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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 <카사블랑카>

“당신 눈동자에 건배!” - <카사블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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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Casablanca, 1942년, 워너브라더스)
음악: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
감독: 마이클 커티즈(Michael Curtiz)
제작: 할 B. 월리스(Hal B. Wallis)
주연: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카사블랑카>의 오리지널 포스터
<카사블랑카>를 처음 스크린으로 접한 곳은 신사동 사거리였다. 신사동도 한때는 극장들이 성업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신사동은 강남의 영화 중심이라 부를 만했다. 지금에야 여러 극장에서 동시 개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예전에는 사대문 안에 있는 대형 극장에서 단관 개봉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부터 이런 시스템이 바뀌기 시작한다. 전에는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같은 개봉관까지 가야 했지만, 강남 몇몇 극장에서 같은 날 같은 영화를 개봉하게 된 것이다. 이때 신사동은 한 동안 ‘영화의 거리’로서 전성기를 누린다. 심지어 사거리에는 마릴린 먼로 동상까지 세워져 있었다. 치마가 바람에 젖혀 올려지는 <7년 만의 외출>의 한 장면이었다. 2009년 가을쯤에는 연극 <라이어>를 보러 갔다가, 몹시 낯익은 공간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과거의 오즈 극장이었다. 고전 영화들을 전문적으로 상영하던 곳이다. 지금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강남역과 코엑스 몰로 극장들이 몰려가고 오즈 역시 연극 전용관으로 바뀌었지만, 오래 전 이곳에서 본 몇 편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카사블랑카>도 그 가운데 한 편이다. 이제는 극장들도 동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시간들은 흐르고 풍경들은 바뀐다. As time goes by….

2010년 3월, 이화여대 캠퍼스 안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에 <카사블랑카>를 다시 보러 갔다. 누군가 이미 본 영화가 아니냐고 묻는다. 당연히 스크린으로, DVD로, 비디오로 여러 번 본 작품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 이미 본 작품을 다시 접할 때마다 나 자신의 감정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그대로이지만 감상자가 바뀐 것이다.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적어도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이라면, 그 안에는 새롭게 맛볼 수 있는 다양한 디테일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덕분에 내가 정서적으로 얼마나 변화를 겪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날의 관객은 열 명 남짓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마자 관객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행복한 표정이다. 그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표정들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두운 공간 속에 비추어진 한 줄기 빛, 두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의 공유, 그것이 영화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스크린에는 낡은 필름이 비춰진다. 처음에는 약간의 잡음과 스크래치 난 필름에서 내리는 비가 거슬린다. 옛날 영화에 빠져들기까지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다. 아무리 복원 작업을 많이 한다 해도 가끔은 이처럼 낡은 프린트를 접할 수밖에 없다. 뉴스릴 필름을 연상케 하는 성우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2차 대전 중 비시 정권 치하의 도시 카사블랑카. 나치의 압제를 피해 도주하는 이들이 주로 거쳐 가는 도시다. 게슈타포와 프랑스 괴뢰정부의 경찰들, 이탈리아 경찰들이 서로 섞여 업무를 볼 정도로 전쟁의 혼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북아프리카의 이 음험한 도시를 찾아오는가. 카사블랑카는 유럽의 마지막 비상구, 미국행 비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밤이 내리면 그들은 삼삼오오 카페 아메리캥(Cafe Americain)으로 모여든다. 아메리캥은 도무지 과거를 알 수 없는 냉소적인 미국인 릭 브레인(험프리 보가트)이 운영하는 술집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낮은 목?리로 밀담을 나누며 도시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가게 문이 열리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샘(둘리 윌슨)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It Had To Be You」(당신이었어야만 해요), 사랑의 운명을 암시하는 곡이다. 도망칠 수 없는 막장 같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한 잔 술에 위안을 찾고 도박을 하며 불안을 떨치려 한다. 그리고 저마다 비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골몰한다. 이런 카사블랑카에 체코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빅토르 라즐로(폴 헨레이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일자(잉그리드 버그먼)가 또 한 쌍의 망명자로 들어온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통행권 두 장. 그러나 통행권을 건네주기로 한 남자 우가트는 이미 경찰에 잡혀 죽은 후이고, 우연히 통행권을 손에 쥐게 된 사람은 냉정한 카페 주인 릭이다.

