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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우리에겐 의심이 필요하다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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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의심이다. 유예로서 의심, 표현과 감각을 기각하는 대신 끈질기게 붙잡고 대면하며 다그치는 의심. (2023.12.29)


(참으로 새삼스럽지만) 기계의 객관성이라는 ‘신화’는 알고리즘과 AI의 광풍 속에서 여전히, 혹은 나날이 더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작금의 첨단정보기술은 그 편리함과 정확도로 말미암아 군사 활동이나 사고 보험처리를 넘어 공교육, 콘텐츠 제작, 그리고 일상의 놀이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고 있어서 -우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부르고 일론 머스크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편리함과 정확도가 객관성을 반드시 보증하지는 않지만 (대리보충의 방식으로) 그러한 ‘신화’를 일상적으로 덧붙이고 강화하는 데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당신이 최근의 미디어 연구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봤다면 이 ‘신화’의 양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테다. 기술이 사심 없이 중립적이긴커녕 권력과 공조 관계에 놓여있고 또 활동한다는 반대급부의 인식 역시 세간에 (위세까지는 아니지만) 퍼지고 있지 않던가? 흑인을 범죄자로 치부하거나 아예 인간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광학 기술, 군사기술과 맞닿아 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글로벌 IT 대기업들의 정보 독점. 게다가 당대의 보편적인 AI 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해 매번 사람 손을 거쳐야 구체화된 무언가를 출력한다는 건 또 어떤가?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논리를 반복할 생각이 없다. 기계는 인간과 달리 창조성이 없다거나, AI가 만든 ‘작품’은 지금껏 인간들이 만들어온 ‘작품’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거나… 『AI 지도책』의 케이트 크로퍼드의 말대로 작금의 AI가 “권력의 등기부”라면, (크로퍼드의 의도와는 별개로) 기술이 온갖 ‘사회적’ 담론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러할 테다. 기술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역량을 지닌 객체라는 포스트 휴머니즘적 사유는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를 개선하는 AI 모델인) 오토GPT가 출시된 ‘오래된 미래’ 속에서 갈수록 설득력을 갖는 듯하다. (『감정화하는 사회』의 오쓰카 에이지가 말했듯) AI가 생산한 ‘콘텐츠’들이 인터넷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면서 AI가 AI를 참조하기 시작한 요즈음에, ‘콘텐츠 제작자’ 만큼이나 ‘수용자’의 위상 역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함정일 수밖에 없다. 표현의 성립에 대한 그간의 관습들을 통째로 무너트리고 또 재정립함으로써, 기술은 인간의 것을 참조하고 그와 상호작용하면서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선 위를 달리고 있다. 이렇게 ‘인간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탈구축하고 있는 당대의 첨단정보기술 속에서, 우리는 거꾸로 생각의 개념 자체를 보다 정치하게 재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재고란 무엇보다 의심의 형식으로써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온전히 수긍하지도, 온전히 거부하지도 않는 유예의 상태로서 의심 말이다.

가령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간이 기계를 주관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얻은 표현-곧 이미지 역시 (엄연한 실체로 제시되며 우리와 상관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존재론적 객관성을 가진다. 그리고 한편으론 분명히 실체이되 항상 자연스럽고 자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딥페이크 기술이나 가짜 뉴스 같은 대안적 사실이 나날이 ‘사실적’으로 발전하거나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당대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끝없는 혼란을 겪는다. 이미지는 허구와 사실 중 하나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진동하며 그 사이를 매개하거나 뒤틀곤 하는 기이한 영향력의 ‘사물’이라 해야 한다. 거꾸로 말해, 이미지를 대함에 있어 우리가 주로 판단해야 할 대상은 다름아닌 그것의 영향력인 게다.



그리고 그 판단(력)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의심이다. 유예로서 의심, 표현과 감각을 기각하는 대신 끈질기게 붙잡고 대면하며 다그치는 의심. 지금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우리에게 감각된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나의 감각은 ‘반드시’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지는가? 무언가의 형식 혹은 그것에 대한 감각이 그 자체로는 어떤 사실을 지시하는 데 있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생각을 우리는 끈질기게 가져가야 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의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기, 곧 생각을 가지기를 통상적인 의미의 감각들과 절대로 맞세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감각 양태들은 우리가 생각을 붙잡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정보들을 신중히 다루고 가로지를 수 있는 판단(력)은 그 과정에서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때의 우리란 우리를 이루는 각자 개개인만을 이르는 말이 결코 아니다.



AI 지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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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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