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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판권면

김영훈 칼럼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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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드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어디 편집자 혼자서 가능한 일이던가. (2024.03.11)


지금 출판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김영훈 편집자가 말해주는 출판 이야기. 격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pexels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땐 눈에 보였으나 이젠 보이지 않는다. 책의 엔딩 크레딧, 판권면 이야기다. 출판노동자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으리라. 판권면에 있던 이름이 홀연히 사라지는 일은 연차가 쌓여도 좀체 익숙해지질 않는다. 퇴사자의 이름에서 ‘험한 것’이라도 나온다고 생각하는 걸까? 출판사는 기회만 오면 기다렸다는 듯 얼씨구나 하고 판권면에서 퇴사자의 이름을 도려낸다. 잃어버린 편집을 찾는 여정, 그 시작은 판권면이다.

잠깐, 혹자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정부가 출판 및 독서 지원 예산을 요목조목 따져서는 요모조모 삭감하고, 언론에선 표지와 제목 ‘카피캣’ 문제를 보도하며 출판계 전반의 윤리 의식을 지적하고, ‘대감집’부터 ‘1인 출판’까지 현상 유지를 당면 과제로 삼은 하 수상한 시절에 이런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냐고.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변명하자면, 그 모든 문제와 판권면은 별개가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판권면(板權面)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저작권 사항과 간행 기록이 적힌 페이지를 말한다. 편집자의 동반자, 『편집 매뉴얼』은 판권면 대신 간기면(刊記面)으로 부르기를 권장한다(이에 따라 아래부터 ‘간기면’으로 통일한다). 출판문화산업 진흥법과 대통령령에 따르면 간행물에는 반드시 저자, 발행인, 발행일, 출판사와 ISBN이 표기되어야 한다. 즉, 권리의 소유자와 발생일을 밝히는 간기면은 책에서 뺄 수 없는 구성 요소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 출판법과 대통령령이 정하지 않는 내용의 기재 여부는 모두 출판사 재량에 달려 있다.

덕분에 간기면 양식은 출판사마다 각양각색이다. 같은 출판사여도 책에 따라 차이를 둔다. 이를 마음대로 거칠게 분류하면 필수항목만 겨우 기재하는 최소주의형, 담당 편집자에 디자이너와 마케터를 더하는 책임제형, 회사 직원을 모조리 기재하는 최대주의형, 책에 사용한 종이나 서체와 제책 방식까지 소개하는 백과사전형 등이 있다. (물론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서로 조합되어 다양한 양식을 이룬다) 간혹 외주 노동자와 인쇄소, 제지사 등 협력 업체까지 꼼꼼하게 명기한 간기면을 보면 무엇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출판사의 신념이 느껴지기도 한다.

출판계에선 흔히 간기면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비유한다. 단지 본문 뒤에(또는 앞에) 위치하기 때문은 아니다. 간기면과 엔딩 크레딧은 권리자를 밝힌다는 본래 역할은 물론 그 변화 양상도 꽤 유사하다. 과거의 엔딩 크레딧이 감독과 주연 배우 정도만 기재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조연과 단역 배우 그리고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인원을 넓게 포괄한다. 참여자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 노고에 보내는 헌사인 셈이다. 꼭 기재하지 않아도 되는 이름과 정보를 기재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간기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분명한 차이도 있다. 한번 상상해 보자. 엔딩 크레딧에 다른 출연진과 제작진 이름은 하나 없고 제작사나 연출팀 명단만 나열한다면 어떨까?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런데 여전히 다수의 간기면은 출판사 직원, 그중 특히 ‘책임’ 편집자 위주로 기재된다. 권리란 일절 없고 ‘책임’만 있는 편집자(팀) 이름을 저작권자와 출판권자 이름 밑에 덩그러니 두는 건 어떤 기만이나 위선에 가깝다. 책을 만드는 건 편집자니까 응당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책을 만드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어디 편집자 혼자서 가능한 일이던가.

퇴사자를 적대하는 간기면의 성향에도 재고가 필요하다. 대개 출판사는 판과 쇄를 거듭할 때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양 간기면에서 퇴사자 이름을 찾아 삭제한다. 아무런 권리는 없으나 ‘함께 책을 만든 노고에 대한 헌사’로서 간기면에 이름을 적었다면, 퇴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노릇 아닐까? 하물며 편집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3년 내외. 늘어나는 쇄와 쇄 사이의 시간을 생각하면, 몇 차례 중쇄를 찍은 책의 간기면은 초판의 그것과 전연 딴판일 공산이 크다. 어쩌면 그것은 헌사는커녕 조직 현황도와 진배없을지 모른다.

“도요즈미인쇄라는 글자 너머에는 전체 직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야. 판권은 책의 엔딩 크레딧이니까.”(350쪽)

일본 소설가 안도 유스케가 인쇄업계를 3년간 취재하고 쓴 소설 『책의 엔딩 크레딧』은 간기면에 회사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인쇄소의 세계를 그린다. 주인공은 인쇄회사 도요즈미인쇄 영업2부 우라모토 마나부, 그는 “책을 인쇄하는 게 아니라 책을 만드는 게 우리 일”이라는 사명으로 매일 출근한다. 분명 책을 만드는 건 저자, 발행인, 책임편집자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닐뿐더러 ‘그들’만의 일도 아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바뀌는 것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간기면에는 누구의 이름이 어떻게 담겨야 할까?

간기면에 더 많은 이름과 정보가 담기길 기대한다. 정답은 없겠으나 참고할 대안은 존재한다. 어크로스는 간기면 하단에 “만든 사람들”을 따로 기재한다. 처음 만든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고민의 결과다. 휴머니스트는 자기만의방 시리즈 간기면에 짧은 편집 후기를 실어 마치 영화의 ‘쿠키 영상’처럼 소소한 재미로 독자를 유인한다. 출판문화의 회복, 출판사 권익 향상 모두 그 토대가 되는 출판노동을 온당히 대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한계와 같은 타성에 젖은 변명일랑 그만, 당장 간기면부터 편집하자.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3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3
편집부 편
열린책들
책의 엔딩 크레딧
책의 엔딩 크레딧
안도 유스케 저 | 이규원 역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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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영훈(출판 편집자)

편집자. 서너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했다.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타이완과 홍콩을 사랑한다. X(트위터였던 것) @bookeditor_

ebook
책의 엔딩 크레딧

<안도 유스케> 저/<이규원> 역11,760원(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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