카페에 들어온 일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샘과 마주친다. 피아노 옆에 앉은 그녀는 샘에게 릭의 근황을 물어본다. 추억을 떠올리듯 일자의 눈동자가 잠깐 빛난다. 그러나 샘은 일자의 눈을 피하며 대답을 꺼린다. 일자는 당연하다는 듯 표정을 바꿔 샘에게 부탁한다. “연주해줘요, 샘. 옛날 노래를.” 하지만 샘은 그녀를 외면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곡을 연주한다. 일자는 다시 청한다. “연주해줘요, 샘. ‘As Time Goes By’를.” 잊어버렸다는 샘의 대답에 일자는 허밍으로 직접 멜로디를 불러가며 다시 부탁한다. 어쩔 수 없이 샘은 좋았던 옛날을 떠올리듯 미소를 머금고는 허공을 쳐다보며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기억해야만 해요,
키스는 여전히 키스인 것을.
한숨은 단지 한숨인 것을.
근본은 그대로이죠.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두 연인이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어도 좋아요.
미래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석연치 않게 이별했던 연인 릭(험프리 보가트)과 일자(잉그리드 버그먼)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재회한다.

카페에 들어온 릭은 흐르는 노래를 알아채고는 화난 표정으로 샘에게 다가간다. “이 노래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샘은 입을 다물면서 눈짓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킨다. 파리에서 사랑을 나누었으나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헤어졌던 연인 릭과 일자는 이렇게 하여 위험한 도시 카사블랑카에서 재회한다. 이제 샘은 노래를 그쳤지만, 두 주인공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가사 내용은 이미 두 소절에 다 표현되어 있다.

늦은 밤 카페 문을 닫은 후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릭은 샘에게 ‘그 곡’을 다시 연주해달라고 청한다. “그녀를 위해서도 연주하지 않았나. 그녀가 그것을 견딜 수 있다면 나도 견뎌.” 「As Time Goes By」 멜로디를 따라 파리에서의 추억이 펼쳐진다. 독일군이 파리에 진주하기 전날, 릭은 일자와 샴페인을 마시면서 샘의 연주를 같이 들었다. 광장에서는 게슈타포가 확성기로 내일 열릴 환영행사에 참석하라고 떠들어댄다. 내일이 되면 릭과 일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기차역에 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릭은 혼자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사라진 사랑을 위험한 도시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가슴 아픈 회상과 함께 담담하면서 슬픈 멜로디가 흐른다. 릭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일자가 들어온다. 통행권을 쥐고 있는 릭과 그것을 애타게 구하는 일자…. 릭은 다시 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일까. 「As Time Goes By」는 그 모든 사연을 담고, 과거와 현재의 아픔을 그려낸다. 아름다우나 슬프다. 지나가버린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카사블랑카>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보니 온갖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일자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에도 후일담이 있다. 이미 음악가로서 거장의 위치에 있던 맥스 스타이너는 이 신을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로 대체하려고 했다. 아마도 스타이너의 당시 위상이라면 영화의 전체 음악을 다 장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잉그리드 버그먼이 다음 출연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찍기 위해 머리를 짧게 커트해 버린 후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페에서 「As Time Goes By」를 연주하는 신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에는 맥스 스타이너도 이 노래가 그렇게 히트하리라 예상치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완전히 믿을 만한 정설은 아니다. 성공한 영화란 신화화되게 마련이고 후일담 역시 곁들여지는 법이니까. 스타이너의 의도가 어떠했건 실제로 영화에서는 「As Time Goes By」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장면에 걸쳐 편곡되어 나온다. 노래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려내고, 릭과 일자의 감정이 교감하는 것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마음에 아련함을 더한다. 영화 전반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As Time Goes By」가 이야기를 이어주며 테마 음악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카사블랑카> OST 재킷.
험프리 보가트의 우울한 눈매는 일품이었다.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바이벌해서 불렀지만,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영화 속에서 샘이 부르는 원곡이다. 그의 피아노 연주에는 귀를 더 기울이게 하는 무엇이 있다. 두 연인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샘, 그는 사랑했으나 헤어져야 했던 두 주인공의 슬픔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 릭의 심정이 거기에 담겨 있다. 두 연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탓에 샘의 눈빛은 더 한층 허공을 향할 수밖에 없다. 노래 속에는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녹아있다. 그러기에 영화를 보면서 「As Time Goes By」를 듣는 것과, 그저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것은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흑인 피아니스트의 까만 살빛, 맑게 빛나는 하얀 눈동자로 인해 더욱 느낌은 강해진다.

