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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깡!

안담의 추천사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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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리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플레이어들은 엉겁결에 퍽을 쳐낼 뿐 게임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작가들의 퍽은 자기연민 사이드와 자기혐오 사이드를 두려운 속도로 오간다. 자기연민 쪽에서 깡! 자기혐오 쪽에서 깡! (2024.03.20)


언젠가 나의 글방에 왔던 참가자로부터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때 담이 그러셨잖아요. 저는 잘 휘청거리는 작가라고. 완전히 취한 것과 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요. 완전히 취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글이 쉬워졌어요. 그 말에 힘을 얻어서 계속 쓸 수 있었어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제 기억에 저는 정반대로 말했어요. 잘 휘청거리려면 작가가 완전히 취해버리면 안 된다고요. 독자에게는 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요. 그런데 반대로 기억하신 걸 보면 그 말을 듣는 게 필요하셨나 봐요. 제 말 때문에 계속 쓰신 게 아니에요. 작가님이 자신에게 해준 말 덕분에 계속 쓰신 거죠. 스스로 구원하신 거예요. 그는 그래요? 되묻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써도 되나요? 그럼요. 저도 쓸게요.

합평은 지난하고 괴로운 과정이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세상이 자기에게 잘못하는 이야기만 써온다. 그는 언제나 억울하다. 불쾌한 택시 기사, 비위생적인 음식을 내놓은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구는 식당 주인,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상사와 내 자리를 가로챈 후임, 나를 학대한 부모, 나를 때리는 연인, 나를 실망시킨 친구, 나를 죽이는 사회. 그와 이 세계는 절대적인 피해-가해의 관계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궁금하다. 그가 당하는 일 말고 그가 하는 일도 궁금하다. 누구도 이 세계에서 목적어만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세계관은 정확하지 않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당신에게는 힘이 있어요. 그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 말을 상냥한 응원으로만 받아들여준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고마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낀다. 내 입장에서 당신에게 힘이 있다는 말은 잔인하고 뼈아픈 말이기 때문이다. 내게 힘이 있다면 나는 뭔가를 한다. 세계만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고 나도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의 명백한 원인이다. 그 사건은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일 수도 있다. 나의 힘을 인정하라는 말은 나의 잘못과 그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말은 내게 상냥하게 느껴진다.

옳거니. 작가는 이를 악문다. 다음 주에 그는 자기가 세상에 내내 잘못하는 이야기를 써온다. 글 속에서 작가는 세차게 자기 뺨을 내리친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덕은 죄다 나의 책임입니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엄마, 아빠의 삶을 질식시켰고요. 이후로 사랑을 알려준 모든 사람을 버렸습니다. 무단횡단을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밥을 너무 많이 먹지요. 언제나 지각을 합니다. 살아있는 닭과 돼지가 떼로 묻히는 세상에서 나는 감히 먹고 살고 숨을 쉬고요. 지난주에 폭발했다는 그 별에게도 미안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마감에 늦는 바람에 그 별이 죽은 거예요. 피드백을 너무 잘 소화한 나머지 한 주 만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타난 작가를 난처하게 쳐다보다가 나는 이번에는 이런 말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힘이 있으시긴 한데 그 정도는 아니세요. 내가 글방에서 하는 수많은 말들은 결국 이런 결론을 향해 간다.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 근데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힘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 있다. 그 어느 정도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가진 힘, 그 힘의 종류와 크기를 가늠하도록 돕는 게 글방지기로서 내가 하는 일이다.

합평 중에 종종 나는 오락실에서 즐겨하던 에어 하키 게임을 떠올린다. 매끈한 테이블 위에 놓인 납작한 하키 퍽을 호떡 누르개 같은 채로 쳐서 상대편으로 보내는 그 게임 말이다. 동전을 넣은 직후의 테이블은 기름이라도 칠한 듯 미끄럽다. 랠리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플레이어들은 엉겁결에 퍽을 쳐낼 뿐 게임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작가들의 퍽은 자기연민 사이드와 자기혐오 사이드를 두려운 속도로 오간다. 자기연민 쪽에서 깡! 자기혐오 쪽에서 깡! 자기연민 쪽에서 깡! 자기혐오 쪽에서 깡! …… 에어 하키와 달리 이 게임에는 시간제한도 딱히 없다. 오손도손, 두런두런, 와글와글, 이런 살갑고 나긋한 의성어나 의태어로는 글방에서 오가는 합평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글방에서는 깡! 하는 소리가 난다. 그건 영혼이 빠개지는 소리다. 글방에 딱 한 번 왔다가 사라진 많은 사람이 있다.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머물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줄 수 없다.

그럼에도 기어이 남은 사람들과는 이런 순간을 같이 맞이하고 싶다. 게임이 막바지에 이른다. 기세 좋게 테이블의 양극단을 찍어대던 퍽의 진폭이 서서히 작아진다. 힘이 빠진 퍽들은 마침내 테이블의 중간 영역에 멈추어 선다. 그곳에서 우리는 피곤하기도 하고 좀 편안하기도 하다. 바닥과의 마찰로 예전의 개성이 닳아버린 듯도 해서 누군가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그 고생을 해서 도착한 게 고작 중간이라니. 위태롭고 요령 없는 만큼이나 손쉽게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게임의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그 애매하고 미지근한 자리에서 가만히 숨을 몰아쉬다 보면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간이다. 이 경기장의 양 끝, 그 두 점 사이에도 공간이 있다. 다시,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 그 공간만큼 움직일 힘이.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게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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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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