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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분노를 간직한 채 이야기로 만들기 - 김혜윤 동녘 편집자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 & 『마이너 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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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적 감정을 소화하는 일, 소수자가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은 늘 지난하지만 이 감정과 이야기는 중요하고 존엄하며 고유하다. (2024.03.06)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은 멕시코 이주노동자의 딸이자 양극성 장애 환자인 에리카 산체스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구축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삶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산체스는 겹겹의 소수자성을 두른 채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이었던 자기 삶을 아주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는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멕시코 딸’로 살기를 거부했고, 몸을 가진 것 자체로 위협당하는 여성으로서 폭력과 대상화에서 살아남았고, 스페인어와 영어를 이중 언어로 구사하며 미국의 맥락 속으로 편입되려 노력했으며, 양극성 장애를 앓으며 우울과 자기혐오를 견뎠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자기소개 해시태그가 아니다. 정체성은 누군가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일종의 장르다. 로맨스 영화에서 낭만적 기류가 흐르고 호러 영화에서 긴장감이 조성되듯 정체성은 한 사람의 가치관과 정서를 지배한다. 한국계 이민 2세대인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이렇게 썼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비주류일수록, 소수자일수록, 주변부에 선 사람일수록 감각을 곤두세우며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은 너무 예민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정체가 없다고 여겨진다. 캐시 박 홍은 이런 감정을 ‘소수적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그들은 분노하고, 외면당하고, 그래서 점점 더 크게 분노한다.



‘소수적 감정’은 인종적 경험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의 소수적 분노와 마주했다.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마치 오랫동안 외워온 대사처럼 입속에서 흘러나왔다. 선생님은 나에게 과하게 화를 내고 있다고, 그만 화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그 분노가 너무 소중했다. 그건 내가 가진 유일한 나의 것이었으니까. 결국 그 상담은 그만뒀다. 선생님은 나의 삶과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런 종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 분노가 사라지기를 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의 분노가 예술의 진정성을 갉아먹으며, 여성 작가가 진정 자유로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분노를 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리카 산체스는 울프의 의견에 반대하며 이렇게 썼다. “왜 분노하면 안 되는가?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되겠는가? 나는 나의 분노를 돌본다. 이름을 붙인다. 머리를 빗겨주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그 문장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때로 나의 분노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분노와 갈망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산체스는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자기파괴적이고 가망 없는 연애에 매달렸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연애가 중독적이고 해로웠다고 인정했다. “나는 평생 애정과 관심의 조각을 주워 모으기만 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산체스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속인 남자를 계속 만나고, 자신을 거부하는 병든 남자에게 집착하고, 무능력한 남자와 지지부진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계속해서 갈구한다. 사랑을, 애착을, 연민을, 이해를, 아무튼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하지만 당연하게도 누구도 그의 빈 구멍을 메워줄 수 없었다.

약자의 위치에서, 우리는 상대를 증오하며 동시에 사랑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자신을 무시하고 받아들여주지 않는 상대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용인되기를 열렬히 바란다. 이건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본능이다. 캐시 박 홍은 자신이 문단과 낭독회에서 ‘아시아인의 목소리’를 기대하는 백인들을 위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절실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소수적 감정에 대해, 인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건 ‘허락된 만큼’의,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여야만 했다.

그래서 캐시 박 홍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다. 무대에 올라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로 삼아 관객들에게 겨눴고, 소수적 경험으로 농담하며 그간의 ‘예의바른’ 이야기 구성을 모조리 버린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마조히스트인 만큼이나 사디스트이고, 바로 그런 기질 때문에 스탠드업 코미디에 끌렸던 것이다. (…) 인종에 관해 솔직하게 쓰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으나 그보다 더 원한 것은 안주하는 자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었다.” 에리카 산체스도 자신의 소수적 분노에 유머를 두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일 심하게 억압받는 사람이 언제나 제일 웃긴다. (…) 웃음은 영혼의 여유를 드러내는 근사한 회복력의 한 형태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며 심지어 농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 가지 힘을 쥐게 된다. 하나는 나의 상처를 이야기로 만들어 가지고 놀 수 있다는 통제력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껏 나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타인을 놀라게 만들고 숙연해지게 만들 수 있는 전능감이다. 어떤 농담은 존재만으로도 송곳처럼 튀어나와 사람을 찌른다. 바로 그 순간 주도권이 넘어오고 권력 관계는 전복된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삶과 아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에 그가 부끄러워지도록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을 편집하고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일본계 미국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미츠키(Mitski)의 노래를 들었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 동양인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그의 노래에는 언제나 잔잔한 분노와 결핍이 깔려 있었다. 미츠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백인 남자친구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슬픔과 우울을 토해내고, 무대 바닥에 누워 자신을 좀 보라고 애원한다. 그는 <My love mine all min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니지만, 나의 사랑, 나의 것, 나의 사랑은 오직 나만의 것.”

에리카 산체스와 캐시 박 홍처럼 자신이 경험한 차별과 억압을 서사화한 이들에게는 오직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들의 글에는 그 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수적 감정을 소화하는 일, 소수자가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은 늘 지난하지만 이 감정과 이야기는 중요하고 존엄하며 고유하다. 그 누구도 이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필자 | 김혜윤

좋은 것을 잘 알아보고 싶은 편집자. 동녘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
에리카 산체스 저 | 장상미 역
동녘
마이너 필링스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저 | 노시내 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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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혜윤(동녘 편집자)

좋은 것을 잘 알아보고 싶은 편집자. 동녘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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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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