<카사블랑카>에서 「As Time Goes By」만큼이나 인상적인 음악으로는 맥스 스타이너가 편곡해서 연주하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있다. 「As Time Goes By」가 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해준다면, 「라 마르세예즈」는 독일에 침략당한 프랑스 땅이라는 상황을 설명해준다. 아니 프랑스만이 아니다. 곡은 침략군 독일에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적 상황을 연결시켜 준다. 메인타이틀이 나올 때도 이국적인 오프닝 음악에 이어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진다. 라스트 신, 자욱한 안개 속에서 리스본 행 비행기가 이륙한 후 릭과 경찰서장 르노가 함께 걸어갈 때도 같은 곡이 연주된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연주는 릭의 카페 장면이다. 독일군들이 피아노를 치며 독일 군가를 부르자 빅토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다 악단에게 다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해달라고 청한다. 멀리서 지켜보던 릭이 악단에게 연주해도 좋다는 눈빛을 보내자 우렁찬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와 함께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합창한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조되자 독일군들의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사람들은 나치에 대한 적대감과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카페 안에 울리는 「라 마르세예즈」 연주는 나아가 관객들의 가슴마저 뛰게 만든다. 극적인 긴장감과 함께, 전쟁 중의 프랑스령 카사블랑카라는 도시의 공간감을 동시에 일깨워주는 것이다.

릭은 자신이 쥐고 있던 통행권을 빅토르와 일자에게 내준다. 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카사블랑카>의 위대함은 어쩌면 릭이라는 비극적 캐릭터 때문에 더욱 강화되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감상하다가 잠시 중세 기사들의 영웅담을 떠올린다. 아서 왕과 기네비어 왕비, 그리고 랜슬롯 경의 이야기 말이다. 존경심에 뿌리를 둔 빅토르와 일자의 사랑, 거기에는 정신적인 무엇이 있다. 빅토르와 일자는 결코 키스하지 않으며, 뺨에 입술을 맞추는 정도가 전부다. 그에 비하면 릭과 일자가 나누는 키스에는 깊은 애정이 어려 있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릭은 통행권을 주고 두 사람을 떠나보낸다. 릭과 일자는 ‘요즘 영화’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카사블랑카>는 지금보다 더 숭고함을 중시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일자를 보내는 릭은 중세의 기사다. 이별을 참아낼 수 있기에 릭의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애정을 넘어 영원한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위험한 도시에 홀로 남는 남자. 이것이 릭의 캐릭터가 위대함을 얻는 부분이며, <카사블랑카>가 멜로드라마 이상의 차원에 도달한 이유일 것이다.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 중의 하나.
안개 자욱한 비행장에서 릭은 일자를 떠나보내고 위험 속에 홀로 남는다.

[Tip 1] 「As Time Goes By」는 1931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에 처음 등장했던 노래다. 잊힐 뻔했던 노래가 <카사블랑카>에 삽입되면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칼리 사이먼 등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바이벌했다.

[Tip 2] 허버트 로스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Play It Again, Sam)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사블랑카>를 패러디한 영화인데, 시나리오의 원작자이자 주연을 맡은 우디 앨런이 험프리 보가트의 유령으로부터 여자관계에 대한 자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Tip 3] 벨기에 출신 여성가수로 빅토르 라즐로(Victor Lazlo)가 있다. 본명은 소냐 드로니에(Sonia Dronier)인데, <카사블랑카>의 등장인물 이름을 예명으로 쓴 경우다. 옛날 영화 같은 고혹적 분위기로 같은 앨범을 빅 히트시킨 바 있다.

[Tip 4] 릭이 얘기하는 “당신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는 AFI 선정 ‘최고의 명대사 100’ 중 5위에 올랐다. 28위에 오른 대사는 일자가 얘기하는 “연주해줘요 샘, ‘As Time Goes By’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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