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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칼럼] 파운데이션을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주세요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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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어려움’. 이 놀랍도록 당당한 안내 문구는 화장품 용기의 62%에 해당하는 제품에 쓰여 있다. (2024.02.23)


기후위기 시대, 소비와 소유를 넘어 존재하는 법을 고민하는
이소연 에디터의 에세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이거 진짜 인생템입니다.”

그놈의 인생템은 어찌 된 게 사람 머릿수만큼이나 많다. 그러니 이쯤 되면 인생템이 아니라 그냥 템이다. 하지만 어떤 제품은 누군가의 인생템이라는 이유로 나의 마음과 지갑 그리고 내 화장대를 흔들었다.

소비는 쉬웠다. 돈만 내면 됐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매끈하게 포장된 화장품을 사는 건 쉬웠지만, 그것들을 내 얼굴과 분위기에 맞게 제대로 찍어 바르는 것은 유튜버의 설명만큼 쉽지 않았다. 작은 립스틱을 하나라도 살 땐 쇼핑백에 리본까지 묶어 소중하게 건네받았지만, 가방과 서랍을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되는 듯 뒹굴거리는 수십 개의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을 비워낼 때는 여덟 가지 분류 체제의 분리수거장 앞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어야 했다. 거울, 플라스틱, 스펀지 그리고 끈적한 액체… 이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분리’ 배출해야 한단 말인가.

전자레인지, 펜치, 망치. 총천연색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물건들은 놀랍게도 화장품을 버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재료다. 섀도 가루를 구석구석을 긁어내기 위한 얇은 철사, 공중에 날리는 분진을 피하기 위한 K94 마스크, 손에 찔리지 않도록 유리를 감쌀 만한 두꺼운 종이도 빠뜨리면 섭하다. 모두 화장품 분리배출 대작전에 총출동되는 주인공이다.

“파운데이션을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주세요. 그리고… 립스틱은 냉동실에 밤새 넣어두면! 준비 끝입니다.” 화장품 분리배출 크리에이터로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면 손가락으로 전자레인지 ‘시작’ 버튼을 누르며 위와 같은 멘트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광고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커버력’과 ‘밀착력’의 위력을 체감했던 순간은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두들기던 순간이 아닌, 빨간색 고무장갑 돌기에 낀 누런색 파운데이션 찌꺼기를 박박 벗겨낼 때였다. 용기 입구는 좁은데 병 안쪽은 넓어, 그 안을 구석구석 닦아내려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기름이 둥둥 뜬 노란 물을 부어냈다. 개수대는 금방 엉망이 됐다.

전날 밤 냉동실에 넣어두어 깡깡 언 립스틱은 본체를 잡아 빼면, 영원히 쓸 수 없던 립스틱의 뿌리 부분을 깔끔하게 떼어낼 수 있다. ‘아니, 여긴 쓰지도 못하는데 왜 한 달은 쓸 분량이 채워져 있는 거지. 이게 얼마짜리야.’하는 찰나의 분노에도 젖게 된다. 댕강 빠진 채 오롯한 맨몸을 드러낸 빨간색 화학물 덩어리를 내려다보면 허무함과 씁쓸함이, 바닥에 떨어진 플라스틱 립스틱 뚜껑처럼 팅 데구루루 밀려온다. 샤넬 에뛰드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이 생긴 손가락만 한 빨간 덩어리들. 이게 다 뭐람. 이 벌거벗은 립스틱이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면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는 코덕의 바이블은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재활용 어려움’. 이 놀랍도록 당당한 안내 문구는 화장품 용기의 62%에 해당하는 제품에 쓰여 있다.

뜻을 해석해 보면 말 그대로 정말 재활용이 어려우니 ‘가능한’ 분리할 수 있는 건 소비자가 알아서 분리해 보고, 안 되는 건 일반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버리라는 뜻쯤 된다. 재활용품을 제대로 분리배출하지 않으면 과태료까지 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화장품 쓰레기를 처리하는 번거로움도, 그를 처리하지 못해 종량제 봉투에 버릴 때 떠맡는 죄책감도 오롯이 소비자의 몫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 화장품 시장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457조 원에 달한다. 10대를 중심으로 전 연령의 화장품 소비가 빠르게 늘고 있어, 앞으로 매해 더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삶을 직접 위협하는 기후위기 시대, 화장품 쓰레기 문제 대신 내가 들어온 안내는 이런 것뿐이었다. 주름 방지는 20대부터 미리미리 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착색’되어 밥을 먹은 후에도 ‘생기’ 있어 보이려면 이 틴트를 써 보라고. 너 같은 웜톤에게 어울리지 않는 핑크 베이스 화장품일랑 이참에 모조리 버리고 새로 사라고. 그러니 파운데이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립스틱을 냉장고에 얼리는 수고로움은 애초에 소비자의 몫이 아니었다.

누구도 원한 적 없던 화장품 소비 행렬은 종량제 봉투를 거쳐 소각장이나 매립지로 향했다. 소각됐다면 유독 물질이 되어 공기 중을 떠돌았을 것이고, 매립됐다면 수백 년 동안 분해되지 않아 아직까지 지구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바다를 유영하던 어떤 해양동물의 목숨을 앗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때 누군가의 피부에 어여쁘게 발려 ‘생기’와 ‘활력’을 더 해주었던 바로 그 화장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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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소연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싼 가격에 ‘득템’하는 재미에 푹 빠져 기쁘나 슬프나 옷을 사다, 2019년부터 새 옷을 사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미디어 스타트업 뉴닉에서 3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기후위기, 환경, 포스트팬데믹 뉴노멀에 대한 글을 썼다. 바닷속과 바닷가의 쓰레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 코리아 활동가가 됐고, 스쿠버다이빙을 통해 바다 깊은 곳에 버려진 폐어구를 수거하는 정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물]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릿터] [코스모폴리탄] [1.5도씨매거진] 등 다수의 매체에 기후위기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2019년 아산정책연구원 영펠로로 선발돼 워싱턴에서 미국의 분리배출 및 폐기물 정책 디자인을 연구했고, 2020년 제2회 아야프(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 리서처 펠로십)에서 국내 재활용 정책 및 현황을 연구했다. 그 밖에 스브스뉴스 「뉴띵」, 모비딕 「밀레니얼 연구소」, EBS FM 「전효성의 공존일기」, KBS 라디오 환경의 날 특집 같은 예능·교양 콘텐츠에 출연하거나 환경 교육 및 특강을 진행하는 등 일상적인 방식으로 기후위기, 그린워싱, 패스트패션의 허와 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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