초유를 기록했네 어쩌네 하면서 쫄딱 망하는 영화도 가끔 이상으로 나오는 한편, 적은 예산을 들이고도 만든 사람마저 깜짝 놀랄 만큼 성공하는, 또는 경제적으로 거둔 성공은 미미하지만 그 미미한 성공이 너무나 안타까울 만큼 알찬 작품도 나옵니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이른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으나 잘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창 무성한 〈베로니카 마스〉라는 드라마도 그런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티븐 킹은 이 드라마를 놓고, 어떻게 그렇게 적게 들이고, 어떻게 그렇게 잘 만들 수가 있느냐고, 자기가 아는 한, 인생은 그것과는 별로 비슷한 점 없이, 즉 돈을 적게 들이고도 좋은 것을 얻는 경우가 별로 없이 흘러가는데 그 몹쓸 놈의 드라마는 왜 이 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느냐고 너스레를 떱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넵튠 고등학교에 다니는 베로니카 마스라는 여학생의 탐정활동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소재도 어째 묵직한 힘이 뒷받침되는 것 같지 않고, 땅딸막한 여고생이 원톱으로 나오는 것도 흥행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데, 〈베로니카 마스〉는 현재 국내에서도 여느 드라마 못지않게 열혈 팬들을 양산해 내며 롱런의 기대를 가득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즌 1은 베로니카의 가장 친한 친구인 릴리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살인범이 밝혀지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렇다 보니 줄거리와 구성 면에서 〈위기의 주부들〉과 종종 비교가 되곤 하지요. 〈위기의 주부들〉은 하나의 자살사건을 놓고 시즌 내내 딱히 손에 잡히는 사건 없이 중산층 마을의 주부들 이야기를 소소하게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보는 사람에 따라 그런 이야기에서 격랑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임을 강조하며 말씀드리자면, 좀 밋밋하고 늘어진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답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릴리 케인 살해 사건을 큰 축으로 놓고 가되, 매회 두어 가지의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갑니다.

이 작품은 정말로 예산이 부족하거나, 정말로 저예산이 컨셉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사물에 등장하는 그 흔한 액션 장면이나 정교하고 매끈한 수사도구 같은 것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꽤 튼실한 내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또 십대를 그리는 미국 드라마에서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방탕한 생활이나 화려한 파티 장면도 여간해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 케인 살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파면된 보안관 아버지를 둔 베로니카는, 학교에서는 단단히 찍힌 왕따이기 때문입니다.

영민하나 고등학교라는 만만치 않은 사회에 섞이기 어려운 괴짜 꼬마 탐정답게, 베로니카의 곁은 순진하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역시 왕따 기질이 있는 친구가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고, 가슴 따뜻한 날라리 친구가 가끔은 해결사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정작 베로니카 마스는 심심한 인생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자극적이고 화려한 화면을 선사하지 않으면서도, 아기자기함을 무기로 삼는 사건과 사건 해결방식, 주변 인물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기술만큼은 현란합니다. 말마따나 베로니카는 물만 마시려 하면 누군가가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 소녀 탐정 신세니까요.

릴리 케인의 오빠이자 베로니카의 옛 남자친구인 던컨 케인, 베로니카와 던컨의 러브라인은 출생의 비밀이 얽혀들면서 시청자로부터 감정의 괴리를 경험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드라마라지만 터부를 무한정으로 그릴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여전히 한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가정사 탓에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로건 에콜스가 옛 여자친구인 릴리의 죽음 이후 베로니카와 교류하며 엉덩이에 뿔을 빼나가는 과정을 설득력이 있게 그리면서 곧 상쇄되고, 둘의 관계가 불신의 벽에 부딪혀 흔들리는 장면은 애틋함을 자아내기도 하지요.

로건 에콜스는 미키 루크와 〈마네킨〉의 앤드류 매카시를 섞어놓은 듯하게 생긴 배우 제이슨 도링이 분했는데요, 미국 드라마를 보면 유명 영화배우를 닮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 누가 누구를 닮았나 알아맞히는 것도 꽤나 심심풀이 땅콩이 된답니다. 어쨌거나 규모는 작게 가지만, 〈베로니카 마스〉에 등장하는 인생의 음모는 결코 작지 않으며, 베로니카가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밀도가 촘촘합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지상파라고는 하나, 어지간한 케이블 방송하고나 어깨를 견줄(?) 정도로 고전하다가 경쟁 지상파 방송국인 WB와 합병에 이르게 된 네트워크인 UPN에서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UPN이 쇠퇴의 길을 걸으며, 〈베로니카 마스〉는 구성의 흡입력과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평이 자자함에도 여전히 그 운명이 풍전등화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시청률이 도무지 나오지 않아, 1시즌을 끝으로 접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으나, 당시 UPN 사장의 지대한 총애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하지요. 그나마 운이 좋았다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새로 합병된 그룹에는 “되는 드라마만 하자”라는 얘기가 있어서 향방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아마도 WB와 UPN이 합병된 새 네트워크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드라마 1순위가 〈스몰빌〉임에는 틀림없겠으나, 〈베로니카 마스〉역시 순전히 작품만의 힘과 재미로 시청자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2순위를 차지할 확률 역시 상당합니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베로니카 마스〉는 트리플 A라는 마이너리그의 슈퍼 루키임은 틀림없지만, 인수합병을 통해 확실한 메이저로 거듭나려는 측에서 보면 메이저리그 정규 로스터에 세울 수 없는 재목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베로니카 마스〉가 비운의 슈퍼 루키로 사라지는 안타까움만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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