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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재난이 다가와도 우리는] ‘수라’에서 우리는 공동체가 된다

박진영 칼럼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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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맞서며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간직하고 끊임없이 돌보려는 시민들의 힘과 목소리. 나는 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마음을 뺏긴다. (2024.05.09)


재난의 시대, 사회적 연대를 고민하는 박진영 연구자의 에세이.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수라> 포스터


수만 마리 새가 무리를 지어 갯벌 위를 날아간다. 춤을 추는 모습 같다. 화면을 가득 채운 새의 움직임과 날갯짓 소리와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새만금 지역에 남은 마지막 갯벌인 수라갯벌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수라>를 보며 나는 자주 눈물을 훔쳤다.

세계 최장 길이의 방조제를 건설하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간척 사업’ 또는 더 이상 생명이 살아 숨 쉴 수 없는 죽음의 땅. 어떤 표현으로 새만금을 처음 접했었는지 떠올려 본다. 1991년 11월 방조제 공사를 시작으로 2006년 4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며 땅 매립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그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조각의 갯벌이 수라갯벌이다.

<수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부터 갯벌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연대해 온 시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국가 주도의 개발 사업으로 삶의 터전과 일자리와 친구와 가족을 잃은 사람들, 내리는 비를 들어오는 바닷물로 착각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말라버린 조개들, 마치 석유같이 새까맣게 썩어버린 퇴적토의 이야기를 보며 슬프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동시에 새만금 갯벌에 펼쳐진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 기록하려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활동을 보며 북받친 눈물이 나기도 했다.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대규모 토건 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생태계와 사회의 피해를 생각하면, 이 사업을 ‘사회적 재난’이라 보는 게 마땅할지도 모른다. 이 오래된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재난 앞에서 2003년부터 20년간 묵묵히 새만금의 환경과 생태를 기록하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활동을 보며 나는 ‘재난 공동체’를 떠올린다. 작가이자 활동가인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재난과 재난을 둘러싼 정치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모든 재난에는 고통, 죽음, 상실이 있지만, 한편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유대와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가 출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솔닛은 재난을 겪은 구성원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유대와 자유의 시공간을 ‘재난의 공동체’ 또는 ‘재난 유토피아’라 명명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 곁에는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지역주민과 공동체가 함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위험과 상실, 박탈을 함께 겪음으로써, 사회적 고립을 극복한 생존자들 사이에 친밀하고 집단적인 연대감이 생기고, 친밀한 소통과 표현의 통로가 나타나며, 든든한 마음과 서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려는 의지가 샘솟는다(167쪽).”



조사단의 활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상호부조를 넘어 새로운 방식의 재난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과 생명체와 시민의 연대와 우정을 통해서도 재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솔닛이 재난 상황에서 피어난 새롭고도 중요한 감정을 목도하고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황과 그런 감정이 만들어낸 상황에 관한 이야기(16쪽)에 주목했던 것처럼, 나는 조사단의 활동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마주한다. 기록과 기억의 힘을 믿고 연대해 온 모습을 보며 분노와 좌절을 넘어 아름다움이 이끄는 마음의 동요에 더 집중해 본다.

“어쩌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 건 절망과 분노입니다. 하지만 새만금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어떤 생물이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기쁨과 희망을 찾고 에너지도 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20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24년 4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일동, 사진으로 본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20년 <바다를 만나다> 전시 서문 중에서)

재난에 맞서며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간직하고 끊임없이 돌보려는 시민들의 힘과 목소리. 나는 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마음을 뺏긴다. 지난 4월 갤러리 적에서 열린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20년 기록을 돌아보는 전시 <바다를 만나다>에서 수라의 조개들과 칠면초, 칠게, 흰발농게, 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 재두루미, 말똥가리, 고라니, 삵과 같은 새만금의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생명체들의 사진과 조사단의 활동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조사단의 사진과 기록을 통해 어느새 나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확장되고 있는 공동체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극장에서, 공동체 상영회에서, 영화제에서 <수라>를 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갯벌을 예전으로 되돌릴 방법은 ‘상시 해수 유통’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강과 바다의 흐름이 끊어지며 아래쪽에 정체된 물이 썩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바닷물이 흘러야만 한다. 이러한 상시 해수 유통 활동에 마음을 보태고, 직접 수라를 찾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또한 공동체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수라’라는 공동체 속에서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우리에게 보여준 “부당함과 상처를 고치는 일”과 “사랑과 의미의 가치”(463쪽)를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이 보여준 기록의 힘을 믿으며, 나 역시 수라갯벌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보탠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이 폐허를 응시하라
레베카 솔닛 저 | 정혜영 역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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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진영(환경사회학 연구자)

환경사회학 연구자.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환경과 보건의 교차점에서 과학기술, 사회운동, 정치를 주제로 연구한다. 저서로 『재난에 맞서는 과학』,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공저), 『재난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와 실천』(공저)이 있고, 《한편 13호 집》에 글을 실었다.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공해와 지역 환경재난을 사례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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